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그 고요에 드난살다 / 오태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2. 2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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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요에 드난살다

 

             오태환

 

 
   고요에 드난사는 건 나뿐이 아니지 싶다 곰비임비 헛발질이나 하면서, 순흘림체로 물색 없이 지저귀어 쌓는 무너밋골 소쩍새도 매한가지다 잘 마른 유기鍮器나 마불링이 근사한 꽃등심, 아니면 화려한 진사辰砂 때깔로 숨어 지내다가, 생각나면 닻별떼희치희치 비치는 어둠끼리도 그렇다
 

  어차피 개구멍받이로 진배없지만, 고요에 염치불구 드난사는 것 중 상등품上等品은 아무래도 빗소리다 지하철도 시내버스도 끊긴 밤, 후미진 변두리로 변두리로 옮기며 듣는[落]  빗소리다 흰 발바닥이나 보이며 놀다가, 쓰러진 자전거 바큇살을 적시고 수유사거리 안마방 찌라시를 적시고 새벽 두 시, 인사불성으로 집을 찾는 취객의 두 어깨를 가만가만 적시는 빗소리다 변두리마다 하루걸러 이틀 사흘 놋낱같이 논낱같이 내리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면

 
  드난사는 깜냥에 드난밥이나 축내며, 수척한 몸알이 괜시리 또 아프다 쥐뿔도 그리운 게 있을 리 없는데, 웃자란 고들빼기처럼 허투루로다가 쇠기만 하는
 


 

-계간『작가세계』(2011, 가을호)
2011-12-24 / 토요일, 오전 10시 04분

 

 

<시 속의 단어>

드난-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살면서 그 집의 일을 도와주는 고용살이. 흔히 여자에게 쓰는 말이다.


곰비임비 뜻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자꾸 계속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닻별떼-사전에 없는 단어.


희치희치-피륙이나 종이 따위가 군데군데 쏠리어 뭉쳐서 미어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물건의 매끄러운 면이 무엇에 스쳐서 군데군데 벗겨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예문
부사】
(1) 피륙이나 종이 따위가 군데군데 쏠리어 뭉쳐서 미어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십여 년만에 찾은 아버지의 편지는 봉투가 희치희치 낡았고 얼룩도 져 있었다.
(2)
물건의 매끄러운 면이 무엇에 스쳐서 군데군데 벗겨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칠이 희치희치 벗겨진 액자는 모서리마다 때가 끼어 있었다.
놋낱같이-사전에 없음.(신석정의 시 '비의 서정시' 2연 1행에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아쫙 쏟아지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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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서정시


          
       신석정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날 같은 비가 쪼아쫙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링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 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신문예1권 2호 1946 7)
2011-12-24 / 토요일, 오전 10시 3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