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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백석-여승/송수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6. 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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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옛날처럼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웠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 속에 단어>

*가지취- 취나물의 일종.
*금정판- 금을 캐거나 파는 곳이지만 일용잡화도 취급 하였음.
*섶벌- 울타리 옆에 놓아 치던 재래종 꿀벌.
*머리오리- 머리카락

 

 

 

*이 시는 사회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 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승의 비극적 삶을 노래한 이 시는 평안도 사투리도 많지 않아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시집《사슴》(1936. 1)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7』(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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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꿈꾸는 섬)』. 문학과지성사. 1982)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2010-06-02 / 아침 8시 2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