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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타자 찾기-조용숙 신작시에 대하여 / 이은봉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2. 2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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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타자 찾기

―조용숙의 신작시에 대하여



이은봉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다. 수없이 많은 그러한 정의에 나는 지금 또 하나의 정의를 덧붙이려고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저 자신을 고쳐 나가는 존재이다.’ 그렇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저 자신을 개선하고 개혁해 나가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본래 성찰하고 반성하는 존재이다. 물론 이때의 인간은 낱낱의 개인을 가리킨다. 오늘의 삶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인간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훨씬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개인이 곧 전체, 개인이 곧 우주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개인이, 즉 ‘나’라는 개체가 인간의 현실 속에 보편적으로 등장한 역사는 일천하다. 근대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이후라는 것은 산업화 이후, 곧 자본주의 이후를 뜻한다.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에나 인간은 저 자신의 자아를 보편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인간이 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한 역사는 이처럼 짧다. 여성의 자아까지 보편적인 자아로 등장한 역사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저 자신의 ‘자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를 모두 자각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자아’의 안에는 무수히 많은 ‘자아’가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자신의 ‘자아’를 발견했다는 것은 저 자신의 ‘자아’가 남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의 수많은 나, 자아 안의 수많은 자아를 모두 다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정작의 ‘나’를 바르게 자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방황과 수행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정작의 ‘나’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숲으로서의 ‘나’만이 아니라 나무로서의 ‘나’까지도 알아야 한다. 내 안의 나, 곧 숲과 나무로서의 나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객관화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객관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타자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타자가 되지 않고서는 내가 ‘나’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자각하고 있는 ‘나’는 이미 ‘타자’화된 ‘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미 나는 타자다. 내가 바르게 알고자 하는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로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알고자 하는 세계처럼 내 안의 나도 ‘타자’로 존재할 때 정작의 앎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때의 타자는 또 다른 수많은 타자, 곧 수많은 ‘나’와 교섭하면서 저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전모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이때의 타자, 곧 객체는 본래 ‘나’라고 하는 주체의 거울에 비추어지면서 구체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나’에게 이런저런 객관적인 이름을 붙여 명명을 하는 것도 다름 아닌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미 타자화된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자화되기 이전의 나와 능동적으로 통섭하면서 저 자신의 존재를 현현시킨다는 것이다. 비록 객관화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아직 객관화되기 이전의 자아와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이때의 자아는 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가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려고 하는 조용숙의 시는 바로 이러한 형태의 시적 자아, 곧 ‘나’의 현존을 보여주고 있어 두루 관심을 끈다.


가까이 다가오면

무엇이든 덥석덥석 삼켜버리는 나는

온몸이 입이라네

헛배만 불렀다 꺼지는 상상임신처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네

거침없이 입에 넣은 것들이

깊은 망각의 늪에 떨어질 때면

나는 먹은 만큼 더 허기가 진다네

먹이를 찾아 나설 발이 없어

늘 뱃가죽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나에겐

영양결핍에서 오는 폭식 습관이 있다네

늘 허겁지겁 삼켜 봐도

먹을 수 있는 건 항상 생의 외피뿐이어서

깊이와 무게는 삼킬 수가 없다네

지독한 편식주의자인 나는

언젠가부터 만성 빈혈을 앓고 있다네

―「거울」전문


이 시는 우선 독특하게 응용되어 있는 시점 때문에 주목이 된다. 이는 무엇보다 이 시의 화자가 배역이라는 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거울이라는 배역이 거울의 목소리로 거울 자신에 대해 명명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물론 이 시의 화자인 거울은 시인의 자아가 투영되어 있는 객관상관물이다. 시인이 거울에 침투하여 거울의 탈을 쓰고 거울의 목소리로 저 자신에 대해 명명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이 시를 제대로 읽고 즐기기 위해서는 ‘거울’의 눈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시종일관 ‘거울’의 눈만을 고집하며 이 시를 읽을 필요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화자는 거울이지만 안으로 감추어진 화자는 시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는 거울인 동시에 시인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가 거울이면서 시인이라는 동시적 존재로, 곧 양가적 존재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이처럼 양가적 존재로 드러나 있는 것이 이 시의 화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화자인 시인의 의식이 이미 양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거울인 동시에 시인으로, 곧 양가적 존재로 현현된다는 것은 이 시의 시인이 그만큼 복잡하면서도 구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가리킨다. 언제나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은(其然不然) 존재로, 곧 카오스모스의 존재로 자리해 있는 것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가적 존재인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의 과잉욕망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으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낸다. “가까이 다가오면/무엇이든 덥석덥석 삼켜버리는” “온몸이 입”인 존재로 저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화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저 자신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존재, “먹은 만큼 더 허기가” 지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거울이든 시인이든 화자의 현존에 따르면 이 시는 “늘 뱃가죽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나”, 곧 “지독한 편식주의자인 나”를 깨닫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나답지 않은 나, 곧 내 안에 존재하는 타자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 시의 화자가 양가적이라는 것은 확인이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다의적 언술행위를 통해 다소 복잡하면서도 신선한 내포를 보여주는 것이 이 시의 양가적 화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술행위에 의해 내 안의 여러 모습의 내가 지니고 있는 타자성이 좀더 효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낱낱의 내가 타자화되면 이때의 타자는 여타의 타자, 나아가 세계 일반과 관계하면서 저 자신을 확장해 가지만 말이다. ‘타자’라는 객관적 존재로 전이되는 ‘나’라는 주관적 존재의 예는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내 사후에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각막뿐이라는 말에

안구기증 서명을 하고 나오던 날

멀쩡하던 한쪽 눈이 붉은 등을 내겁니다.

이제부터라도 세상을 좀 멀리 보라고

가까이 보이는 세상만 쫓아다느라

분주하던 발길을 묶어버립니다

내가 잘못 본 세상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먼저 옮겨가는 법이라며

오늘밤에 작은 딸 눈에도

붉은 등불 하나 켜놓고 갑니다

그동안 잘못 본 세상 다 태울 때까지

안구기증 서류에 사인한 잉크가 다 마를 때까지

저는 이 불씨를 소중히 켜 놓겠습니다

―「눈병」 전문


앞의 시와는 달리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저 자신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일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가 이내 시적 자아, 즉 ‘나’일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그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때의 ‘나’가 이 시에서 시종일관 ‘나’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점차 타자화되고 있는 ‘나’ 자신의 자아를 비교적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화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서의 화자, 즉 ‘나’ 역시 타자로 확장되면서 저 자신의 의미를 좀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안구기증 서명을 하고 나오던 날” 오히려 “멀쩡하던 한 쪽 눈이 붉은 등을 내”건다는 등의 표현에 의해 확인이 된다. “멀쩡하던 한 쪽 눈이 붉은 등을 내”건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이미 내가 타자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특히 “이제부터라도 세상을 좀 멀리 보라”며 “분주하던 발길을 묶어버”리는 일이야 말로 눈으로 대표되는 자아, 곧 나를 타자에게로 확장시키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타자에게로 확장시키는 일은 곧바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발견하고 깨닫는 일을 가리킨다. ‘나’의 그릇된 인식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전염될 수 있다”는 발견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처럼 타자에게로 확장되는 ‘나’를 통해 참다운 ‘나’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조용숙 시의 주요내용이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은 시인 자신은 물론 독자 일반에게도 ‘나’의 실재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다음의 시는 시인 자신의 자아가 나뭇잎으로, 나아가 나무로 확장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간밤에 나뭇잎 몇 장 내 몸에 돋았다

푸른 잎사귀들 떼어내 한 잎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춰본다

이리저리 엉켜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물맥을 빠져 나온 거친 숨소리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다

내 심장을 두드려댄다

벽을 향해 웅크려 있던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문을 찾아 다시 돌아눕는 입에서 새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뒷동산에서 본 상수리나무를

세상을 스무 바퀴쯤 돌고 돌아 내 몸으로 다시 만나다니!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다 잠이 든 아이들이

떡메를 맞고 서 있는 상수리나무 내 품으로 파고든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 있는

상수리나무 등걸의 흔적을 훔쳐 읽는다

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 놀라 날아간 하늘은 물론 계곡물마저 모두 멍 빛인 산비탈에

만신창이가 되어 서 있는 상수리나무인 내 몸,

몽고반점 매달고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참아야 한다고 배운 내 몸,

여기저기서 묵은 수피들이 피딱지처럼 일어난다

수맥을 찾아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박아 넣고 있는 나는

멍을 키워 어떻게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려고

해마다 상수리를 몇 말씩이나 매달아놓고

미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을 제 품으로 불러들인다

―「멍」전문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내 몸”이라는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 현현된다. 예의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인 ‘나’의 현존적 상황과 의미를 따져 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물질적 이미지로 치환된 나, 곧 “내 몸”은 이내 “나뭇잎 몇 장”으로 확장된다. 이 시의 화자인 내가 물질적 이미지 중에서도 식물의 이미지로 변용된다는 것이다. “푸른 잎사귀들 떼어내 한 잎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춰”보는 등의 구절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식물의 이미지, 즉 “내 몸에 돋”은 “나뭇잎 몇 장”은 곧이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뒷동산에서 본 상수리나무”의 이미지로 변모된다. 그리하여 화자인 나는 상수리나무가 되고 상수리나무는 화자인 내가 된다. 나와 자연, 나와 상수리나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셈이다.

 

상수리나무의 이미지는 이내 어머니의 이미지로 변용되면서 좀더 깊은 내포를 담는다. 물론 이때의 어머니는 “떡메를 맞고 서 있는 상수리나무”이니 만큼 상처가 깊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모든 어머니는 어머니인 만큼 본능적인 모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학습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없지는 않지만 동물이나 식물의 현존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모성은 본능의 산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동물이나 식물의 차원, 즉 본성의 차원으로 자신의 존재로 전이시키지 않고서는 누구도 모성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화자 자신의 환유이기도 한 상수리나무를 어머니의 이미지로 전이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이 갖는 근원적인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해야 옳다. “해마다 상수리를 몇 말씩이나 매달아놓고/미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을 제 품으로 불러들”이는 모성적 존재로 저 자신의 자아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심화되고 있는 시적 자아의 내포는 그의 다른 시를 통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한 그루 나무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가족」전문 


이 시는 앞의 시와는 달리 화자에 의해 선택된 대상을 간접적으로 서술하는 객관적 시점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한 그루 나무"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얘기이다. 따라서 시종일관 관찰자적 위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화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에 의해 선택되는 객관적 대상은 대상으로 선택되는 동시에 주관화된다고 해야 마땅하다. 대상의 선택이 곧 세계관의 선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의 중심대상인 “한 그루 나무”의 경우 그 자체로 이미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객관상관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서술 대상인 “한 그루 나무”는 곧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쩍쩍 갈라진 몸피와”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이라고 할 때의 몸피와 가슴팍이 실제로는 시인 자신의 몸피와 가슴팍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유로 “새까맣게 썩은”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를 위해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리는 주체는 시인 자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화자인 시인이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저 아닌 다른 것을/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라는 표현을 통해 나무의 내포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나무의 내포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자아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저 자신의 자아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저 자신의 내포를 좀더 깊이 있게 깨닫고 있다는 것이 된다. 시인 조용숙이 자신의 자아를 타자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저 자신을 새롭게 깨닫고 있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징험이 된다.



저녁 식탁 위에 오른 고등어 한 마리

한 점 떼어 삼키려다 목에 걸린 가시 한 조각

성급히 뱉어내려 켁켁거리는 사이

어느덧 내 몸이 바다 한 가운데에 가 닿는다


살이 발려나가는 순간,

바다의 물고기는

떨어져나간 제 생의 한 조각을 찾아

한 번 더 출렁였을지 모른다


날카로운 가시 가슴에 품고도

저 아닌 다른 것을 찔러본 적 없는 물고기

살이 다 발려지기까지

몸속 가시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가시를 향해

뭔가 찌르고 싶은 깊은 적의를 숨기고 살았을 거라

태연하게 말하는 사람들

몸속에 가시를 품고 사는 고통을

꿈에라도 짐작이나 해 봤을까


어쩜 제 몸에 박힌 가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바다의 몸부림처럼

구름 끼고 날 궂은 날

파도가 그렇게 출렁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시를 말한다」전문


이 시에는 앞의 시와는 달리 다소나마 화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1연의 “목에 걸린 가시 한 조각/성급히 뱉어내려 켁켁거리는 사이/어느덧 내 몸이 바다 한 가운데에 가 닿는다”와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 시는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이 중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화자인 내가 시의 내용에 개입하기는 하지만 단지 개입하는 정도에 그쳐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저 자신의 행위나 경험을 시종일관 직접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 객관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고등어 한 마리”를 통해 변주되는 시인의 자아를 꼼꼼히 추적해 가며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화자가 이 시에서 “살이 발려나가는 순간,/바다의 물고기는/떨어져나간 제 생의 한 조각을 찾아/한 번 더 출렁였을지 모른다”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표현 또한 지금까지 논의해온 시인의 자아 찾기의 결과, 곧 확장된 자아의 결과라는 것이다. 변용되고 확장된 자아를 통해 저 자신을 발견하거나 깨닫는 예는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익히 증명이 된다.


소문만으로도 이미 마을은 들뜨기 시작했다 그가 입성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양지뜸 음지뜸에 있는 집집마다 그에게 선을 대기 위해 돈을 끌어 모았다 라디오, TV, 전기다리미, 세탁기 등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를 통해 이런저런 청탁을 넣기 시작했다 직원이 필요하다는 둥, 자취방이나 월세방을 내놓아야 한다는 둥, 심지어는 다방 여종업 구하는 일까지 모두 그에게 위임했다 밤낮으로 그는 편한 잠을 청하는 날이 없었다 급기야는 너무 서 있어서 발가락이 뒤틀렸더라느니 피가 몰려 하지정맥류가 왔더라느니 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따르는 무리들이 하나 둘 늘면서 그는 선이 닿는 곳마다 영역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윗선에 줄을 뻗친 그는 사람들의 회유에 밀려 정치에 출사표를 던졌다 환한 얼굴로 사거리에 나와 선 그는 유권자들에게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점점 빛의 노예가 되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달빛이 사라지고 별빛마저 흐려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의 얼굴은 껌과 침으로 얼룩져 갔다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면 되는가? 내가 없으면 이 마을이 암흑천지가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배신과 분노로 충혈된 그의 눈빛은 저를 외면하는 눈들을 다 태워 버릴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전봇대」 전문


이 시에는 ‘전봇대’라는 객관적인 대상이 ‘그’라는 3인칭 존재로 명명되어 있다. ‘그’라는 3인칭 존재로 명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에서의 전봇대는 의인간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인칭 존재로 명명되어 있는 어떤 인물과 상호 착종되어 있는 것이 이 시의 핵심대상인 ‘전봇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전봇대’는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야 마땅하다. 전봇대의 이미지와 인물의 이미지가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이들 이미지들이 이루는 양가성은 선불교의 불이(不二)라는 개념을 통해 좀더 쉽게 설명이 된다.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줄임말인 불이(不二)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전봇대와 인물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특징인 양가성, 곧 불이는 곧바로 중용의 내포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전봇대’라는 인물은 끝내 중용을 잃고 만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불만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면 되는가? 내가 없으면 이 마을이 암흑천지가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등의 구절이 그 예이다. 이처럼 편벽된 성정을 보여주는 인물인 ‘전봇대’에 대해 시인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전봇대라는 인물이 시인 자신의 자아가 투영되어 있는 객관상관물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전봇대라는 인물이 곧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도 시인은 저 자신을 향해 성찰적 비판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조용숙의 시는 확장되고 심화된 자아, 곧 타자화된 자아를 통해 저 자신의 현존을 발견하는 동시에 깨닫는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저 자신의 현존을 발견하는 동시에 깨닫는 일은 저 자신의 현존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본래 끊임없이 저 자신을 고쳐나가는 존재이다. 그렇다. 지속적으로 저 자신을 개선하고 개혁해 나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조용숙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 곧 시적 자아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저 자신을 고쳐나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 곧 ‘나’는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특징을 갖는다. (《시로여는세상》 2008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