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발간된 ‘한국작가회의 회보’(통권 75호)에 유안진 시인이 쓴 ‘애도의 정치학에 대한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애도의 정치학’은 지난해 6월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가 ‘서울 동북지역의 문학유산’을 주제로 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윤 교수는 ‘4·19국립묘지 시비(詩碑)의 보수성 비판’이란 부제의 논문에서 1993∼95년 문민정부 시절 ‘4·19묘지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시비의 시 12편이 대부분 ‘순수문학’을 주창해온 보수 문인들의 작품이라며,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김광규 등 4·19 정신에 걸맞은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들의 작품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이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건 국민일보였다(2008년 4월 25일자 17면-‘목 터져라 혁명 노래한 그들의 시는 어디로’ 참조). 이 기사에 기초해 논문을 썼다고 밝힌 윤 교수는 구상 정한모 조지훈 박목월 이한직 김윤식 박화목 장만영 송욱 유안진 윤후명 가운데 이성부의 시 ‘손님’을 제외한 나머지 시인과 그들의 작품은 4·19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시인 선정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구상을 지목한데 이어 정한모는 노태우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으며 박목월 장만영 이한직 등은 5·16 이후 결성된 보수적 문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 간부였다는 것이다.
윤 교수의 주장은 이성부를 제외한 나머지 시인 11명의 시들을 파내어 없애거나 폐기 처분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됐고 그 당사자인 유안진 시인은 고심 끝에 한국작가회의 회보를 빌려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4·19 묘역에 새겨진 유안진의 시 ‘꽃으로 다시 살아’는 1983년 4월 11일자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게재된 것으로, 정부 관계자로부터 그 작품을 해당 묘역의 시비에 새기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다.
유 시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국평론가협회의 추천을 받아 전화를 걸었다는 그 관계자가 “난 정부 쪽 사람”이라고 했을 뿐, 제대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수업 시간에 쫓겨 전화상으로 사용 승낙을 해준 것이라고 했다. 이어 “윤 교수가 매도한 내 시는 1983년에 출간된 ‘4월혁명기념시선집’(학민사·신경림 편)에도 수록된 것으로, 이 중요한 책마저 참고하지 않고 논문을 쓴 윤 교수는 큰 결례를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교수의 논문은 그 본의가 어디에 있든 비판의 논리가 일방적이고 이분법적 도식을 전제하고 있는데다 “이 시들도 애도 의례 속에 혁명의 에너지를 매장하는 전략에 이바지하고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거명된 시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교수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기왕에 그가 제기한 ‘4·19 시비(詩碑)의 보수성’을 야기한 시 선정 주체 역시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정부 관계자’도 베일 속에 있다. 시비(是非)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4·19묘역에 새겨진 시들을 파내어 없앨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비(詩碑)는 그 자체로 그 살아 있음의 노래이자 지울 수 없는 되새김의 자국이다. 다만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신경림의 ‘4월 29일 시골에 와서’ 같은 시편들을 추가로 새기는 일은 적극 검토할 만하다. 4·19국립묘지가 추모의 공간과 시(詩) 공원으로 자리 잡아 외연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