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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평생 억누르는 외로움… 죽음…
생명이 숨쉬는 명지산은 '치유의 공간'
생명이 숨쉬는 명지산은 '치유의 공간'
관련이슈 :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009081200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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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은 명지산 도라지밭에서 “이곳에 오면 조금 비애스러울 뿐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말했다. 시인에게는 재활 공간이었던 명지산이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은 춘천보다는 아늑하다는 말이었다.
“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 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없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에도 그는 자유롭다.”(‘나비’)
재출간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쉼표나 마침표까지도 예전 그대로 유지했다. 지나온 흔적을 고친다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편집자의 요청으로 맨 앞에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는 시 한 편만 새로 추가했다. 동강댐 반대운동을 벌일 때 발표했던 시편으로 산림청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에 등재된 800여종의 생명체 이름을 그대로 다 나열한 뒤, 시인의 상념을 덧붙인 형식이었다.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밀버섯 밤버섯 뽕나무버섯 홀아비꽃대 사시나무 은나무 바보여뀌 기생여뀌 개여뀌 마디풀 취명아주 명아주 댑싸리 자리공 석류풀 쇠비름 털좀 나도나물 쇠별꽃……. 시의 형식도 파격이거니와, 수많은 생명체의 이름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치유를 받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명지산 가는 길은 경춘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한결 쉬워졌다. 고속도로가 아니라도 그동안 그곳에는 예전과 달리 수많은 펜션들이 들어섰고 계곡은 유원지가 되어 주말이면 사람들로 빽빽하다고 시인은 말했다. 시인과 함께 찾아간 명지산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평일인 데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 일기예보는 폭우 가능성을 계속 떠들어대던 터였다. 시인은 올해 제대로 피서 한 번 가지 않았는데 마침 잘되었노라고, 계곡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빛이 일렁이는 물속으로 내려가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시인의 얼굴이 해맑다.
최승호 시인을 기실 생태시의 대표주자라고만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다. 특별히 어떤 범주로 갇히기 싫어하는 편인데, 이 생태시라는 것도 시인이 시를 써내고 난 뒤에서야 국내에서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지니고 시를 먼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생태시보다는 문명비판적인 ‘도시시’가 주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또 다른 방향에서는 선시나 그로테스크의 잣대로 그의 시를 재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굳이 자신의 시를 관통하는 것이라면 등뼈 같은 외로움,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라고 했다.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와 가방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온 여기가 후생(後生)이라면/ 가방 든 시절이 전생의 이승이었단 말인가/ 회전문 밖에서 떨어진 가방을 들여다본다/ 내용물은 별것도 아니지만/ 나 없으면 육신의 껍질이나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지금 잃는다면 아쉬움도 꽤 따를 것이다// 장례식에는/ 산 자들이 억누르는 슬픔의 총체보다 더 큰/ 죽은 자의 고요한 슬픔이 뒤따른다”(‘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그는 2006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고비사막에 다녀왔다. 사막에는 아무 소리가 없어 말 그대로 적멸에 드는 ‘입적(入寂)’ 상태라고 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적멸의 공간이 무서웠다. 바짝 마른 동물의 허연 뼈들이 바람에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그곳은 반야심경의 공간이었다. 사막에서는 개들도 우울증에 걸렸다. 고비에서 돌아와 산과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록 짧은 열흘간의 체험이었지만 시인의 예민한 감성에는 한 생애의 비중과 맞먹었다. ‘바람이 텅 빈 해골들을 박차면서’ 달리던 사막에서 돌아온 뒤 6개월 동안 140여 편의 시를 써냈다.
“날이 없는 칼처럼/ 그 무엇이든 도려내는 고비의 바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울부짖으며/ 허공을 물어뜯는 고비의 바람/ 트랙이 없다 경마도 없다/ 돈에 목을 매는 마꾼도 없다/ 발굽 없이 힘차게 달리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암컷도 수컷도 아닌/ 바람이 텅 빈 해골들을 박차면서 달리고 있을 뿐이다/ 고삐도 없이/ 채찍도 없이 달리는 바람/(중략)// 바람이 거세다/ 뼈들이 겅중겅중 사막을 뛰어다닌다”(‘바람’ 부분)
최승호 시인이 일찍이 시를 지향했던 건 아니다. 대학 졸업 무렵에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작 시인이 되기 위해 안달하던 벗들의 시화전 패널을 만들고 삽화를 그려주는 처지였다. 춘천시내에서 유복하게 자라나다가 중학교 때 하루아침에 망한 아버지가 가출하는 바람에 소년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시작했고,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동기들은 서울로 진출했지만 지방의 교대에 진학했다. 그 시절의 막막한 비애는 지금 돌아보아도 선명하다. 내내 따로 나가 살면서 한푼도 지원하지 않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서야 “미안하다”고 한마디 했다.
정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너무 풍광이 아름다워 시를 쓰기에 부담스러웠다. 사북으로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분류될 정도로 까만 광산과 광부, 까만 절망이 가득한 곳이어서 처처가 시의 소재였다. 사북에서 엉뚱하게도 다른 이들 대신 ‘문제교사’라는 희생양이 되어 더 깊은 오지로 발령이 났다. 영혼의 골짜기라는 그 첩첩산중 ‘영곡’에서 절망을 견디지 못해 관사를 부수고 뛰쳐나와 상경했다. 그곳에서 썼던 ‘대설주의보’에 ‘오늘의 작가상’이 주어졌고, 각광받는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서울살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무렵 함께 살던 여인이 책들을 쌓아놓고 스스로 다비장을 치르는 참혹한 사태가 일어났다. 떠돌며 방황하기를 3년, 그를 위로해준 건 풀과 나무와 동물들의 이름이었다. 물속에서 걸어나온 시인이 계곡 옆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춘천에 가면 위험해요. 가까운 벗이 술 마시고 철길에 누웠다가 해체된 적도 있고, 폭행을 당해 머리통이 사라진 채 자기 집 굴뚝 밑에 매장된 친구의 기억도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이 내 무의식에 똬리를 틀어버렸어요. 슬픈 추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춘천에 가면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곤 합니다. 너무 슬프면 폐를 다쳐요. 피를 토하고 요절한 중국 시인 이하(李賀)를 내가 좋아하는 것도 불행에 대한 연대감 때문일 겁니다. 묘하게 불행이 주는 위안이 있어요. 이곳은 비애스럽기는 해도 아늑하게 치유 받는 느낌이어서 좋습니다.”
그는 멀리 남보라와 흰색 도라지꽃이 만개한 산자락 쪽에 시선을 주면서 계속 말했다. 자신의 체험으로만 시를 쓰는 건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고, 추구하는 게 따로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갇힘과 벗어남의 문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화두가 그것이라고 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감옥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고독이 뼈아플 때가 많은데, 그 고독은 등뼈처럼 평생 지고 가는 것인데, 그것은 또 그때그때 시로 쓰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간절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언설이다. 글은 피로 쓰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에는 체액이 어느 정도는 삼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능은 있는데 간절함이 빠져나가면 손끝으로 쓰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자꾸 조립하게 되는 것도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창을 던졌을 때/ 작살에 찔려 허공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눈은 휘둥그래졌고/ 세상은 놀라움의 광채를 띠게 되었다./ 죽음을 품고 햇빛을 더 강하게/ 죽음을 품고 어둠을 더 거칠게/ 그리고 낯설음을/ 더욱 낯설게 느낄 수 있는/ 回復期 병자들의 거울,/ 거울 속의 해골바가지여,/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휘둥그래지다’)
폐결핵 환자 시절,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다가 거울 속에서 마주친 자신의 ‘해골바가지’에 놀라 썼다는 시편이다. 배경을 듣기 전에는 치명적인 연인을 거론하는 시편인 줄 알았는데, 무릇 삶을 놀랍고 외로운 것으로 바꿔놓는 그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는 이번 생은 그냥 시만 쓰다가 죽겠다고 했다. 거창한 행복에 대한 욕망은 없어졌다. 동네 카페의 에스프레소 한 잔, 산책길 천변의 꽃구경, 새벽에 자전거를 타면서 바람을 가르는 즐거움, 음악…. 이런 것들 빼면 행복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계곡 옆 평상에 앉아 가볍게 마시던 술이 늦은 밤 시인이 집필 공간으로 애용한다는 동네 카페까지 이어졌다. 행복…, 뒤로는 암전이다.
jhoy@segye.com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 아무르장지뱀 도마뱀 누룩뱀 무자치 구렁이 능구렁이 (…) 산줄점팔랑나비 뿔나비 푸른부전나비 암먹부전나비 먹부전나비 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 밀버섯 밤버섯 뽕나무버섯 그늘버섯 붉은꼭지버섯 목버섯 알광대버섯 암회색광대버섯아재비 독우산광대버섯 (…) 도꼬로마 국화마 각시붓꽃 붓꽃 범부채 개불알꼴 병아리난초 제비난초 은대난초 타래난초 옥잠난초 홀아비꽃대 사시나무 은나무 (…) 바보여뀌 기생여뀌 개여뀌 마디풀 취명아주 명아주 댑싸리 자리공 석류풀 쇠비름 털좀 나도나물 쇠별꽃 (…) 수리취 절굿대 흰절굿대 조뱅이 쇠서나물 민들레 조밥나물 벋은씀바귀 벌씀바귀 씀바귀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 고들빼기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1998.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 나무로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무덤에나 핀 할미꽃이거나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관박쥐라 해도…….
■최승호
?1954 강원 춘천 출생, 춘천교대 졸업
?1977 ‘현대시학’에 시 ‘비발디’ 등을 발표하여 등단
?오늘의 작가상(1982), 김수영문학상(1985), 이산문학상(1990), 미당문학상(2003) 수상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세속도시의 즐거움’ ‘반딧불 보호구역’ ‘여백’ ‘모래인간’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고비’등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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