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원시의 전개와 유형
송 기 한
한국 시에서 전원시의 특성과 그 전개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그 기원 역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한번쯤은 창작했을 법한 시들 역시 전원시였다. ‘강호가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두 전원과 관계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가의 초기 모습인 「황조가」 등도 그 소재를 쫓아가다 보면 모두 전원적 특성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광범위한 시기에 걸쳐 있는, 전원적 특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모두 전원시의 범주에 넣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자연으로 표상되는 전원과는 상호 분리되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원시의 범주를 이렇게 확장시키게 되면, 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 혹은 자연의 정서를 담은 시들을 모두 전원시에 넣을 수밖에 없고, 또 먼 고대 초기시에 이르기까지 전원시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확장된 전원시들을 두고, 전원의 특색을 담은 어떤 시로 특화해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상, 전원이 본질적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 이전의 삶이란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표나게 그들의 삶을 전원적이다, 자연적이다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삶이 곧 전원의 장에서 마련되었고, 전원은 삶의 또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치된 삶에서 전원 따로 삶 따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전원을 포함한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자연의 기술적 지배가 인간으로 하여금 전원적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했거니와 이 단절 속에서 전원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과학과 기계의 전능전지한 힘으로 무장한 인간들이 자연을 휘저어도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힘과 희망들이 전원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전원은 계몽과 과학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전능성을 가지고 있었던바, 인간들은 비로소 전원의 그 광대한 실체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전원시가 추구하는 시적 세계가 원초성이나 영원성 혹은 유토피아 지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원은 근대성의 제반 사유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이런 전제에 설 때, 비로소 전원의 본질적 의미가 형성된다고 하겠다. 전원이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의 생활과 연관을 지니는 삶의 터전으로 의미화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이건청, ?한국 전원시연구?, 문학세계사, 1986,10, p. 11).
전원이 근대의 맥락 혹은 삶의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한국 근대시에서 전원시의 양상들은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반도시로서의 전원문학이다. 도시시가 있으니까 전원시가 있는 것처럼, 단지 전원생활이 좋아서 쓰여지는 소박한 형태의 시들이 반도시시로서의 전원시이다. 두 번째는 반근대로서의 전원시이다. 근대는 일시성, 순간성, 파괴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근대의 이런 위반의식과 불구화된 모습들은 반대로 전원의 영원성과 원초성을 갈망케 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전원시를 새롭게 태동시키도록 만들었다. 셋째는 유토피아로서의 전원시이다. 전원시들이 훼손되지 않은 세계에의 그리움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 지향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1920년대 한국 낭만주의자들이 기원했던 미지의 세계는 이 유토피의 의식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현실도피로서의 전원지향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불행한 현대사를 경험한 한국적 특수성에서 흔히 이해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불온한 현실들은 시인들로하여금 보다 온전한 세계, 보다 깨끗한 세계로의 지향을 추동시켜왔다. 이런 의식들이 이상향으로서의 전원을 찾게 만든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도시문학의 안티테제로서의 전원시
도시 드라마가 있으면 농촌드라마가 있고, 도시소설이 있으면 농촌소설이 있듯이 농촌시의 존재, 보다 구체적으로는 농촌의 생활상을 담은 전원시들은 주로 반도시적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낳은 변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른바 도시화 현상이다. 도시의 형성과 그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현상을 일찍이 보들레르는 군중속의 고독 현상에서 읽어낸 바 있거니와 도시는 근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혁명이 일구어낸 최대의 산물이 도시화라 할 정도로 도시는 근대성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도시문학의 안티테제로서 전원문학이 태동하는 근거도 여기에서이다. 도시생활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농촌생활로 눈을 돌리게끔 만들었다. 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삶의 여러 긍정적인 모습들을 전원의 아름다움 속에서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이런 탐색의 눈길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즐거움 속에는 어떤 사유 깊은 의미의 세계나 철학적 폭은 감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선들은 근대성의 사유 속에 편입된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그러한 양상을 굳이 근대성의 사유 속에 구동하는 인식체계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대한 단순한 표명은 도시의 생활과의 거리두기일 뿐이다.
나는 해져서 어슷어슷한 논ㅅ길로/소몰고 소리하며 돌아옵니다/하루종일 꼴베기에 시달린 두 다리로/오막살이 내 집에 반짝이는 불을 보면/가볍게 성큼성큼 디뎌집니다.//나는 해져서 어슷어슷한 논ㅅ길로/소몰고 소리하며 돌아옵니다/나를 기다리고 계신 어머님께/풀꽃으로 花環을 만들어 들고,//어머니는 나의 이 선물을 받으시고/나의 이마에 입맞춰 주시겠지요//나는 해져서 어슷어슷한 논ㅅ길로/소몰고 소리하며 돌아옵니다/가슴은 幸福에 가득 넘치고/서쪽엔 초승달이 걸려 있습니다//
장만영, 「歸路」 전문
인용시는 그저 전원이 좋아서 그것을 시로 표현한 장만영의 「歸路」이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같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현실에서 오는 고통이나 갈등도 없고, 삶의 힘겨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객관적 상황이 열악한 시기에 창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편편치 않은 정서가 전연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안온한 느낌을 준다. 서정적 자아는 날이 밝자 논에 나가서 하루 종일 김을 매고 저녁이 되어서 돌아온다. 힘든 노역에 하루의 일상을 정리하는 푸념정도는 있을 법한데도 그런 것이 전혀 토로되어 있지 않다. 즐겁게 일하고 돌아오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실 어머니와, 거기서 얻어지는 삶의 보람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시인의 이런 의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다음의 글을 보면, 전원에 대한 시인의 창작 의도가 반도시적 서정에 기대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서울생활에서 어지간히 고달픈 생활을 하던 나는 향수병도 병이려니와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이 이상 견딜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시골에 있을 때는 그처럼 가고 싶고 보고 싶던 서울이요 동무들이건만 몇 해를 고생하고 나니 참말로 객지에서 죽고 말 것 같았다(장만영,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 신흥출판사, 1958).
장만영 시인이 전원으로의 도피는 순전히 도시 생활의 염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다가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향수병까지 겹쳐지면서 시인만의 고유한 전원시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반도시 문학의 안티테제로 구동되는 전원시들에는 전원에 대한 막연한 찬양과 동경으로 채색된다. 전원은 시인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이상이며, 가치로 다가온다. 이런 관념 속에는 근대의 여러 사유에서 길러지는 역동성이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이 전연 사유되지 않는다. 전원에 대한 막연한 찬양, 전원 생활에 대한 끝없는 즐거움의 세계만이 노래되는데,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전원이 있기 때문이며, 전원시는 그러한 시인의 존재이유를 말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2) 반근대로서의 전원시
근대는 속도를 중심으로 한 일시성과 순간성의 세계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근대를 불안으로 인식하고 파편적 사유의 핵심적 동인으로 판단하는 것도 그러한 휘발성의 세계 때문이다. 계몽이라는 원대한 계획이 인간 모두에게 위대한 비젼과 희망으로 다가왔다면, 근대에 대한 여러 반성적 담론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안티담론은 등장했고, 그것도 대단한 물결로 전지구인의 사유를 휘감아 돌고 있다. 탈근대성의 담론이나 근대성의 논쟁들은 어쩌면 그러한 근대의 희망과 꿈이 더 이상 기대치로 자리잡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근대에 대한 불신과 그 통합적 상상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시인들을 휘감아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전원의 완결성이다. 물론 이 때의 전원이란 근대의 파편성과 일시성을 초월하는 통합성과 영원성의 상징이 된다. 전원의 근대의 사유 속에 편입되어 그 초월적 의미를 갖는 것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인용신는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이다. 여기서 ‘먼 나라’란 두말할 필요없이 유토피아이면서 반근대성이 지향해야 할 최종목표이다. 이를 서양적 의미에서 에덴동산이나 황금시대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동양적 의미로는 무릉도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문명과 대척점에 서 있는 반문명적인 낙원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가 근대 이전의 세계, 곧 자연이 기술적으로 지배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신석정의 시에서는 후자에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따라서 ‘먼 나라’는 인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인간 이외의 모든 현상을 지칭하는 원형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신석정의 초기 시세계들은 전원시적 모양새를 잘 갖추고 있는데, 그 사유의 틀들은 노장사상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의 시집 ?촛불?이 간행될 무렵, 신석정은 노장 사상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준 바 있다.
한문 공부를 하는 한편 노장철학을 섭렵해 보려고 무진 애도 써보고 도연명의 소박한 시를 애독하는가 하면 타고르의 세계에 파묻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신석정, ?전집?5권, p.396.)
창작에 열중하면서 노장사상에 대해 알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이 언급은 그가 이 사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의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의 상실의식과 밀접한 관련양상을 갖고 있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상대적 분포와 구분이야말로 반노장적 사유인 반면, 너와 나는 둘이 아니고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절대적 입장은 노장 사상의 핵심이 된다. 즉 자연으로의 절대적 관계회복, 그러한 회복을 가능케 하는 ‘되돌아감의 행위’, 그리고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론적 사유가 노장적 자연인식의 궁극이기 때문이다.
노장사상에 근거를 둔 신석정의 전원적 유토피아는 이 작품에서 보듯 ‘먼 나라’로 구현된다. 이곳은 깊은 산림대와 고요한 호수가 있고, 야장미가 피어 있으며 노루새끼가 마음껏 뛰어다니며,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로 표상된다. 이를테면 문명으로 대표되는 그 어떤 것도 물들어 있지 않은, 자연의 시원적 의미가 되살아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 합일되기 위해서는 ‘어린 양’과 더불어 와야 하는데, 이때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명의 평화로운 공존은 상대적 구분을 뛰어넘는 절대적 통일의 세계로 구현된다. 인간은 문명적 요소를 상실한 순수 자연의 상태, 곧 상대적 분포나 구분이 없는 순일한 자연인이 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의 대립자의식이 무화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럴 때에라야 비로소 그 ‘먼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론적 질서와 완벽한 동일화의 세계야말로 근대 모더니즘이 추구한 비파편화된 세계, 엘리어트가 갈망한 연속의 세계가 아닐까 한다.
이렇듯 자연과의 동일화는 신석정의 시세계에서 은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연과의 절대적 관계항의 회복은 근대적 삶의 좌절에 대한 영원한 보상의 심리와 맞물리는 것이다. 신석정은 근대적 우울과 좌절을 자아의 내면 속에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 질서 속에서 이를 해소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신석정의 전원시들은 근대의 파편성을 치유하는 반근대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토피아로서의 전원시
전원을 찾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원망 등을 현실 이외의 다른 세계에서 구하는 것인데, 이럴 경우 가장 많이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목가적인 아름다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원시는 어떤 형태로든 유토피아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란 모든 인간이 꿈꾸는 궁극이다. 이 꿈은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면 한번쯤 꿈꾸고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일 것이다. 유토피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이 표면적인가 아니면 이면적인가에 다르긴 하겠지만 이런 욕망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집단은 아마도 낭만주의자들이 아닐까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시적 자아를 거의 신의 경지에까지 올려놓으며 출발한다. 이런 전지전능한 자아는 대상을 마음대로 주관화하여 감정을 자유자재로 발산시킨다. 이 끝없는 꿈들은 서정시를 감정의 홍수로 범람케 하여 작품을 감정의 축제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이들의 무소부지한 전능의 힘들은 또다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말게 된다. 인간이란 결국 신이 될 수 없으며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좁힐 수 없는 간극에서 낭만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일한 자아이되 전일한 자아가 될 수 없다는 이 아이러니칼한 상황이야말로 낭만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로부터 탈출코자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낳게 한다. 이른바 동경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시간적 의미의 동경이나 관념적 의미의 동경, 공간적 의미의 동경이 그러한데, 유년에의 회귀나 사랑 혹은 미지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이들이 추구했던 가장 이상화된 모델들이다. 특히 미지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현실과 대비되는 완벽한 모형으로 추구되는데, 전원은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공간으로 구현된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아 ~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밀 익은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데나//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저 하늘 저 빛깔이 그리 고울까//아 ~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 떼/버들 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데나//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전문
우리 시사에서 낭만주의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난 시기는 1920년대이다. 독립에의 꿈이 좌절되고, 낙관적 전망을 상실한 것이 이 시기이다. 이런 좌절의식은 시인들에게 감정의 과잉노출이라든가 꿈 혹은 미지의 공간에 대한 동경, 사랑 의식 등을 강요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들은 반이성주의에 토대한 낭만주의적 속성,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라는 열악한 현실, 특히 3⋅1운동 실패에 따른 현실 도피 욕구는 낭만주의의 발생근거였던 사회적 혼돈을 잘 설명해주는 요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결부되어 1920년대 한국적 낭만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소월과 파인을 비롯한 민요시 운동은 이런 배경 하에서 출발했다. 인용시는 김동환의 대표작품으로서 192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 나와 있는 ‘산 넘어 남촌’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며 지금의 불온한 현실과는 대비되는 완벽한 곳으로 구현된다. 이곳은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가 나고 오월이면 향긋한 보리냄새가 나는 등 어느 것 한가지도 빠지지 않고 완벽하게 구현되는 전일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상화된 공간에의 열망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소월의 시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전문
이 작품에서 ‘강변’은 ‘남촌’과 등가 관계에 있는 공간이다. 강변 역시 현실의 공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향이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 있고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가 펼쳐지는 완벽한 공간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가족 주체들을 부르며 이곳에 살고자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강변’은 관념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낸 꿈의 공간, 곧 유토피아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영원하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이 빚어낸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거기서 촉발된 동경은 ‘남촌’이나 ‘강변’과 같은 이상적 전원을 상상적으로 구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은 낭만적 아이러니를 극복할 통합의 공간인데, 이런 인식의 근간에는 전원이 완벽한 질서를 구현하는 실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요컨대, 그곳은 태초의 에덴동산과 같은 곳, 완벽한 실체로서의 유토피아 공간이다.
4) 현실도피로서의 전원시
현실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그 대안으로 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현실 너머의 세계이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 불려졌던 ‘청산에 살자’라는 말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여기서의 ‘청산’은 혼돈된 현실에 대한 안티담론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전원에 대한 그리움은 그 동기가 사회적인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강한 현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서구 전원시에서 흔히 원용되는 아르카디아적인 장소에 가깝다. 아르카디아는 “완전했던 과거와 불완전한 현재의 접점에 존재하는 곳이며, 앞으로 존재해야 할 장소”(이건청, 앞의 책, p.123)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 현대사는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왔기에 이상향으로서 많은 아르카디적인 장소가 탐구되어 왔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192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이 구가했던 미지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도 실상은 현실도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이며, 근대에 대한 반담론으로 전일한 목가적 세계를 탐색한 신석정의 경우도 이 의식과 분리하여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원에의 탐닉이 현실도피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이를 좀더 표나게 문제삼은 사례를 찾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가령, 노천명과 김달진의 경우도 여기에 속하고 청록파의 목월도 여기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목월은 자신의 전원 탐색이 현실과의 길항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 바 있어 눈길을 끄는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청노루」를 쓸 무렵, 그 어둡고 불안한 시대에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한국의 천지에는 어디에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이었다. 강원도를, 혹은 태백산을 백두산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우리가 은신할 한 치의 땅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간직했던 것이다(박목월, 「청록집의 자작시 해설」).
이 글은 자신의 대표작 「청노루」를 해설한 것으로서 자신의 시적 동기가 어둡고 불안한 시대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의 키포인트는 불안한 시대에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에서 찾아진다. ‘어수룩한 천지’는 글 속에 나타나 있는 대로 어떤 구체적인 장소도 아니고 멋진 장소도 아니다. 시인은 일제시대라는 암울한 시절을 기댈 수 있는 조선의 천지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천지는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이어서 그 어느 곳에도 우리가 은신할 한 치의 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간직했다는 것이다. 그의 자연시들은 이렇게 탄생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현실도피의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식하에서 만들어진 것이 그의 대표작 「청노루」라고 한다.
머언 산 청운사/낡은 기와집//산은 자하산/봄눈 녹으면//느릅나무/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청노루/맑은 눈에//도는/구름//
「청노루」전문
이 작품에서 묘사된 공간은 뭔가 정교하고 복잡한 곳이 아니다. 또 불안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 멋진 자연을 드러내기 위한 시적 의장도 없다. 그냥 동화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곳의 공간은 현재의 불합리한, 일상의 피로에서 탈출하여 그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한 그런 곳으로만 그려져 있다. 시인은 자연의 궁극적 의미라든가 역사철학적 사유내에서 편입되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탐색해 들어가지 않았다. 불구화된 현실에 대한 대타의식적인 영혼의 평화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목월은 현실도피를 위한 공간을 그려내면서 사실적 자연을 재현해내지 않고 허구적 자연을 내세웠다. 재현적 자연이 아닌 창조된 자연인 것이다. 시인은 사실 속에서, 즉 있는 자연 속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 탐색이나 초월적 의미를 읽어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 속에서 의미의 그림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는 불합리한 현실로부터 이상향을 추구한 시적 동기 바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목월은 현실을 도피할 목적으로 있는 자연을 재현하지 않았다. 그가 인식한 자연이란 일제강점기라는 불온한 때가 묻어 있는 것이기에 묘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 그가 찾은 것은 상상 속의 자연, 곧 창조된 자연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더러운 때가 묻지 않아 깨끗했다. 이런 도피의식이 「청노루」의 동화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듯 목월에게 있어서 전원이란 현실 도피의 공간으로 직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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