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김성규 외 3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8. 1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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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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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강정숙
  

 

발굴자들은 그녀가
임산부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유난히 통통한 복부 때문이다
복부를 가르고
몇 겹 표피를 들추자
말라붙은 탯줄과 자궁, 외벽엔
암반 같이 굳어버린 핏물이 보인다


가느다란 손으로 배를 감싸고
긴 머리카락 뒤틀린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는 그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를 낳을래요
머리카락으로 요람을 짜겠어요
사백년쯤 걸릴꺼에요 


물기 없는 여자의 내부가
형광등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 제11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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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殉葬)/최재영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유골은 아직 신원미상이다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한쪽으로 돌아누운 체념뿐이다
슬픔이나 분노는 불경한 것이므로 매장할 수 없다
숱하게 이승을 열고 닫던 시신의 안구는 텅 비어
완전하게 썩은 복종이
퀭하게 뚫린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무덤 속에서 소통되는 건 공포와 침묵뿐이었으므로
두 눈은 오히려 번거로운 장신구였으리라
올가미에 엮여진 미미한 저항들이
서로 깍지 끼운 절망을 호흡하였으리라
얼마나 멀리 왔을까
무덤 속 길을 열자
진공 속에서 지탱되던 맹목적인 관습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수 천 년을 지내는 동안 순종을 세습하였는지
유골들은 가지런하고 편안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행운의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아득한 바닥의 깊이를 가슴에 품는 순간
세상의 낮과 밤이 닫혀지고
귀천의 형식은 이승의 내력과 함께 풍화되었다
남은 건 순장뿐이다 

 


-최재영 시집『 루파나레라』. (천년의 시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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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장/안효희

 


  그 속엔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지, 나의 사랑과 나의 궁핍과 나의 파열도 있지

 
  꼬리를 단 시간이 재깍거리고, 날짜들이 깃발처럼 벽에 걸려 펄럭거리지, 건너편 고층빌딩이 통유리 넓은 창으로 24시간 들여다보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배가 불러지면, 아치형 창을 내고 40층 50층까지 올라갈 수 있지


  밤이 되면 전자 키 달린 출입문 안에서 혼자 밥을 먹지

 
   곁에 누운 남자가 가끔 눈을 뜨고 일어나지, 빠끔빠끔 담배를 피우고, 그러다 다시 죽은 척하지

 
  더불어 사는 무덤 1605호분


  불룩한 배를 만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도 몰래 작은 아이를 낳지 바깥으로 바깥으로 기어나가는,


 
-계간『시와 반시』(2010,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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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소재로 달리 풀어간 시 네 편을 봅니다. 좋은 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  네 편은 각기 좋은 시에 해당하는  장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는 제목이 말해주듯 독산동 지하에 살다가 가난과 생활고로 죽어간 일가족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신문에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시 내용에도 나오지만 정치적 사안이나 재벌들의 동향에 비해 언제부턴가 이 사회가 일가족이 자살을 한다거나 사람이 굶어죽는 사건 같은 것은 큰 화젯거리가 되지도 못하는가 봅니다. 신문 하단에 작은 글씨로 조그맣게 실리는 것을 보면은.


이 시는 다가구 주택인 반지하를 예전 선사시대 주거지인 동굴로 설정을 한 것이 다른 시에 비해 다릅니다. 동굴에서 여자와 아기, 한 사내가 죽었습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인 사내는 가족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넉넉한 사냥감과 맞서다가 큰 부상을 입고 끝내 죽어갔을까요. 밤늦게 나오는 '동행'이라는 티브 프로를 가끔 봅니다만 가장이 맡은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비극으로 종말을 맞는데 그게 어디 가장 한 사람의 잘못만 있겠는지요.  이 사회의 비 새는 구멍난 복지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강정숙의 '미라' 는 끝 부분에서 시의 맛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만 이 시의 빛나는 부분은 5연입니다. 5연 중에서도 1행 '아이를 낳을래요'입니다. 이 시는 처음부터 5연까지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는 순간처럼 숨도 못 쉬고 읽어내려 가게하고 있습니다. 이 클라이맥스 부분이 있기에 이 시의 존재가치가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이를 낳을래요
머리카락으로 요람을 짜겠어요
사백년쯤 걸릴꺼에요" 

 

 


최재영의 '순장'은 순장이라는 악습을 질타하면서 씨줄날줄 촘촘히 엮어놓은 시(문장) 자체가 읽을 맛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순장은 생전에 고인이 쓰던 물건을 무덤 속에 넣은 껴묻거리이지만 그냥 물건이라면 단순한 흥미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의 껴묻거리는 악습 중에 악습인 사람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부리던 하인이나 또는 부인을 생매장, 화장하는 것이지요.


시에서는 순장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인지 신원미상으로 나오지만 우리나라도 몇 년 전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순장인골 4명이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순장인골 한 구가 키 153㎝의 아담한 체구를 가진 16세 소녀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주인은 현세의 권세를 사후세계에서도 연장하려고 부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믿음에 의해 함께 생매장된 소녀는 당시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현세의 영화를 내세까지 이어지게 하려는 참으로 몰염치한 권력자들의 파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은 같을진대 생명을 존중으로 보지 않고 남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인명경시사상이 낳은 풍조입니다. 
  
인도에서는 정숙한 여자라는 의미의 사티라는 과부순장 폐습이 있는데 남편이 죽으면 너무 슬퍼 남편의 시체를 화장하는 불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순사를 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몸을 불구덩이에 스스로 던지기가 어디 쉬웠겠는지요. 왕이나 토후에 한정되던 것이 상류계급으로 보급이 되고 과부의 재혼 금지 풍습에 따라 일반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모든 여자들이 용감하게 불 속에 자진해서 뛰어들면 좋겠지만 개중에는 그렇게 못한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관습의 의해 강제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아무리 관습에 철저히 젖어있다고 해도 맨정신으로 불 속에 뛰어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효희의 '순장'은 현대적 감각으로 바꿔 놓은 현대문명 비판시입니다. 닭장이라고 일컫는 현대인의 편리한 주거지는 옛 무덤이 되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생활품들은 부장품이 됩니다. 물질만능시대에 사랑은 결핍되어 가고 기형적인 사회는 기형적인 현상을 낳고 소통의 부재로 멍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