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젊은작가상 수상작>
궁서체
차주일
목련꽃봉오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부풀고 있다. 붓이 한 획을 내려 긋기 전 점 하나 힘주어 누르는 저 잠깐을 겨울이라 부르겠다. 우듬지마다 찍어놓은 꽃봉오리를 한 무리의 말발굽소리가 내처 달려오는 중이라 말하겠다. 오직 북쪽만 향하던 외골수가 잎보다 먼저 피운 꽃 그 낙화를 겨울이 내려놓는 잔상이라고 말하겠다. 꽃 진 자리에서 햇잎이 길어난다, 넓어지는 잎 따라 바람의 획이 굵어진다, 바람의 그림자가 먹물 스미듯 땅 위에 퍼진다, 이 가필을 봄이라 부르겠다. 말<馬>의 땀내 짙은 향기를 봄의 속도라 말하겠다. 당신 몸에서도 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어머니 봄철 내내 궁서체 ‘ㅣ’ 내리긋기 습자 중이다. 한 획 채 내리긋지 못하고 봄 한 철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목련꽃봉오리 같은 먹점을 화선지에 가득 채워놓았다. 보다 못한 내가 참견하는 것을 이른 봄이라 말하겠다. 어머니, 당신의 굽은 손가락 끝마디 하나 만들고 손가락 두어 마디 쭉 내리그으세요. 내 뒷머리 쓰다듬다가 냅다 내 손을 쥔 속도로 말이에요. 먹점 위에 다시 먹점을 찍어보던 어머니 굽은 채 굳은 열 손가락 끝마디를 하나하나 만져본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되었구먼, 어머니 혼잣말이 내 성대에 조율한 침묵을 나의 겨울이라 부르겠다. 뒷목덜미께 고이는 이 온기를 봄맞이라 말해야만 하는가. 어미 몸에서 내게로 내처 달려오는 무채색의 온기 내 몸에서 펴나므로 내가 모음이 되리라. 그때 나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쥐고 궁서체 ‘ㅣ’처럼 고개 숙여 한 손의 서사를 들려주리라.
차주일 시인
1961년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생. 2003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냄새의 소유권』(천년의시작, 2010)이 있음. 덧글 5개 엮인글 쓰기 공감 1개 |
소리의 환유와 모성적 은유의 세계
―손한옥 시집『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서평
박남희
일반적으로 남성의 의식을 권력지향적 은유의 체계로 본다면, 여성의 의식은 탈중심적 환유의 체계로 간주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여성의 삶이 권력이나 지배보다는 주체나 사물의 수평적 관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적 시 쓰기를 주도해왔던 일군의 페미니스트 여성 시인들, 즉 고정희, 최승자, 김승희, 김혜순 등의 시에 두루 보이는 특징이다. 이들 여성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특징은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한 고백이나 진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일상적 삶에 세세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중시하는 관계성의 자장 위에 있는 여성 시들이 인접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환유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여성 특유의 페미니즘적 특성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이 텍스트로 삼고있는 손한옥 시인의 시집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역시 이러한 특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한옥 시인은 시집의 말미에 실려 있는 자기 고백적 성격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삶과 시와 관계가 있는 유년의 일상들을 환유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나를 만들어 갔던 내 어린 초록빛 시간들, 나와 함께 머물렀던 물상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다, 다 보이는
구미 서녘을 휘감던 바람, 허술한 싸리 삽짝, 넘실넘실 남천강 붉은 강물, 겨울에는 더운 샘 여름에는 찬물 샘, 덩겨로 만든 빨래비누, 송기물 절벅거리는 소나무, 칠탄정을 넘어가는 소떼, 아버지 어머니 산소 옆 청솔, 들겅 위에 앉은 갈가지, 상여골 꽃상여, 이따리목 은어떼, 칠탄정 제실, 청도 할배 대밭, 서리 맞은 자국화, 우물 옆 창포, 담장 위의 채송화, 눈부신 살구꽃, 새끼줄 감긴 아버지의 빈소, 솔가지로 익어가는 무쇠솥 밥, 아버지의 정구지밭, 아버지의 전대, 정지문 옆의 몽당 빗자루, 거미줄 감긴 청포도, 감자 긁던 날선 놋숟가락, (중략) 추녀 끝의 호야 등불, 검둥개 짖는 소리, 동무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짤룩, 묏등 위의 보리필기, 살구 받던 보리포구나무, 오가며 절하던 당나무, 종소리 들리는 때죽나무, 대숲 속의 아랑, 밀양여자고등학교 문예부 꺽구두, 탱가리, 쏘가리, 미그지, 모래무지, 노름쟁이, 피라미, 놀래미, 미꾸리 억수로…억수로 흐르는 강물…
아, 나를 키웠던 내 영성의 종자들이여 다, 다 나와라, 내가 부른다 그 푸른 강물 위로 몰려오는 바람을 타고
시집 끝의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이상과 같이 자신의 유년적 삶의 세목을 장황하게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은 이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환유적이며 이야기적인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손한옥의 시에서 ‘소리’ 모티브가 환유적 시 쓰기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시를 관류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박달나무 들고 소리 잡으러 간다
한밤중을 둘러메고 새벽을 뚫고 가는 저 소리
동출이 오빠집 뒤란 소죽솥 마른 짚물 펄펄 끓어 넘치는 소리다
아니다 오뉴월 땡볕 속 굴삭기, 땅 뒤집는 소리다
아니다 소잡는 소리다
아니다 소도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저 남자 코고는 소리
샛별 잡아먹는 소리다
―「소리 잡으러 간다」전문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이 삼천 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신단수는 신령한 박달나무로 박달나무의 원형적 신성성을 보여준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박달나무 들고 소리를 잡으러 간다”는 진술도 이러한 박달나무의 신화적 속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시에서 소리를 잡는 일은 세상사의 잡다한 삶의 국면과 마주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떠도는 소리를 잡아서 시를 쓰는 행위이다. 그런데 인용 시를 보면 “동출이 오빠집 뒤란 소죽솥 마른 짚물/펄펄 끓어 넘치는 소리”, “오뉴월 땡볕 속/굴삭기, 땅 뒤집는 소리”, “소잡는 소리”, “남자 코고는 소리”등 시인이 살아오면서 체험한 일상의 온갖 잡다한 소리들이 환유적으로 병치되어 있다. 이런 소리들은 ‘작가의 말’ 인용문에서 시인이 언급한, 지금까지 시인을 키웠던 ‘영성의 종자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시인은 신령한 박달나무를 흔들며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소리들, 즉 ‘영성의 종자들’과 다시 만나 시를 낳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삶의 여러 국면에서 생겨나는 소리들을 환유적으로 병치해서 보여주는 방법은 “그래, 우리 일어나 놀자//밤거미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끼리/별이 지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는 것끼리//위 속에 삭아 내리는 소리와/낡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더 씹어야 할 것들을 갈고 있는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밤배를 타자고 말하는 「불면」에도 동일하게 드러나 있다. 시인이 이처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청각에 예민한 여성 특유의 속성과도 연관된다. 시인이「불면」의 말미에서 “핏발 선 눈을 씻고/ 밤새도록 돛을 내리지 않은 선창에 올라/차라리/동해 바닷 속 깊이 묻힌 붉은 해를 끌어올리자”고 말하고 있는 것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시를 써서 “동해 바닷 속 깊이 묻힌 붉은 해”를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삶을 환유적으로 조망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의 삶이 다양한 삶의 세목들과 수평적 관계성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목들은 시인에게 있어서 일종의 분신과도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수평적 관계성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시인으로 하여금 수직적 관계성을 깨닫게 해준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 더 이상 수평적 환유의 관계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어머니를 은유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오니 창 옆에 한 손으로 마지막 씻어놓고 간 신발이 있다 삭아서 더 말랑한 흰 고무신 한 켤레, 햇빛 속에서 얇은 양 날개가 팔랑거리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살구가 떨어지는 텃밭을 날던 어머니의 얇은 날개다 한 손으로 얼굴을 씻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고 뒤틀리는 다리를 쓸며 잠든 내 등을 흔들다가 다시 저린 다리로 돌아가던 어머니의 손들이 나팔꽃처럼 일어나 내 발목을 잡는다 뜨거운 날개다
— 어머니 이제 나를 밟고 날아오르세요
절룩거리던 어머니 다리에 깃털이 돋는다 날개가 펄럭인다 푸른 보리밭을 차고 오른다 아 어머니, 붉은 새 한 마리 노을을 물고 하늘의 문을 열고 있다
―「가릉빈가」전문
‘가릉빈가’는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 극락정토의 설산에 살며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은 어머니를 땅에 묻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남겨놓고 간 신발을 보면서 새를 떠올린다. 시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신발은 “감자꽃이 피고 살구가 떨어지는 텃밭을 날던 어머니의 얇은 날개”인 것이다. “어머니, 이제 나를 밟고 날아오르세요”라는 시인의 진술은 시인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누는 작별인사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리가 불편해서 절뚝이시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이 땅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상상 속에서 어머니는 ‘가릉빈가’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른다. 이 시집의 표제 시인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을 보면, 시인의 어머니는 평소 시인에게 직설적인 욕을 많이 하셨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를 시인은 “어머니는 시인이었다/직설적인 시인이었다/백석보다 향토적이고 정지용보다 활유적이었다/ 행위에 가장 적절한 언어를 장치하고 오장육부를 도려내 굵은 소금을 뿌리고 바늘로 찔렀다”고 회상한다. 시인은 완고하기로 소문난 안동 손가 문중에서 처음으로 연애결혼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서정주의 어법을 패러디해서 “나를 키운 구할은 어머니의 욕이었다”고 말한다. “ —사당패같이 돌아다니는 년/ —머리 피도 안 마른 것이 머슴아 만나는 년/ —쌔가 만발이나 빠질 년/—주딩이가 열닷 발이나 나온 년/—조둥이가 염포창날 같은 년/—갈롱부리다 얼어죽을 년/—지 애미 잡아먹을 년/—엄발이 돋을 대로 돋은 년”처럼 마흔에 낳은 늦둥이 딸에게 직설적인 욕을 퍼부어대던 어머니는 급기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니 닮은 딸 하나 낳으라고 축원하고 축원”하셨지만, 시인은 딸 대신 아들만 둘 낳고 아이들이 상처를 입을까봐 아들들에게는 한 번도 직설적이지 못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직설적인 어머니가 오히려 딸에게 역설적으로 완곡한 은유를 가르쳐준 셈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시의 말미에 “어머니는 욕을 주시면서/내가 건너지 않아야 할 강을 보여주셨고/나에게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주셨고/어머니의 우량한 시 종자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머니야말로 손 시인에게 시를 가르쳐준 스승인 셈이다.
벚꽃이 환한 그날 나는 보았는데
구례와 하동
어머니 허리를 감고 있는 치맛자락 한 폭이더라
구례가 모래를 내어주면
하동은 물을 내고
하동이 모래를 내어주면
구례는 물을 내고
굽이굽이 휘돌아치며 흘러도
이편 저편 모래알 한 알도 함부로 쓸어내지 않더라
벚꽃 수백 리, 강기슭마다 꽃잎 골고루 뿌리더라
―「섬진강」전문
시인은 어느 날 문득 구례와 하동을 치맛자락처럼 감싸고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보면서 그 모습에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시인이 섬진강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어머니의 모습은 살아생전 욕을 퍼부으면서 딸을 구박하던 어머니가 아니다. 여기서의 어머니는 “구례가 모래를 내어주면/하동은 물을 내고/하동이 모래를 내어주면/구례는 물을 내고/굽이굽이 휘돌아치며 흘러도/이편 저편 모래알 한 알도 함부로 쓸어내지 않”는 공평하고 따뜻한 모성을 지닌 자연으로서의 어머니이다. 여기서 ‘모래’와 ‘물’은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의 모습을 일차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모래’와 ‘물’로 상징되는 굴곡 있는 인생사를 나타내려는 시인의 의도가 엿보인다. 「섬진강」에서 시인은 생전의 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온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죽음은 결국 시인으로 하여금 어머니와의 화해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
한 방울씩 흘러내린 물로 담벼락에 빙벽이 생겼다
날이 풀리자 얼음이 녹는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툭툭 찼다
서슬 푸르더니 옹골지더니
두꺼운 얼음이 서걱서걱 떨어졌다
차고 들어 갈수록
얼음과 벽 사이 물 한 방울 사이의 고랑이 깊다
얼음이 벽을 단단히 쥐고있다
발톱이 아프다
가죽신 껍질이 벗겨진다
소죽은 귀신 얼음 벽속에 웅크리고 있다
얼음과 벽 사이
진달래가 할 일이다
산수유가 할 일이다
아지랑이가 할 일이다
―「오해」전문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제목을「봄」정도로 해도 될 것을 굳이「오해」로 한 것은 이 시가 단순한 봄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체험적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시인은 겨우내 한 방울씩 흘러내린 물이 빙벽이 되었다가 봄이 되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얼음처럼 차갑던 관계를 생각한다. “서슬 푸르더니 옹골지더니/두꺼운 얼음이 서걱서걱 떨어졌다”는 진술은 서슬 푸르던 어머니와의 관계가 화해의 국면으로 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얼음이 녹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소가죽 신으로 툭툭 찬다. 하지만 발만 아플 뿐 얼음은 금방 녹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시인은 이내 깨닫는다. 얼음을 녹게 하는 것은 진달래나 산수유나 아지랑이가 할 일이라고. 시인은 얼음장 같은 오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풀린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더 이상 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멍에’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시인이 앞으로의 삶에서 짊어지고 가야할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황소의 여윈 등에 수십 마리의 가분다리가 붙어있다 소거머리다 피를 빠는 거머리, 소의 붉은 살점이 조여든다
연달아 쳐올려보는 꼬리 등까지 닿지 않는다 더운 바람만 일고 거머리 붙은 등을 쓰다듬을 뿐
―이젠 쉬어라 연화장에서 내려오신 아버지의 손, 소 등을 긁어내렸다
아주까리 열매 같은 핏덩이 뚝. 뚝. 뚝. 털을 적시며 흐르는 피 소는 꼬리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살 속을 조여들던 그물이 풀리고 피가 멎었다
긴 속눈썹이 고요하게 내려오고 오랜 시간 소는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 소는 강물을 마시고 또 마시고
멍에 벗어 내린 소의 몸을 연각 성문이 떠받치고 있다
―「멍에」전문
이 시는 등에 붙은 가분다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황소가 등을 긁어주는 아버지에 의해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시의 주체가 황소임에도 이 시는 어딘가 억압받아온 전통적인 여인상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읽혀진다. 시의 주체가 황소이든 암소이든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 황소가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황소가 지니고 있는 업보에 해당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가 “멍에 벗어 내린/소의 몸을 연각 성문이 떠받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승의 고통을 이겨내는 길이 오직 불교적 깨달음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성문’이란 석가의 가르침을 듣고 이를 충실히 따르는 불자를 말하는 것이고, ‘연각’은석가의 교화에 의하지 않고 홀로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불교적 깨달음은 세상의 고통을 넘어서는 유일한 출구인 셈이다. 그의 또 다른 시「표충사 종소리」나「향화청」등도 시인의 불교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손한옥의 시에서 불교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인이 아직도 세속적 욕망에 관심이 많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의 시는 시인의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은폐하지 않고 유쾌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1 메리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로 받았다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시인의 시 『팬티』에 손을 베이다 팔랑 바람이 불어 치마가 올라가고 그 사이로 보이던 레이스 팬티 방 한쪽 구석에 그녀가 벗어놓고 간 물방울 무늬 팬티처럼 피, 동글동글 떨어진다 즐거운 팬티 몰래 보지 말라고 날카로운 책은 날을 세웠다
2 메리 크리스마스에 레이스 달린 팬티와 브래지어를 선물로 받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형님, 바람 피울 때 입으세요! 이런 이런, 요망스러운 것이! 귀여운 것이!
3 몇 해가 지난 오늘, 메리 크리스마스를 달고 상표를 달고 팬티와 브래지어가 서랍 한 켠에 누워 있다 아직도 나는 꿈꾼다 관솔이 타오르는 캄캄한 숲 속 산장 채털리부인의 멜러즈를
―「즐거운 팬티」전문
시인은 어느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속에 있는「팬티」라는 시를 읽다가 책장 모서리에 손을 베인다. 시인은 이러한 사건을 “즐거운 팬티 몰래 보지 말라”는 전언으로 받아들인다. 그 후 시인은 막내동서로부터 레이스 달린 팬티와 브래지어를 선물 받으면서 “바람피울 때 입으세요”라는 말에 즐거워한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성적 억압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꿈꾸는 페미니즘적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시인은 아직도“관솔이 타오르는 캄캄한 숲 속 산장/채털리부인의 멜러즈를” 꿈꾸고 싶은 것이다. 라캉은 여성이 육체적으로 극도의 쾌락상태에 이르는 것을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말한다. 주이상스는 즐거움 뿐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쾌락을 말하는데, 혹자는 베르니니의 작품 「성테레사의 법열」의 쾌락(법열)을 주이상스에 비견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聖과 속俗은 서로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손한옥 시인이 여성적 억압과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택하고 있는 불교적 깨달음과 불륜은 서로 상반된 것인 듯 하면서도 서로 상통하는 것이다. 시인이 ‘어머니’로 대표되는 은유적 시편들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이었다면, 그의 환유적 시편들은 여성적 욕망의 미끄러짐을 통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갈등이 없는 시는 죽은 시이다. 그런 점에서 손한옥 시인의 시들은 아직도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꿈틀거리고 있다. 그는 작약꽃 아래에서 몰래 오줌을 누다 배암에게 그곳을 물려 “꽃봉오리 움켜쥐고/ 하늘까지 튀도록”(「불륜」) 끊임없이 시의 불륜을 꿈꾸고 있다.
-----------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시산맥』주간, 『창작 21』편집위원으로 있으며, 고려대, 숭실대에 출강하고 있다.
*<미네르바>2011년 여름호. 덧글 2개 엮인글 쓰기 공감 2개 |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수상작>
앉은뱅이저울
함민복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 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로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물이 좀 갔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슨 페인트 껍질처럼 부러진다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 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놓아버릴 때까지 저울은 저울이다
<시작> 2010. 겨울호
함민복 시인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3개 |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
김두안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꽃이라고 부른다 나는 꽃을 꺾어 해안에 던진다
새들이 부리를 닦고 바위에 사람 이름을 새긴다 눈썹처럼 돌아온 새가 차갑게 우는 것은 아직도 저녁 불빛을 향해 배 위를 달려가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등대라고 부른다 나는 불빛을 꺾어 바위에 던진다
새들이 침묵을 물고 바위 속에 제 그림자를 접어 넣는다 말갛게 씻긴 발을 들이고 신열에 떨며 몸을 웅크린다 새들이 눈을 감고 바라보는 낡은 부리에는 어느 백랍 같은 영혼의 냄새가 묻어 있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안식처라고 부른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기로 한다
어두운 심연에서 떠오른 안개가 거대한 혀로 바위를 삼키고 해안을 점령한다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던 검은 배가 처량한 뱀의 소리를 내며 부두에 와 닿는다 안개 속에서 폐허가 된 마을로 걸어가는 젖은 발소리가 들린다
짙은 안개는 새들의 바위를 다 어쨌을까
안개 속으로 섬이 사라지고 죽은 이름들 밀려오는 밤이면 새들은 꽃을 먹지 않는다
—《현대시》 2011년 2월호
김두안 시인
1965년 전남 신안 출생. 2006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시 「거미집」당선. 시집 『달의 아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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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박남희
날씨가 추워져서 옷을 여러 겹 껴입었다 맨 안의 옷을 가린 옷을 또 가리고 그 옷을 또 가린 옷이 외투라는 이름으로 걸어간다 외투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옷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함께 어디론가 간다 너무 많은 옷을 껴입은 외투는 쉽게 낡는다
그러고 보니 멀리 산도 어디론가 가고있다 그 안에 무수한 옷들이 겹쳐져서 산이 되었다 산은 어디론가 가면서 산맥을 이룬다 우리 집의 명물인 비키니 옷장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장의 외투 한 벌 속에 무수한 옷들이 겹쳐져 있다 추위가 풀리면 외투 속의 옷들은 저마다의 색을 드러낼 것이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도 외투 속에 숨어있던 옷들이 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봄꽃들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겹쳐졌던 옷들의 그림자가 보인다
*<열린시학>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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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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