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홍(映山紅)
서정주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소실댁(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애상적, 비유적
⦁제재 : 영산홍
⦁주제 : 소실댁의 애처로운 삶의 모습
⦁시상의 전개 : 시선의 이동
⇒ 1-3연까지의 시상의 흐름은 의식의 연쇄적 유동과 관련된다. 즉 ‘영산홍에 어린 산 - 산자락에 잠든 소실댁 - 소실댁 놋요강’으로 연쇄적 흐름을 보인다. 그리고 4-5연은 1-3연에서 형상화한 애처로운 삶의 모습을 또 다른 배경과 동일시하여 제시함으로써 고적하고 애처로운 삶을 부각한다. 요컨대 자유 연상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시상 전개의 수법이 보인다고 하겠다.
■ 시구 연구
⦁영산홍 꽃잎에는 : 꽃의 화려함과 소실댁의 외로운 처지 대비
→ 중의적 이미지: 꽃 이름 + 산 그림자(남편) 어린 꽃(소실댁)
⦁산이 어리고 : 산그림자 어린 꽃(슬픈 소실댁의 이미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 슬프고 고독한 존재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 방에 있지 못하고 툇마루에 있는 요강(버림받은 소실댁의 이미지) ⇒ 소실댁의 애처로운 모습
⦁산 너머 바다는 : 소실댁이 사는 산자락과 동떨어진 마을
⦁보름살이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 소실댁의 이미지 연쇄적 흐름 (놋요강 - 바다 - 소금발) ⇒ 보름사리 때의 바다
✴ 시의 구조
소실댁의 삶 |
사리 때의 바다 |
▪ 산그림자 어린 꽃 ▪ 낮잠 든 모습 ▪ 덩그러니 놓인 놋요강 |
▪ 밀물, 썰물이 심함 ▪ 소금물에 쓰려 우는 갈매기 |
소멸감 <-------> 팽만감
(대조) ↓ 외로움의 심화 영산홍(화려함) ↔ 소실댁(외로움, 처량함) = 놋요강 = 갈매기 |
■이해와 감상 1
이 시는 소실댁이 화면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그에 어울리는 주변 정황이 그려지고 있다. 소실댁이 한낮에 잠든 모습은 무료함보다는 외로움, 고독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고독의 이미지는 '슬픈'이라는 말에 의해 쉽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놋요강'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황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연의 영산홍 이미지에도 그런 면이 드러난다. 영산홍(映山紅)은 글자 그대로 '산 그림자 어린 꽃'이다. 산그림자는 슬픔의 이미지를 준다. '영산홍'은 꽃이면서 동시에 소실댁과 이미지 면에서 일치한다. 아름다운 꽃으로 표상된 소실댁의 슬픔을 영산홍 꽃잎에 산이 어린다고 표현하여 소실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선연한 이미지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실댁의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놋요강'에서 그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요강이 변기임은 말할 것 없지만, 그 요강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점을 부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용도와는 다른 기능적 의미를 띨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성적(性的)인 것과 관련된다. 미당의 다른 시에서 자주 보이는 원시적이고 육정적인 이미지와 관계된다. 요강의 원형적 심상이 성(性)과 관련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소실댁에게 그 용도가 감소된 점을 부각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도 그렇다.
이 점은 4, 5연에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보름살이 때'는 물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멀리 쓸려 나가는 사리 때이다. '산 너머'는 소실댁이 사는 산자락과 동떨어진 마을이다. 이 대조적 심상을 통해 소실댁의 외로움은 극화되는데, 밀물과 썰물의 이미지, 달이 차오르는 이미지는 성적 팽만감이라는 심상과 교묘히 연결되면서 달과 유사한 놋요강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그 애처로운 정서는 극에 달한다. 소금발에 쓰려서 우는 갈매기와 소실댁의 이니지 대립을 보아도 그 점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리려고 한 것은 이제는 찾아오지도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고적하게 살아가는 소실댁의 한이며, 그 한이 성적인 데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미당은 이 인간 조건을 미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 송승환, 한국 현대시 제대로 읽기에서 인용
■이해와 감상 2
시「영산홍」은『文學』(1966.11.)에 발표된 뒤, 시집『冬天』(1968.11.)에 수록되어 전한다. 미당이 1915년 생이니 지천명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쓴 작품이다. 전 5연으로 이루어진 2행시인데 7·5조의 율격에 담긴 아름다운 소품이다. 얼른 보기엔 별로 대단한 작품 같지 않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서정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다.
제1연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는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의 정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작은 영산홍 꽃잎에 어떻게 산이 어린다는 것인가. 산 그림자가 영산홍 꽃잎에 드리운다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별로 흡족하지가 못하다. 그러면 어떤 정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단 말인가.
영산홍의 한자 표기 '映山紅'의 '映'은 '비추다, 비치다, 덮어 가리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映山紅'이라는 말은 '산이 어른거리며 비치는 빨간(紅) 꽃'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이 이런 단순한 이미지만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제2연으로 이어지면서 복합적인 의미망을 새로이 형성하게 된다. 우선 제2연을 살펴본 다음 그 복합적인 의미망을 따져보도록 하자.
제2연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실댁은 아마도 님의 사랑을 이젠 제대로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으로 짐작된다. 간밤에 이제나저제나 혹 님이 찾아올까 잠못 이루며 전전반측 기다리다 지샜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도 님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낮잠 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산자락'의 그 '산'은 님의 상징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1연에서의 산도 새로운 의미
로 다가선다. 이 역시 님의 상징어로 본다면 영산홍은 여인 곧 소실댁이 된다. 영산홍처럼 아름답고 젊은 소실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1연은 겉으로는 영산홍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님 생각에 젖어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거기에 포개어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의 은근한 감춤의 멋이 있다.
제3연에서는 대상을 바꾸어 툇마루에 놓인 요강을 등장시킨다. 원래 요강이 놓일 장소는 은밀한 방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요강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루에 나와 있다. 그것도 원마루에 잇대어 달아낸 툇마루다. 툇마루는 잉여적 공간이다. 마치 본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어 둘째 아내로 살고 있는 소실댁과 흡사한 처지다. 잉여적 공간에 방치된 요강은 다름 아닌 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소실댁을
상징한다. 여기서의 요강은 T.S.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제4연부터서는 이제까지 전개해 오던 소실댁 주변의 정경과는 달리 시선을 180도 돌려 엉뚱하게 바다를 끌어들이고 있다. 보름사리는 보름 무렵의 조수 곧 가장 충만한 만조(滿潮)를 이루는 시기다. 제5연은 소금 발이 쓰려 우는 갈매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당황하게 된다. 도대체 갈매기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의미구조로 본다면 갈매기도 분명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것 같다.
우선 갈매기가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소금 발이 쓰리다'는 것은 발이 소금기에 절여서 아프다는 뜻이리라. 왜 소금기에 절였을까. 바닷물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리라. 밀물을 타고 몰려오는 고기떼들을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바다에 발을 담그다 보니 절었으리라. 그러니 여기서의 갈매기의 울음은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갈매기의 정체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곧 님이 아니겠는가. 소실댁은 돌아본 척도 않고 외지에 나가 여성편력에 여념이 없는 님을 물고기 사냥에 빠져있는 갈매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제3연까지 각 연의 제1행과 제2행이 배경과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제4연과 제5연에서는 연 단위로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다.
그러니 의미 구조로 본다면 제4, 5연은 한 부분으로 묶일 수 있어서 전체 작품은 기승전결의 4단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3연까지는 앞말의 꼬리를 이어받는 연쇄구조인 것도 재미있다. 행 단위로 ㅅ, ㄴ, ㅈ, ㅂ 등이 빚어낸 압운적인 효과도 조화롭다. 한 여성의 애잔한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이다. 미당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수한 수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하다.
미당은 산문 「영산홍 이야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재미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원로시인 임보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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