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팔다/유안진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숫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통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살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 더욱 몰랐지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손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 넘어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
-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 2008)
2010-09-15 / 15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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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年代/이종식
한 사내가 내 방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
이 아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 그 사내.
신문을 보며 나의 아내를 불러 커피를 시키고, 아내는
상냥한 대답으로 시중을 든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아내나
그 사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방구석 피아노 뒤에 숨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고 있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와 그 사내에게 아빠라고 부르
는 것이, 나는 지금 이 방에 있으되 나의 不在에 대하여 고
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사내는 아내의 어깨
에 손을 걸치고 TV를 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아내가 깎
아 놓은 사과를 깨물며 TV를 곁눈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
이 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 사내는 아내와 깊은 섹
스를 한다.
다시 나의 방에서 나의 不在를 알리는 쾌종시계가 바쁘
게 타종을 한다. 꽈아앙, 꽝꽝. 이제 나는 내 방의 한 구석
에 나를 버려둔 채, 중년의 슬픈 연대를 쓰기 시작한다.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오련만 뭐, 이렇게 시작하는.
-『반경환 명시 감상』(종려나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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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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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이승훈
이승훈 씨는 바바리를 걸치고 흐린 봄날
서초동 진홍아파트에 사는 시인 이승훈 씨를
찾아간다 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벨을 누른다
이승훈 씨가 문을 열어준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아니 어쩐 일이오? 이승훈 씨가
놀라 묻는다 지나가던 길에 들렸지요 그래요?
전화라도 하시지 않고 아무튼 들어오시오
이승훈 씨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이승훈 씨를
안내한다 이승훈 씨는 그의 방에서 시를 쓰던
중이었다 이승훈 씨가 말한다 당신이 쓰던 시나
봅시다 이승훈 씨는 원고지 뒷장에 샤프 펜슬로
흐리게 갈겨 쓴 시를 보여준다 갈매기, 모래,
벽돌이라고 씌어 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오?
이승훈 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승훈 씨에게
묻는다 갈매기는 강박관념이고 모래는 환상이고
벽돌은 꿈이지요 뭐요?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어요 갈매기는 모래고 모래는
벽돌이고 벽돌이 갈매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바다는 갈매기가 아닙니다 그건 모래가
벽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벽돌은 바다가
아니니까요 바바리를 걸친 이승훈 씨와 작업복을
입은 이승훈 씨가 계속 싸운다 마침내 화가 난
이승훈 씨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좋아요 종아! 문을 쾅 닫고 사라진다
(『밝은 방』.고려원. 1995)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2010-09-30 / 22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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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타중
임영조
한밤중 술 마시고 귀가해보니
나는 집에 없었다
웬 낯선 사내 하나가
바람맞는 갈대처럼 목이 꼬인 채
어둠 속에 갇혀서 허둥대고 있을 뿐
집주인 나는 없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버릇없이 해롱대는 너는 누구냐
내 앞에서 썩 꺼져!
덜미잡고 밀어내면 어느새
한 개비 담뱃불로 사위는 사내
갈수록 숨 가쁘고 손이 시린데
또 무슨 요행수가 있다고
겉도는 세상일에 나이 잡히고
이리저리 끼웃대는 너는 누구냐
꿰매도 드러나는 남루를 기우며
날마다 홀로 시든 아내는
이제 더는 못 참겠다며
단잠과 눈이 맞아 가출해버린 밤
아이들은 꿈속의 미아가 되어
행방이 묘연한 나를 찾아 헤매도
나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한국의 인명사전』에도
친구의 결혼식 방명록에도
거리의 지명수배 벽보에도
내 이름은 출타중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3시집)』(천년의 시작, 2008)
2011-11-03 /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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