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디지털 시대의 으뜸문자 한글/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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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글날을 보내면서 그동안 바쁜 일상에 잊고 있던 우리말의 의미와 소중함,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말은 생명체 같아서 계속 변화하며 진화하기 마련이다. 세계를 상대로 교류하고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려면 언어가 섞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섞임이 서로의 언어와 문화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상승효과를 낼 수 있도록 신중해야 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듯 주객이 전도된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특히 영어 과잉과 언어 오염이 도를 넘은 듯해서다.
야구팀의 이름은 연고지나 기업과도 무관한 타이거스, 라이언스, 베어스, 자이언츠 등 미국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1982년 처음 프로야구가 출발했을 때 있었던 MBC 청룡이 그나마 유일한 우리말 팀이었는데, 아쉽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음식점은 가든, 여관은 파크, 예식장은 홀이나 플라자로 자리잡아 가는 듯하다. DJ, YS, MB 등 정치인들의 애칭도 복합된 국민의 정서를 숨기기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즐겨 쓴다. 대기업들은 앞다퉈 LG, SK, KB, KT 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외국어 사용이 지식인의 척도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영어 단어를 섞지 않고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글로벌 스탠더드, 거버넌스(지배구조), MOU(양해각서), 에코 프렌즈, 그랜드 바겐, 원샷 딜 등등. 개인의 우월감 때문일까, 민족의 열등감 때문일까. 퍼스트 모기지론, 파이낸싱 페어 등 영어표기도 없이 한국식 발음만 그대로 옮겨놓아, 한국인을 위한 것인지 외국인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형태도 자주 눈에 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면 말고 식이다. 공공기관이나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국적불명의 억지 영어를 만들어 쓰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K-water가 한국수자원공사인 줄 누가 알겠는가. NH가 농협이란 것도 누구를 위한 영어이고 약자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우리 얼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외래어를 남용하거나 외국어로만 새 말을 만들어 써서 우리말과 글이 점점 퇴화되면, 얼빠진 민족이 되어 다른 나라의 문화속국 신세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다행히 우리는 고유의 말이 있을 뿐 아니라 한글이란 출중한 문자가 있어 자랑스럽고 행복한 문화민족이다. 우리말은 세계지적재산권기구가 정한 10대 국제공용어에도 속한다고 하니 우리말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또 세계적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단순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나고 독창적·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극찬한다. 더구나 한글은 글자를 쉽게 조합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입력할 때 속도가 7배나 빠르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에 정보기술(IT) 강국이 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정보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세기 전처럼 보세가공품이나 수출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인류문명에 기여할 독창적 고유상품을 만들어 세계무대에 내놓지 않고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한글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흥미롭게도 인도네시아의 부톤섬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빌려 자신들의 말을 표현하고자 올해부터 한글을 정식 문자로 채택해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제사회적 부가가치가 제일 높은 문화상품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자 없는 그들에게 희망은 덤이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아래, 인류 공동번영을 위해 후손들에게 가장 값진 자산을 물려주신 데 대한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한글날이 이름만 국경일이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축제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신문 2009-10-17 26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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