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홍해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7. 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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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홍해리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비타민 詩」시집 2008. 10

 

 


넓고 큰 바다동네<홍해리洪海里>가 어디 있나?
홍해리洪海里는 봉숭아꽃이 만발하는 시詩의 나라 우이골 찔레꽃 속에 있다고 합니다.

 

우이골은 서울 강북구 삼각산자락에 있는 마을입니다. 우이동(소귀봉)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동리 뒤에 있는 삼각산 봉우리 중에 백운봉과 인수봉이 우이동에서 바라보면 소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귀봉 즉 우이봉 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전해집니다.

 

이 우이동을 깃점으로 하여 도선사 주차장이 있는 미소불광장을 경유하면 서울의 진산이라고 하는 삼각산의 최고봉인 백운봉을 제일 빠른 시간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삼각산의 명칭은 백운봉(836.5m), 인수봉(810.5m), 만경봉(799.5m), 이 세 암봉(岩峯)이 멀리서 보면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191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이마니시 류가 한수(漢水)가 총독부에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면서부터인데 삼각산과 북한산으로 혼용되다가 1983년 정부가‘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북한산으로 고착화되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이골은 삼각산 아래에 있고 도봉산 포대능선으로 이어지는 삼각산(북한산)우이능선에는 소귀를 닮았다는 바위 우이암이 실제로 있습니다. 우이동(牛耳洞)은 소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동네이지만 넓은 바다(洪海里)가 있는 마을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우이골에는 시의 자화상인 홍해리洪海里 시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자화상의 시는 참 많습니다. 윤동주, 서정주, 노천명, 유안진, 최승자, 최금녀 등의 시인들이 자화상의 시를 썼고 시인이라면 '자화상' 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시를 거의 다 썼을 것이고 앞으로 시인이 되는 사람들도 모두 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의 소재로서 매력적이라기보다 시인이라는 다소 숙명적인 운명에 자조적인 넋두리로 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는 자화상이라는 제목 대신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로 썼지만 홍해리 시인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시의 결구에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짐짓 묻고 있지만 홍해리(洪海里)가 있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삼각산 아래 시詩의 나라 복사꽃 동네 우이골이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인터넷 가상공간에는 부지기수의 시의 마을이 있고 전국에는 많은 시 숲의 마을이 있습니다. 전국에 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시의 숲에서 시를 짓고 낭송하며 시의 마을을 이루고 살 듯이 우이골에도 <우리시> 라는 시 숲의 마을이 있습니다.

 

봄이면 시화제(詩花祭)를 지내고 가을이면 단풍제로 삼각산 시제를 지내며 찾아가 뵙지 않으면 산을 내려오지 않는 선승처럼, 그의 시집(비타민 詩)에 들어있는 '은자의 꿈' 나오는 고산지대의 주목처럼 홍해리 시인은 살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인뿐 아니라 아래 '우이동 살리' 시를 합동으로 지은 시인들이 지금도 살고 계시거나 오래도록 살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우이동 살리
가장 먼저 눈꽃 피어 소슬한 동네
가장 늦게 꽃이 벌어 향그런 마을
백운 인수 만경 비봉 젖무덤 아래
포근한 계곡 양지바른 우이동 살리.

 

洗耳泉 물소리 베개 맡에 두고
三角山 걸린 달 구름도 보며
도토리 무나물에 타는 불소주
童子놈 귓볼에 시도 갈기며
우이동 골짝 솔밭에 살리.

 

숲속을 거니는 林步 형도 숲이고
바윗돌에 앉아 뻐꾸기 소릴 듣는 희문 형도 뻐꾸기고
소나무 밑에 난초를 심는 海里 형도 난초다
나(生珍) 한세상 그들과 함께 사는 기쁨
저승에 가서도 하루 한 번씩 북한산에 오리라.

 

이처럼 죽어서도 떠나고 싶지 않는 곳
사람이 사는 동안 사람답게 살 만한 곳
저 혼탁하고 어지러운 풍진세파에서
우리 목숨 지켜줄 노아의 방주 같은 곳
우린 우리식으로 우리답게 우이동 살리.

 


 「牛耳洞 살리」 전문 <홍해리 임보 이생진 채희문>

 


아래의 글은 임보 시인이 고불 이생진 시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고불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전화나 이메일을 의지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글월 드리게 된 것이 조금은 부자연스런 것도 같습니다. 70년대부터 우리는 우이동 골짝에 자리를 잡고 살아 왔지요. 선생님께서는 몇 차례 거처를 옮기시긴 했지만 우이동 인근을 크게 벗어나진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을 자주 뵙기 시작한 것은 86부터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지를 만들 무렵부터지요. 이웃에 살고 있는 홍해리, 채희문 시인들과 사흘이 멀다고 어울려 술자리를 벌이곤 했는데, 선생님께선 약주를 즐기지 않으셨지만 술꾼들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늘 함께 하셨습니다. 내 생애에서의 가장 즐겁고 유익한 만남은 우이동 시인들과의 인연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이동 시인들> 네 사람은 1987년에서 1999년에 이르도록 사화집 25권을 엮어낸 다음, 보다 큰 모임인 <우이시회>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비록 초라하기는 했지만 매달 『牛耳詩』를 엮어냈었지요. 그러다가 2007년에 이르러 사단법인화하면서 <우리시진흥회>로 명칭을 바꾸고 월간『우리시』를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고불 선생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오늘 새삼스럽게 거론한 것은 변모해 가는 우이동 시인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우리의 초심이 혹 변해 가지나 않나 하고 염려하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원래 <우이동 시인들>이란 우이동 골짝에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지낸, 세상과의 교류에 능하지 못한 숙맥들이 동병상련의 정으로 만난 모임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이제 법인을 만들어 일을 벌이고 있으니 선생님께서는 아마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아직 우리시회의 회원들 가운데는 세속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체를 이용해 문단 활동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든지, 아류를 만들어 군림해 보겠다든지 하는 야욕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전국적으로 시의 숲이 있는 마을이 얼마쯤 될까 궁금합니다. 서울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그리고 각 시, 군, 면 단위 지역의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시 숲의 마을은 무수히 많을 줄로 압니다. 그들은 서로 편한 그곳에서 맑은 이슬을 먹고사는 매미처럼 세속의 영화와는 상관없이 구름을 불러 노래하고 바람을 불러 신명나게 춤을 춥니다.

 

시집은 팔리지 않는데 시를 쓰려는 사람은 자꾸 늘어나서 시인이 2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시의 질적인 저하가 있다고는 하나 시인이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긍정적이지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시집을 한 권이라도 사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시집을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이른바 잘 나간다는 몇 몇 유명시인들을 빼고는 출판사에서는 시집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지 동인지 형태로 시집 출판을 하고 시인들끼리 돌려본다고 해도 시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고 시가 있어 정서적으로 풍요롭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 한 편을 남기고 가는 시인들은 모두 모두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가 세상에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한 편, 한 편 모두가 자신들의 분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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