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정보·소개·여행/수유리♠국립4·19민주묘지

[말들의 풍경] <7> 기다림 또는 그리움 - 4·19의 언어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3. 7. 18:39
728x90

[말들의 풍경] <7> 기다림 또는 그리움 - 4·19의 언어
4월의 좌절은 詩에 있어선 축복…'진보'에의 기다림 시어로 토해내

 


사랑만큼은 아닐지라도 혁명은 시의 주된 연료다. 사랑과 혁명은 불거진 정념(情念)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시는 그것을 담기 알맞은 그릇이다.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성공한 혁명이 낳은 시는 공식주의 문학의 틀에 갇히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 점에서 1960년 4월혁명의 좌절은 역설적으로 시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4월혁명의 시언어들이 그 축복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선용하지는 못했다. 그 언어들은 더러, 관념 속의 혁명을 구가하며 공식주의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4·19가, 그것을 좌초시킨 5·16 세력의 20년 세월 동안 그리고 다시 그 상속자들의 10년 세월 동안, 기억의 힘을 통해 문학과 정치를 묶어내며 진보의 희망을 조직해낸 것은 엄연하다.

 

4·19의 기억은 핍박 받는 자들의 원기소였다. 4·19는 언젠가 다시 올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4·19의 노래는 드물지 않게 초혼(招魂)의 노래가 되었다.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 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 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4.19 21주년 기념시’라는 부제를 단 이 노래에서 시인은 스물 한 해 전의 ‘함성’을 듣는다.

 

함성은 4·19를 노래한 많은 시인들이 그 사건의 집단적 기억과 예사로이 포개는 이미지-소리다. “바람 불면/ 플래카드 펄럭인다./ 사그라진 함성/ 되살아난다”(이종욱의 ‘4월’)거나 “강 건너 버들잎 날리면/ 보리밭 둑을 타고 너는 오리라/ 땀에 젖은 얼굴 빛나는 함성/ 그 날의 총탄 속을 뚫고/ 너는 다시 오리라”(이시영의 ‘아, 4월’) 같은 시행들에서 화자는 그 날의 함성을 듣는다. 바로 이 환청이 1960년 4월과 시가 쓰여진 당대를 묶는다.

 

그래서, ‘그 날의 함성’이라는 다섯 자 표현은 4·19 시의 상투어가 되었다. 신경림의 ‘4월 19일, 시골에 와서’나 조태일의 ‘난들 어쩌란 말이냐’, 최하림의 ‘1976년 4월20일’ 같은 시들은, 그 됨됨이 저편에서, 이 다섯 글자의 상투성을 날렵하게 피하지 못했다. 그 함성은 더러 죽은 이들의 함성이어서, 양성우의 ‘4월 회상’에서처럼 ‘구천에 가득 찬 신음소리’로 변한다.

 

이 죽은 이들의 유해를 품어 안음으로써, 서울 수유리는 역사의 이름이 되었다. 고정희의 ‘수유리의 바람’, 김창완의 ‘수유리의 침묵’, 박몽구의 ‘수유리에서의 잠’, 박영근의 ‘수유리에서’ 같은 4월시는 아예 제목에서부터 수유리를 내세우고 있거니와, 조태일의 “들끓는 눈물을 하늘에 뿌리며/ 비틀비틀 수유리를 찾아간다”(‘난들 어쩌란 말이냐’)거나 최하림의 “검은 도시도 멀리 사라지고/ 기념비들만 수척하게 서 있는 공원”(‘1976년 4월20일’) 같은 시행에서도 수유리는 실패한 혁명의 아우라에 휘감겨 있다.


그 죽어간 이들의 붉은 피가, 혁명의 불길 이미지와 결합해, 진달래를 4월혁명의 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진달래 피면/ 얼어붙었던 형님의 피/ 다시 녹는다/ 형님의 피/ 진달래가 들이마셨다./ 진달래 꽃잎이 되었다./ 봄이 오면 우리/ 진달래꽃잎 따먹으며/ 형님의 착하고 굳센 동생이 된다”(이종욱의 ‘4월’).

 

4월혁명시의 화단에는 진달래가 지천이다. 최하림의 ‘1976년 4월20일’과 박봉우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신동엽의 ‘4월은 갈아엎는 달’ 같은 시들에서 진달래의 연분홍은 봄빛일 뿐만 아니라 핏빛이고 혁명의 빛깔이다. 최하림은 ‘고운 패혈처럼 피를 토하는’ 진달래꽃 곁에 접동새를 배치한다. 그 접동새는 서럽게 운다. 그 울음은 이 새가 핏빛 진달래와 더불어 우는 피울음이다. 이에 비해 박승옥의 진달래는 통곡하지 않는다. 이 혁명의 꽃은 “기어이 피울음을 거두어들이고” “마침내 우리들 피멍 든 몸뚱이를/ 세차게 일으켜 세웠다”(‘진달래’). 고은의 ‘돌아오라 영령이여 새로운 영령이여’에서는 진달래 대신 영산홍이 혁명의 핏빛을 감당한다.

 


4월에


정희성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뿐
이 땅의 정처 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4월이여

 


그러나 혁명시의 화단에 진달래처럼 붉은 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명걸의 ‘빈 교정’과 강은교의 ‘4월에 던진 돌’, 김창범의 ‘우리는 그러나’ 같은 시들은 개나리를 4월의 꽃으로 내세운다. 또 “진달래도 피고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신경림의 ‘4월19일, 시골에 와서’)에서처럼 진달래와 개나리가 동거하기도 하고, “4월이여/ 우리는 너의 무엇인가// 온갖 거리에 개나리 같은 진나리/ 진달래 같은 개달래 우글우글 피고 있을 뿐”(신대철의 ‘4월이여, 우리는 무엇인가’) 같은 시행에서처럼 그 둘은 한탄과 자기모멸 속에서 몸을 뒤섞기도 한다. 신대철의 시에서 보듯 꽃들이 역사와 분리된 공간에서 피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4월혁명시에서 이 꽃들은 자주 그 날 죽어간 젊은이들의 은유다. “그 날 밤/ 병원 문이 터져 나가고/ 십대의 꽃송이들이/ 가닥가닥 찢긴 채/ 아직은 꺼져 가는 체온을 걷어가며/ 곁에 와 나란히/ 자리를 마련하던 날”(허의령의 ‘4월에 알아진 베고니아 꽃’). 그 꽃들은 또 그 날 거리를 채웠던 젊은이들의 열정이기도 하다. “빈 의자 모서리엔 그 때의 그 뜨거운/ 꽃봉오리들이/ 남아 술렁이었어요”(이태수의 ‘다시 4월은 가고’).

 

김창완이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저 길 위에 나뒹군다”(‘수유리의 침묵’)고 노래했을 때, 그 꽃샘바람은 반혁명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이 꽃샘바람은 뒷날 하종오의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에/ 보이지 않는 신음소리가 날 때마다/ 피 같이 새붉은 꽃송이가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사월에서 오월로’)라는 시행에서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재생산된 반혁명’의 보조관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이 꽃샘바람을 일으킨 것은 1961년의 5·16 세력과 1980년의 5·17 세력이리라.

 

그러나 4월 공간을 살던 시인들의 예민한 감수성은 반동적 군부가 한강다리를 건너기 전부터 이미 혁명의 좌절을 예감하고 있었다. 혁명 직후에 쓴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의 피 냄새와 혁명의 고독을 기꺼이 구가했던 김수영은 몇 달도 안 돼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자조했고, 박봉우는 5·16 직전 “어린 4월 피바람에/ 모두들 위대한/ 훈장을 달구/ 혁명을 모독하는구나”(‘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고 한탄했다.

 

4·19를 노래한 많은 시인들 가운데, 이 사건을 민중사적 관점에서 파악한 이로는 신동엽이 두드러진다. 신동엽에게 4·19는 갑오농민전쟁과 3·1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리고 혁명의 4월 하늘은 영원(永遠)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 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금강’ 서화).

 

역사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이런 ‘능선(稜線)의 상상력’은 신동엽의 다른 시들에서도 작동한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東學)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4월은 갈아엎는 달’)라거나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행들이 그렇고, “사월 십구일, (…),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아사녀’) 같은 시행도 한가지다.

 

신동엽의 이런 민중사적 4·19관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후배 시인은 이시영이다. 그의 ‘아, 4월’에서 신동엽의 그림자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너는 오지 않고 쉽사리 오지 않고/ 종살이에 지친 누이들/ 칡꽃이 희게 울 때 또 다른 주인 찾아 몸 팔러 갔네/ 종다리 빈 밭에 날 때/ 힘깨나 쓰는 동생들 서울 가 떠돌이가 되었네/ 애비 같은 비렁뱅이 되었네.” 이 시의 화자는 기다린다. “감자 대를 뜯다가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오늘도 동냥 나가 나는 너를 기다렸다.” 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의 화자가 어떤 이름들을 미친 듯이 그리워하듯. 그러니까,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4월의 언어는 기다림의 언어, 그리움의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