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 세워진 구상의 <진혼곡> 시비. 문학평론가인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이 묘지에 시비로 조성된 4·19 기념 시들 상당수가 4·19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덕성여대 제공 |
“대부분 보수성향 시인 작품 4·19 정신 담은 시들은 빠져
묘역 만든 문민정부의 의도”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주장
국립4·19민주묘지의 시비(詩碑)에 정작 4·19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빠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문학평론가인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는 지난 10일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지역문화센터가 ‘서울 동북지역의 문학유산’을 주제로 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애도의 정치학: 4·19국립묘지 시비의 보수성 비판’을 통해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윤 교수는 1993~95년 문민정부 시절 ‘4·19묘지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시비의 시 12편이 대부분 이른바 ‘순수문학’을 주창해온 보수적인 문인들의 작품이라며, 김수영·신동엽·김지하·김광규 등 4·19 정신에 걸맞은 작품활동을 펼친 시인들의 작품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현재 4·19묘지 양쪽 측면에는 구상·정한모·조지훈·박목월·이한직·김윤식·박화목·장만영·송욱·유안진·윤후명·이성부 등 12명의 시가 6개의 화강암 비에 새겨져 있다. 윤 교수는 이 가운데 이성부의 시 <손님>을 제외한 나머지 시인과 그들의 작품이 4·19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우선 시비 조성 당시 “시인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되는 구상”은 5·16 쿠데타의 열성적인 지지자였으며, 정한모는 노태우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이들과 함께 박목월·장만영·이한직 등은 이른바 순수파 문인들로 5·16 이후 새로 결성된 ‘보수적’ 문인단체 시인협회의 간부들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윤 교수는 이들이 4·19의 민주주의적·참여적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 교수는 시비에 새겨진 이들의 작품 역시 찬양과 흥분의 어조가 두드러진 전형적인 혁명 찬가일 뿐 4·19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구상의 시 <진혼곡>의 경우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운명보다 짙은 그 바램마저 버리고/ 어서, 영원한 안식의 나래를 펴오” 등의 구절들에서 4·19 정신을 영원히 매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4·19묘지 시비의 이런 문제점이 묘지 조성을 주도한 문민정부의 이중적인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문민정부는 4·19묘지를 국립묘지로 격상시킴으로써 자신이 4·19 정신의 적자임을 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군부와 결탁 또는 야합해서 탄생한 모호한 정치적 위상 때문에 4·19 혁명을 제도화·체제내화함으로써 그 현재적 의미를 지워버리려는 의도가 시인과 작품 선정에 작용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런 지적을 바탕으로 4·19 정신의 핵심을 담고 있는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고은의 <돌아오라 영령이여 새로운 영령이여>, 신경림의 <4월19일, 시골에 와서>,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작품들로 시비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