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남궁벽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마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북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 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의 역정(驛程)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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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1968년 5월 쓴 작품. 사 후《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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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2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풀잎』. 창작과비평사. 1998)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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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2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풀잎』. 창작과비평사. 1998)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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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향
송진호
산 풀에 내리는 비는
다습한 산풀향을 냅니다
마른 풀 위에 내리는 햇살은
잘 말린 마른 풀향을 냅니다
풀향이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골짜기에서 와
저쪽은 멀고
이쪽이 가깝다고 합니다
산 풀에 해가 내리기도 하고
마른풀이 비가 젖기도 하지만
산 풀은 산풀향
마른 풀은 마른 풀향
그냥 그렇길 바랄 뿐입니다
-시집『등대는 뭍을 비추지 않는다』(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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