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신춘문예♠문학상·신인상♠등단작

항아리/최재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 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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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항아리/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심사평]

 

 양의 풍성함과는 달리 질이 그것에 미치질 못해 실망스런 심사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한동안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견지했던 점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다. 응모하신 분들이 스스로의 문학적 진지성과 치열성을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경험의 지루한 서술이나 단순한 풍경의 묘사에 빠져 의미있는 언어의 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떤 응모작들은 맥락 없는 언어의 남용, 단절된 이미지들의 혼란, 장식적 비유의 화사함에 갇혀 스스로 시적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어떤 응모작들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인지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지질 않아 유의미한 소통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주대생 씨의 경우 언어의 재치가, 고옥희 씨의 경우 비유의 참신성이 살만했고, 강란숙 씨는 일상적 체험에 대한 성찰이, 오영희 씨는 서사의 무게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주제의식의 밀도라든가, 시적 구조의 짜임새 등이 튼실하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최재영 씨는 시적 자질이 그 중 나아보였다. 언어의 운용이 자연스럽고, 시를 얽어매는 솜씨가 꽤나 세련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것과 너무 빤한 얘기를 드러내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의 질박함이 미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의 수일성의 결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신인임에랴.
 정직하게 말하면, 나로서는 어느 것도 당선작으로 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문학도들의 기대와 희망을 헛되게 저버릴 수가 없다는 핑계로 나는 나 자신과 타협을 했다. 아쉬운 대로 최재영 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내보내는 까닭이다. 최재영 씨는 시의 길에 더욱 정진하여 ‘겸손한 덕담’만이 아니라 정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항아리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뽑히지 못한 많은 분들도 실망하질 말고 자신의 시업을 꿋꿋이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김승립 시인>

 


[당선소감]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게 있어 詩를 쓴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정의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때그때 당면한 문제들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한 편 한 편 완성하기 위해 보낸 많은 불면의 밤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그래서 나 스스로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싶다.
 詩를 쓰는 동안은 행복하고 또한 고통스럽다.
 문장을 지우고 고쳐가면서 더 나은 글이 완성될 때의 그 만족스러운 순간들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겸허한 시인이 되고 싶다.
 지난 일년을 어떻게 보냈나 싶게 빠르게 흘러간 시간들이다.
 바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시간들 속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고맙다.
 詩가 뭔지도 모르면서 다만 엄마가 지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좋아하는 아이들과 우리 가족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주는 남편, 무엇보다도 고맙고 감사하다.
 詩가 임재할 진정성에 대해 가르쳐 주신 박경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만나면 즐겁고 편안한 시원 동인 선배님들, 제가 한턱 단단히 쏘겠습니다.
 詩의 길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신문사와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쓸 것을 다짐하며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 1965년 경기 안성 출생
· 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 2학년 재학
· 경기도 평택문인협회 사무국장 시원 동인
· 2004년 제 5회 전국 가사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