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족하(足下)에게
강회진
오늘 온다 하여 안날부터 기다렸으나 족하는 이틀이 지났어도 오지 않았소 언덕배기 돋을양지 쪽 노루귀나 봄까치풀에 정신이 팔렸다 해도 한겻이면 넉넉할 것을, 해토머리 오는 길 매화나무에 통통히 꽃물이 올랐다 해도 한나절이면 족할 것을 나는 족하가 일부러 에움길로 오나 싶어 동구밖까지 나가 기다렸으나 족하는 보이지 않았소 내가 직접 족하의 집 근처로 가려 했을 때는 이미 마당에 살구나무 긴 그늘이 드리울 무렵인지라, 주저하다 포기하고 밤새 족하는 도대체 어느 길에 묶인 채 나를 그리워할까 생각하였소
다음날 갓밝이에는 여러 마을로 통하는 난달이라 필시 거쳐 갈 것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그곳에 갔으나 족하는 없었소 나는 한참을 서글프게 서 있다가 끝내는 족하의 집으로 갔는데,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키가 훌쩍 큰 무언가에 마음이 설레었소 그러나 또 헛걸음이란 것을 알고 비로소 원망이 생겼소 소소리바람이 불자 와락 돌아갈 마음이 생겼소 그렇지만 뒤돌아서 키 큰 버드나무에게 만약 족하가 오거든 내 이름을 전해달라 부탁했지만, 돌아올 때는 족하가 어쩌면 버드나무 뒤에 서서 진작부터 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이때의 마음을 오늘은 다 잊었소 게다가 족하가 오겠다 한 날은 골안개가 끼었다가 명지바람이 불고 지짐거렸기 때문에 괜찮다 자위했소 멀리서 매화가 터지는지 사방이 우련하니 그것으로 족하오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서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이다. 따라서 제목의 "봄, 족하(足下)에게"는 '봄이라는 족하(足下)에게, 봄에 족하(足下)에게" 등의 뜻을 갖는 편지의 '기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후자의 뜻으로 읽기보다는 전자의 뜻으로 읽는 것이 좀 더 시적 감흥을 줄 듯싶다. 그렇게 읽을 때 봄과 족하라는 의휘를 결합시켜 만드는 '병치은유' 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족하(足下)' 는 "발 아래" , "같은 또래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말"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족하(足下)' 는 "조카의 옛말" 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어떻게 읽어도 좋지만 여기서는 "조카의 옛말" 로 읽으려고 한다. 이 시에는 이처럼 안날, 돋을양지, 한겻, 해토머리, 에움길, 갓밝이, 난달 등 수많은 옛말이 쓰이고 있다. 이들 옛말은 이 시를 고풍스러운 내간체로 읽히도록 한다. 에움길로 지짐거리며 오는 봄, 조카로 은유되어 있는 봄을 기다리는 화자의 예스러운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읽히는 서간형식의 의고체가 돋보이는 시이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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