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 지점의 세탁소/이길상
십 년 전에도 그들의 집은 세탁소였다
세탁소는 지루한 그림 속에 있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들
무기력한 일상이 옷 밑단 속에 햇살로 꿰매졌다
퇴근 후에도 뭔가를 찾는 사람들
그의 옆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신발장 속의 때늦은 포부가 하루하루 지친 그의 그림에 자주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폐쇄된 회로 같았다
마음이 분주히 움직였으므로
정작 그리고 싶었던 게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 속에 불어터진 시간만 쟁여졌다
너덜거리는 시선으로 달빛이 스몄다
빈 주머니에서 담배가 만져졌고
다림질만 해도 삶의 속도는 항상 제자리였다
찾아가질 않는 옷들이 있어 겨울이 왔다
아내는 입지 않을 옷들을 마구 사들였다
그녀는 가벼운 색 옷만으로도 환멸 덩어리가 되었다
자신을 이해한 순간 그와 아내는 벼랑의 끝
쇼핑 후 미친 듯한 과속으로 그녀는 죽었다
거리의 때절은 죄들, 세탁기에서 풀어질 때
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그들이 꿈꾸는 세탁소는 다시 지루한 그림 속이리라
바람 없이도 시간을 허비하며 흔들이는 불꽃
램프 안 휘청이는 불꽃은 브레이크가 없다
-『문학청춘』(2010년 가을호)
2010-09-13 / 오전 08시 13분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 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의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 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 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 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 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그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워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의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늘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 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월간『현대시』(2010, 7월호)
2010-09-18 / 15시 13분
구름 세탁소/유금옥
대관령 산기슭, 울타리 없는 집 마당에 새하얀 빨래를 널어놓고 삽니다 뻐꾸기와 종달새가 우리 집을 물고 날아다니는 앞산에 구름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오늘 같은 날엔 산도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는 종이에, 종달새가 재빨리 적습니다 산더미 같은 인생은 이곳으로 가져오세요 어떤 찌든 때도 하얗게 세탁해 드립니다 -구름 세탁소-
산 아래 뉴스를 물어 나르는 TV도, 지지직거리는 지상의 방송국보다 은하수방송국이 더 가까운 곳 이 마을은 새와 꽃이 사람들보다 똑똑합니다 종달새 지저귀면 보리 베고 뻐꾸기 울면 깨 심으며 삽니다 나는, 구름 세탁소 종업원
뻐꾸기와 종달새와 빨래를 하며 삽니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나는 헛간처럼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사랑도 그대도 새하얗게 지워진 구름은 저 혼자 돌아다니며 잘 마릅니다
-월간『현대시』(2010, 10월호)
후투티 세탁소/강정애
숲의 경사면에서 바람이 팽팽해진다
붉은색 단추 같은 꽃들이 떨어지는 숲엔,
안감의 흰꽃들이 핀다.
먼 곳의 주름이 몰려오는 한낮
흑백이 천조각이 펄럭거린다.
안팎이 다른 구름을 펼쳐놓고 본을 뜨는 가위질 소리
덜 마른 구름의 조도가 낮아질 때
몇 방울 물소리가 떨어진다.
맑은 날엔 산의 꼭대기에 붉은 천이 펼쳐지기도 한다.
후투티새의 울음소리가
세? 탁탁 목청을 높이며 골목을 도는 목소리 같다.
후두두 후두두 숲을 밝고 달려오는 소나기
바람이 빠른 풍속으로 숲을 돌리면
원통 속 빨랫감처럼 숲은 물길이다.
일제히 날개를 펴는 나무들, 연초록 깃털에 매달린 수만 개의 鍾을 치고 숲을 빠져나가는 바람
잎사귀들은 무거운 시간을 견딘다.
상한 숲의 한 귀퉁이가 수선대 위에 올려진다.
붉거나 흰 단추들이 떨어진 자리마다
오려내고 봉합하는 메마른 바느질 소리.
녹색 겉감을 뒤집어 안과 밖을 바꿔 꿰맨
어둠의 거푸집을 뒤집어쓰고 나온 붉은 물결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깔깔한 조각천 몇 장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후투티 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1)
2011-02-15 / 화요일, 오전 08시 26분
하느님의 세탁소/이은심
어떤 아름다운 저녁에 나는 세탁소에 간다
세상의 더러움을 보다 못해 하느님이 차려놓은 세탁소에 하루 만에 더러워진 실크 블라우스
그 부패의 물증을 맡기러 간다
늘 공사 중인 골목 입구에서 몸이 스멀거리는 것은 파헤쳐진 양심 때문이다
선들바람에 슬쩍 곁을 주는 실루엣이나 속없는 통정에 살을 대고 하르르 피어나는 장미꽃 무늬나 곰곰 들여다보면 그게 다 감쪽같이 묻어버린 상처인데 새삼스레 높다한 횃대에서 건들거리며 속을 까발려 보이는 얼룩들
얼마 전 몸을 푼 주인 여자는 아기를 업고 골목을 서성인다
갓난아기의 얼굴엔 접힌 자국 하나 없고 주름이 두세 개 잘못 잡힌 내 바지는 시시각각 따로 노는 마음 탓이라는 걸 알겠다
여자는 고분고분 피어 있는 영산홍에 물을 주고
나는 철따라 꽃피운 죄악 한 벌을 맡긴다
작은 골목에 감추어 두어도
하느님의 세탁소는 점점 번성중이고
어떤 이가 달을 표백제에 담가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는 저녁
여벌이 없는 사랑은 맡기지도 못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꿈 없는 잠을 잔다
-시집『오얏나무 아버지』(한국문연, 2004)
2011-02-15 / 화요일, 오전 08시 46분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한혜영
공무원을 하던 동생이 그 짓을 때려치우고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이주,
세탁소 주인이 되어버린 뒤 일년 내내 태평양 주름살과 씨름을 하고 있다
눌러도 눌러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
태평양 그 시퍼런 치마폭 다려야할 물굽이는 첩첩이 밀려오고, 질 나쁜
가루비누처럼 시원찮은 영어는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니 맘 내 다 안다,
안다 하면서도 치마폭 솔기 하나 잡아주지 못하는 이 누나도 사실은 엉망
진창으로 구겨진 바다를 입은 채 십년 내내 미친것처럼 출렁거렸다 어차피
이쪽과 저쪽 끝에서 팽팽하게 잡아주지 못할 바에야, 동생아 바다는 구겨
진 채로 펄럭일 수밖에 없으니
펄럭이게 내버려두거라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다리미 바닥에 쩍쩍 들
러붙는 바다가 있어 오히려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 아니겠느냐
이런 소리를 내며 물결이 밀려온다는 거, 머지않아 듣게 될 것이니
고스란히 듣게 될 터이니
-시집『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천년의시작, 2002)
2011-02-15 / 화요일, 오전 09시 03분
올림푸스 세탁소/최치언
이 마을 가장 높은 곳엔 세탁소가 있다.
바지단을 줄인 듯 껑충한 머리의 주인장은
지붕 위에서 함석을 키우고 있다.
코끼리 궁둥이만한 느린 구름쟁이
세탁소 지붕 위엔 도달할 쯤
주인장은 망치와 못을 들어 함석을 박는다.
망치가 한번씩 내려쳐질 때마다
미싱 밟는 아내의 머리 위로 실밥이 날린다.
누룽지 같은 곰보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수줍게 실밥을 털어낸다.
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엔 올림푸스 세탁소가 있다.
종일 천둥처럼 망치를 내려치는 사내가 있고
때묻은 옷더미 속에서 바늘대로 꼿꼿이 말라가는
그의 여자가 있다.
오늘도 비는 내리지 않고
저녁 안개가 흰 빨래처럼 펄럭거릴 쯤
주인장은 지붕 위에서 내려온다.
풀어진 세제 속에 붉게 달아오른 두 손을 담그고
여자는 하루종일 바람을 맞은
그의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한다.
-시집『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2011-02-15 / 화요일, 오전 09시 24분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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