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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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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