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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법 강의 20 - 시와 은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8. 1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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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강의 20


시와 은유



시는 이념적 도구로써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사고활동의 표상이다. 프라이의 말처럼 ‘화해의 형식’이라는데 그 진의가 놓인다. 시를 공부하는 우리는 그 점을 새삼스럽지만 단호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시는 시 자체일 뿐 다른 그 무엇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스며있는 의미들은 무엇이겠는가? H. 오든에 의하면 ‘예술은 인생이 아니며 또한 사회의 산파역도 될 수 없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시를 시의 중심 구조인 이미지, 상징, 은유, 신화 등의 체계적인 분석을 통하여 그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웰렉은 ‘관심의 동일한 영역’이란 문학에서 두 가지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했다. 첫째로 시를 감각적 특수성 혹은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연속체로 보는 것이다. 이 점이 시를 회화에 연결시키고 철학과 과학에서 분리시키는 요인이다.

둘째로 시를 비유법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이 점이 시를 간접적 담화의 세계라고 주장케하며 또한 은유와 환유를 통해 말해지는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것을 휠라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기호이면서 대상이며, 비서술적 유형으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때 언어의 가치는 도구성에 있지 않고 거대한 심미성, 내재성에 있게 된다. 시를 시 자체로 살핀다는 것은 결국 시를 소재주의 혹은 주제주의적 측면에서 벗어나 하나의 객체로 본다는 말이며 그것을 우리는 ‘상호주관성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상호 주관성의 세계란 존재론적 신비의 베일을 쓰고있는 리얼리티의 세계를 뜻한다. 용어 그대로 이 세상의 어떤 객체로 오직 독립적으로 객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투사에 의해서 비로소 객체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체도 역시 독립적으로 주체일 수 없다. 그것은 객체의 투사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최초로 ‘전이의 개념’으로 파악한 이래 의미의 많은 굴절을 나타내면서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수용되는 말이 되었다.

은유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하나의 관념, 하나의 이미지, 혹은 그 이상의 관념이나 이미지, 혹은 상징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선명성, 복잡성, 광활성, 함축성으로 고양되는 응축적인 언어관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선 투고된 독자의 시작품 하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장독대 옆에 봉숭아 곱기도 해라

햇빛 쏟아지는 여름 날

너무 뜨거워 너의 몸 전부가 힘이 빠졌네

빨간 하얀 분홍꽃 대롱대롱 매달려

누군가 잡아 주려나 얼굴 내미네

너의 몸 꽃잎을 손톱에 올려놓고

곱게곱게 물들기를 기도드리네

너의 몸 전부는 물감이었나

빠알갛게 물들은

내 손톱이 곱기만 하여라


                                 독자의 시 <봉숭아> 전문


위 시는 우선 쉽게 읽혀진다. 쉽게 읽혀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우선 시적인 기교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박하고, 사용된 언어도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의미 전달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그저 평이할 뿐 특별한 감흥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역동적인 표현도 없고 드러내고자하는 의미도 단순하다. 결국 상식적인 내용의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읽으면 느낄 수 있는 표현의 오묘함이나 그런 재미도 주지 않는다. 시의 의미는 ‘장독대 옆에 힘 없이 피어있는 봉숭화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였는데 물 든 손톱이 빨갛게 곱기만 하다’이다.

이 평범한 시를 시적 기교를 살려 다른 각도로 표현해 본다면 어떨까?


뜨거운 장독을 동무 삼아

긴 여름날을 지나 온

봉숭아 꽃잎이 곱기만 하다

빨간 손수건, 하얀 머풀러

바람에 휘날리며

누군가에게 고백할 것만 같은데

기다려도 오지 않네

나는 네 손수건을 왼 손톱에 얹고

머풀러는 오른 손톱에 얹었네

네 기다림이 빨갛게 물들어

내게 고백하고 있네


인유를 사용하여 고쳐보았다. 어떤 맛이 날까?

은유는 시의 구조적 통찰에서 가장 무서운 인자임을 알아야 한다. 가령 여기에 <나무는 키가 크다>란 표현이 있다고 하자. 매우 사실적인 모습으로 나무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가 키가 크다는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다. 그리고 나무의 키가 어느 정도 크다는 것인지도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표현을 다시 <나무는 하늘을 찌를 것 같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 다 같이 나무가 키가 크다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뒤의 것은 하늘의 높이와 비교하여 나무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확정적인 모습이 아니라서 그것을 읽는 사람은 나무의 크기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을 <나무는 하늘을 찔렀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나무라는 확신을 주게 된다. 나무와 하늘이 동격 <나무 = 하늘> 이라는 등식은 그만큼 나무의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무는 키가 크다>는 표현은 그저 막연한 사실의 열거에 해당하는 산문적인 표현이고 그 뒤 두 가지 형태의 표현은 형상화함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좀 더 진실에 가까운 의미를 상상하게끔 하는 시적 표현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유는 시의 가장 큰 핵심기법을 이루고 있다. 비유법 중에서도 특히 은유는 시적 표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시가 시일 수 있는 특징은 이미지, 상징과 더불어 은유를 들 수 있고 이 중에서 은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를 역동적이고 탄력성 있게 만드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별을 따라 걸어 갔다

우물 속에서 피어나는 그리움

달 밝은 밤이면 사라지고

어둠이 깊을 수록 더 사무쳤다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별들이

지붕 위에서 반짝였다

마을은 푸른 꿈을 꾸는 거인

                            독자 시 <그리움> 전문


그리움이 별로 표현되고, 별은 다시 우물물에 연계되면서 복합적인 은유를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 마을이 푸른 거인에 비유되면서 그리움을 안고 있는 모습을 극대화시킨다. 비유는 상상력의 공간을 구축하면서 공감대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곧 비유란 <관례적 언어사용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특수한 의미나 효과를 위하여 언어가 독특한 양식으로 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적 언어사용은 시에서는 비유라고 말할 수 없다. 흔히 언어를 습관적 기호라고 할 때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비유 예를 들면 ‘날씨가 지랄이다’라든가 ‘하늘이 노랗다’라든가 이런 표현들은 일상적 표현이기에 비유라 붙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바보같은 사내’나 ‘여우같은 마누라’든가 ‘토끼같은 자식들’등과 같은 직유나 ‘그 사내는 전봇대’라든가 ‘그녀는 장미꽃이다’라든가 ‘그 친구는 마른 멸치야’라고 하는 은유는 어떤 특수한 의미나 효과에 의해 씌여지고 있다.

에이브람즈는 비유를 사상적 비유와 수사적 비유로 나눈다. 전자는 전이 혹은 역전에 의해 한 의미를 나타내고, 후자는 말의 수사적 효과를 위해 쓰일 때를 지칭한다.


사상적 비유는 직유, 은유, 환유, 제유를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은유는 어떤 개별적 명에 의해 정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은유는 휠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상징의 세계를 거쳐 신화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가운데 하나인 리얼리티가 새롭게 인식된 세계이다. 그것은 결국 은유가 신화적 사고의 이해를 통해 성취되는 한 커다란 비밀이면서 생기있는 실체라고 불리워질 수밖에 없다. 신화적 개념으로 부각되는 시의 포괄적 의미를 일단 은유적 측면과 연결시켜 본다는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