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스크랩] 손금 보는 밤 / 이영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7. 8.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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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 보는 밤 / 이영혜

 


타고 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
육십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양 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 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 사람과 물줄기가 내 생의 요약인가.
물길 어디쯤에서 아직 합수하지 못한
그 누구 만나기도 하겠지.
누설되지 않은 천기 한 줄 훔쳐보고 싶은 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보름달이
화투장 같이 잦혀져 있다.
 


-월간 현대시 2008년 11월호.
다음 카페 「우리시 홈」 <이영혜 시인>의 방에서

 

 


사람은 어릴 때의 입맛을 잊지 못해 결혼 후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한다. 곤충(육식)을 먹고 자라서 번데기가 되고 탈피를 하고 난 뒤부터는 어릴 때의 입맛은 싹 잊어버리고 꿀만 먹는 나나니벌의 식성도 기이하지만 동물은 한 번 행해진 다음에는 똑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지를 못한다.

 

파브르곤충기에 보면은 나나니벌은 여치를 잡아서 자기 애벌레의 먹이로 한다. 벌의 신비한 능력은 자기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서 먹이를 다 먹을 때까지 여치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다. 목과 몸을 이어주는 목덜미의 가장 큰 신경에다 침을 놓아 전신을 마비시키는데 여치는 죽지는 않았지만 전혀 움직이지를 못한다. 어미가 이렇게 살아있는 먹이를 장만해 놓고 구멍을 막은 다음 떠나버리면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심장이 먼 곳부터 먹기 시작하여 중요한 신경부분은 제일 나중에 먹는다고 한다.

 

마사이 마라의 자연보호구역의 사자가 누우나 얼룩말을 잡으면 먼저 내장부터 꺼내 먹는 거와는 달리 속부터 파먹으면 여치는 죽을 것이고 죽고 나면 부패가 진행되어 애벌레 자신도 성충으로 변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렇게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위를 본능이라고 한다.

 

나나니벌은 땅속에 집을 짓고 여치를 잡아서 그 위에다가 알을 낳아 놓고는 입구를 주위의 흙을 침으로 개서 봉하는데 파브르는 벌이 여치를 잡아서 구멍을 파고 알을 낳아 놓은 것을 벌이 구멍을 막기 전에 꺼내 버린다. 그 동안 벌은 자기 집 속을 여러 차례 들락날락해서 알과 먹이가 없어진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을 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입구를 막아 버리고 휑하니 자기 갈 길을 가버린다.

 

몇 년 전에 남아시아의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동물은 고양이 한 마리가 죽었을 뿐이라고 한다. 천재지변의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하여 대피할 수 있는 선천적인 신비한 능력은 타고났지만 지능이 없어 한 번 입력된 프로그램 외에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고 닫힌 체계에 갇혀 있어서 본능적 생존술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렇게 바로 바보가 되어 버린다.

 

동물이 본능에 의지하여 생존의 영위하는데 반하여 본능의 기능이 미비한 인간에게 자연은 지능을 대신 주었다고 한다. 인간의 행복은 지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본성에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이 지능의 힘으로 과학을 일으키고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도 여기에 의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부터 불완전하다고 하듯이 온갖 지능을 동원하여 미래를 예측해 보아도  예지력이 모자라는 인간에게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장미빛 행복이라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에 의탁하여 심신을 정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신이라고 터부하는 점에게 의지하기도 하면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해 보기도 한다.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세계의 곳곳을 누빌 수 있는 인터넷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세상에서 사주가 얼마만큼 위력을 발휘할까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넷에는 사주보는 카페가 부지기수로 많다.

 

꽤 인기 있는 역술 책에서 보니까 노력 35퍼센트, 환경 15퍼센트, 노력이 35퍼센트 그리고 관상이 15퍼센트라고 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하나를 결정체를 이룩하는 것처럼 수상이 좋다고 해도 관상만 못하고 관상이 좋다고 해도 사주만 못하고 사주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노력만 못하다고 한다.

 

손바닥 하나에 살아온 과거와 미래를 모두 걸고 본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날 화자는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 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철학자에게 손금을 본 모양이다. 돋보기 내려 꼈다는 것을 봐서는 나이가 지긋하신 길거리표? 철학자 같기도 한데 든 화투 패를 들키지 않으려고 잦히는 화자에게 자서전도 예언서도 눈 뜬 봉사와 다름없다. 고스톱을 잘 치는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안다고 하는데 화자는 남의 패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직 '누설되지 않은 천기 한 줄' 을 훔쳐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화자가 손금을 밤에 보았을까. 아님 보름달처럼 환하지 못해서일까. 시의 제목이 「손금 보는 밤」인데 제목을 밤이라고 한정시켜놓아서 함의를 가두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로 보기도 하는 손금을 소나무가지에 실루엣처럼 걸려있는 보름달을 걷듯 자박자박 풀어놓아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여 괜히 나도 한 번 슬그머니 손금을 들여다 본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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