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시는 어떻게 어디서 오는가
이은봉
시는 질문이 많은 사람의 산물이다. 질문이 많은 사람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다. 시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의 산물이다. 호기심의 대상은 물론 시인 자신과 세상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화두가 많은 사람이다. 화두로 제 마음을 어지럽히며 살아가는 사람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시는 이처럼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의 것이다.
화두는 상징으로 만들어진 질문이다. 이때의 상징은 언어를 매개로 하기 마련이다. 화두라는 상징에 민감한 사람은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언어에 민감한 사람은 감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언어를 매개로 만들어지는 상징은 이미지이다. 이미지이기는 화두도 마찬가지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 곧 화두가 많은 사람이 이미지가 많은 사람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지가 많은 사람은 이미지로 사유하기 마련이다. 이미지가 많은 사람이 개념으로, 논리로 사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미지로 사유하는 사람은 본래 마음에 풍경이 많은 사람이다. 풍경이라는 말 대신 장면이라는 말을, 형상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
이때의 풍경은 스틸사진일 수도 있고, 동영상일 수도 있다. 스틸사진이든 동영상이든 풍경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개념이나 논리보다는 이야기로 사유하는 사람이 풍경이 많다. 이야기로 사유하는 사람은 정서(감정)이 많은 사람이다. 정서(감정)가 많은 사람은 이미지가 많은 사람이다.
따라서 풍경이 많은 사람은 이미지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야기가 많고, 정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 이야기, 정서가 많은 사람, 곧 마음에 풍경이 많은 사람이 다름 아닌 시인이다. 그렇다. 시인은 풍경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다.
풍경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개념이나 논리보다는 형상으로 사유한다. 형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지성이나 이성보다는 이미지나 정서(감정), 그리고 이야기로 사유한다. 이미지는 정서(감정)와, 정서(감정)는 이야기와……, 곧 형상의 여러 자질들은 서로 뒤얽혀 존재한다.
따라서 이렇게 만들어진 풍경(형상, 상상, 장면)에는 이미지, 이야기, 정서가 혼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때의 이미지, 이야기, 정서는 본래 일정한 의미를 거느린다. 하지만 시에서 의미는 부차적이다. 부차적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의미는 곧바로 진실에 닿아 있다. 진실에 닿아 있는 까닭은 그것이 깨달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산물이라는 것은 화두 또는 호기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영감의 형식으로 오기도 하지만 직관의 형식으로 오기도 한다. 문득, 별안간, 퍼뜩 시인의 마음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것이 시와 함께하는 깨달음, 곧 진실이다. 이때의 진실은 靈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영적인 감흥과 함께 하는 것이 시의 진실이다.
따라서 시인의 마음은 시가 잉태되고 생산되는 태반이라고 해야 옳다. 시의 씨앗을 받아 가꾸고 기르는 태반……. 하지만 시의 씨앗이 태반에 머무는 시간은 일정치 않다. 어떤 경우에는 10년을 머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10초를 머물기도 한다.
……시인의 마음은 시의 태반이라고 하기보다 시의 영매라고 해야 좋을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마음을 빌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을 빌려 세상에 태어나는 시는 그 자체로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시가 그 자체로 객체이면서 주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존재는 하나의 풍경(형상, 상상, 장면)으로, 하나의 물질로 현현되기 마련이다.
시라는 존재로 현현되는 풍경이 반드시 구상일 필요는 없다. 추상일수도 있고, 반추상일 수도 있는 것이 풍경이다. 호기심과 화두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마음속에 생성되는 것이 이때의 풍경이다. 호기심과 화두가 만드는 상징이, 상징이 만드는 이미지가 완벽한 구상이기는 쉽지 않다. 꿈의 이미지가 그렇듯이 함부로 흐트러져 있거나 일그러져 있는 것이 시에서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을 빌려 태어나는 시……. 이른바 시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시는 어디에서 와서 시인의 마음을 태반으로 삼아 태어나는가.
일단 시는 언어로부터 온다. 언어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오는 것이 시이다. 말의 아름다움을 말의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다. 말의 아름다움이나 말의 즐거움은 말재미, 곧 말맛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말맛을 통해 시의 맛을 알게 된다. 말맛은 일차적으로 어휘의 맛에서 비롯된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어휘, 그 중에서도 형용사의 아름다움이 먼저 가슴을 친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말맛에 빠져들게 하는 형용사는 수없이 많다. 일단은 ‘파랗다’라는 형용사의 계열어부터 떠올려 보자. 파랗다. 파르랗다. 파르스레하다. 파르스름하다. 파릇하다.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한가. 유사한 형용사인 ‘푸르다’의 계열어는 이보다 훨씬 풍성하고 화려하다. 푸르다. 높푸르다. 짙푸르다. 시푸르다. 검푸르다. 푸르께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뎅뎅하다. 참으로 싱싱한 형용사의 연쇄이지 않은가.
형용사의 말맛에 빠져드는 단계를 지나면 누구나 부사의 말맛에 빠져드는 단계에 이른다. 부사의 말맛, 특히 ‘-이, -히, -리, -기’ 등으로 끝나는 부사의 말맛은 젊은 시인 지망생들을 깊이 취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에는 나도 형용사에 ‘-이, -히, -리, -기’ 등 접미사를 붙여 부사를 만드는 놀이를 즐긴 적이 있다. ‘곱다’→‘고이’, ‘아득하다’ →‘아득히’, ‘나란하다’→‘나란히’, ‘미치다’→‘미처’ 등이 구체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예 조어를 만드는 재미에 빠져든 적까지 있다.
맨 처음 내가 시의 어휘가 갖는 말재미, 말맛에 빠져든 것은 소월의 시를 통해서이다. 소월의 시를 읽으며 처음으로 나는 형용사의 말맛을, 부사의 말맛을 알게 되었다.
어휘의 말맛에 취하는 단계를 지나면 누구나 어휘들이 모여 만드는 리듬의 맛에 취하기 마련이다. 리듬의 재미를 처음 깨달은 것도 소월의 시를 통해서이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 다시 더 한번……” 지금 읽어도 입 안에 향기와 울림이 펼쳐지는 리듬을 갖고 있는 소월 시의 한 구절이다.
리듬의 맛, 가락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되면 시의 언어와 언어가 뒤얽혀 이루는 비유의 맛, 나아가 시 전체 형상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시 전체 형상의 완미성을 따져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완미한 형상의 시를 즐길 수 있게 되면 완미한 형상의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완미한 형상의 시는 완미한 형상의 시를 부른다. 아름다운 시는 아름다운 시를 부르고, 좋은 시는 좋은 시를 부른다.
다시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시로부터 온다.
좋은 시를 읽지 않고, 좋은 시를 즐기지 않고, 좋은 시를 좋아하지 않고 좋은 시를 쓰기는 불가능하다. 좋은 시는 언제나 좋은 시에서 온다. 새로운 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시는 언제나 새로운 시에서 온다.
이때의 시는 진실을 함유한다. 진실을 함유하고 있는 시는 일종의 존재자이다. 존재자라는 말은 그것이 이미지이고, 물질이고, 풍경(형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언제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것이 존재자이다.
시 이전에 언어가 있다. 언어 이전에 사유가 있다. 사유 이전에 사물이 있다. 사물은 자연의 일부다. 그렇다. 사물은 자연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사물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독립된 ‘존재자’다. ‘존재자’라는 말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진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언어를 만드는 것도 그것이 진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실은 언어를 통해 현현되기 마련이다.
진실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사물은 사물이 아니다. 그런 사물은 언어를 만들지 못한다. 언어를 만들지 못하는 사물은 존재를 함유하지 못한다. 물론 이때의 존재는 지극하고 그윽한 무엇을 가리킨다. 지극하고 그윽한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 사물은 언어를 만들어 자신을 현현한다.
마땅히 시는 언어를 통해 현현되는 사물에 함유되어 있는 진실과 함께한다. 시와 함께하고 있는 진실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니 만큼 시의 진실은 비가시적이다. 비가시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비의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시는 가시적인 무엇이다. 가시적인 무엇인 시는 그것이 제대로 되었다면 비의적인 진실을 함유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가 가시적인 무엇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물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와 함께하는 사물은 언제나 언어를 통해 현현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사물로부터 온다. 언어를 통해 현현되는 사물은 이미지이다. 아니 이미지들이 만드는 풍경이다.
풍경은 이미지만을 자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외에도 이야기와 정서를 자질로 하는 것이 풍경이다.
이런 풍경 속에는 사물이 모여 만드는 자연이 자리해 있기 마련이다. 사물이 부분집합이라면 자연은 합집합이다. 따라서 사물로부터 시가 온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시가 온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다시 또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자연으로부터 온다. 자연은 그 자체로 풍경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도 이미지와 이야기와 정서가 함께 들어 있다. 이미지가 좀 더 자연에 가깝다면, 이야기와 정서는 좀 더 인간에 가깝다. 좀 더 자연에 가깝다는 것은 좀 더 객관적이라는 것이고, 좀 더 인간에 가깝다는 것은 좀 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것과 객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주관이라는 것과 객관이라는 것이 따로 있기는 한가. 가장 객관적인 것이 가장 주관적인 것이고, 가장 주관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이지 않은가. 이즉기(理卽氣)이고, 기즉이(氣卽理)라는 것이다. 물심일여(物心一如)와 같은 동양적 진실을 예로 들지 않아도 이는 자명하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에너지(정신)와 물질과 파동은 언제나 서로 순환한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나누고, 실천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시인 자신이다. 물론 시인 자신도 사람이다.
우선 시인은 저 자신과 마주하는 가운데 저 자신으로부터 배우고 깨닫는다. 배우고 깨닫는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안다는 것, 인식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남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남이 될 때, 곧 타자가 될 때 나는 나를 바로 인식할 수 있다. 내가 남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詩作의 첫걸음이다. 그런 뜻에서 시인에게 나는 늘 타자다
이때의 인식은 마땅히 이미지로, 풍경으로, 형상으로 존재한다. 이미지로, 풍경으로, 형상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이때의 인식은 시가 된다. 이때의 인식이 그윽하고 지극한 진실을 담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나아가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시인 자신으로부터 온다. 시인 자신이라니! 시인에게 시인 자신은 언제나 ‘나’이다.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나’로부터 온다. 시 쓰기가 나 쓰기가 되고, 시 찾기가 나 찾기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를 찾는 순간 나는 남이 되기 마련이다. 남이 될 때 비로소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된 나는 내가 아니다. 이처럼 시 쓰기가 내가 아닌 나, 곧 없는 나를 찾는 일이다.
無自己, 無自性이라고 하지 않는가. 부처님의 이런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본래 나는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나는 타자 일반, 곧 사람들 일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 사람들 일반에는 으레 내가 들어 있다.
다시 이제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사람들 일반으로부터 온다. 내가 들어 있는 사람들 일반, 이들 사람들 일반이야말로 시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사람들 일반이야말로 시가 숨어 있는 더없이 중요한 공간이고 시간이다.
사람이 아닌 사람들, 단수의 사람이 아닌 복수의 사람들……, 그들은 항상 시끄럽고, 어지럽고, 복잡하다. 순식간에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이다. 모든 사회는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기 때문이다.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인 것은 복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다. 낱낱의 사람 자체, 단수의 사람 자체도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인 사회는 깊이 시를 품을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또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사회에서 온다.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인 사회는 문제덩어리이고, 모순덩어리인 만큼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갖는다.
모든 좋은 시는 당대의 사회가 만드는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숨기고 있다. 눈 밝은 독자는 시를 통해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찾는 재미를 갖는다. 눈 밝은 시인은 시를 통해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숨기는 재미를 갖는다.
이처럼 모든 시인과, 시인이 만드는 시가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갖는 것은 모든 인간과, 인간의 문화가 근본적인 결여, 근원적인 상실을 갖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은 부정의 정신, 거부의 정신과 함께 한다. 경직되고 고착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자유의지의 산물이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이다. 이들 꿈은 본래 기존의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의지에서 비롯된다.
시인과 시는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의 꿈을 통해 한 걸음씩 역사를 진전시킨다. 이들 꿈을 통해 시가 진전시키는 역사의 보폭은 별로 크지 않다. 크지 않아도 한 걸음씩 앞으로 진전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마침내 시는 어떻게 어디서 오는가. 이제는 알 수 있다, 시가 어떻게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는 것을!
시는 언제나 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여기저기서 온다.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는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시는 문득문득 시인이라는 영매의 여린 가슴을 뚫고 저절로 온다.(제8시집 『첫눈 아침』(푸른사상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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