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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론ㅡ폭력과 광기, 혹은 사랑과 용서의 시 / 이승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3. 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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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광기, 혹은 사랑과 용서의 시

 

 

  1984년 연초에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니 28년째 시인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간 10권의 시집을 냈으니 지나치게 많이 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들은 보통 4~5년에 1권 시집을 내는 데 반해 저는 3년 만에 1권씩 냈으니 말입니다. (‘과작’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나라에서 시집을 많이 낸 것은 결코 환영받을 일이 아닙니다.)

 

  1998년에 전통지향의 시를 모아 시선집 『젊은 별에게』(좋은날)를, 2009년에 실험정신의 시를 모아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문학의전당)을 펴냈습니다. 등단 15년과 25년을 즈음하여 앞서 낸 시집을 모아놓고 총정리를 해보았다고 할까요, 스스로 매듭을 짓고자 새 출발을 두 번 해보았습니다. 그간 창작시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2권, 세계사에서 2권을 펴냈고, 나남출판사ㆍ고려원ㆍ시와시학사ㆍ문학사상사ㆍ시학ㆍ서정시학에서 1권씩 펴내 10권에 이르러 있습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등단작 「화가 뭉크와 함께」(블랙박스 간, 태성 간)와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나오는 「이 사진 앞에서」(교학사 간)가 실려 있어서 그런지 후배 고교 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이 이 두 시에 관하여 간혹 질문을 해옵니다. 두 편의 시에 대해 이 기회에 설명을 하면서 나 자신의 시에 대한 생각을 여러분께 말씀드릴까 합니다.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화가 뭉크와 함께」 전문(중앙일보, 1984. 1. 1)

 

  1983년에 쓴 이 시는 말을 꽤 심하게 더듬고 있던 저의 육성이었습니다. 집안에 문제가 좀 있어 1975년에 입학한 김천고등학교를 재학 2개월 만에 그만두고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여 1979년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는데 문학을 평생 할 자신도 없었고 몸도 영 안 좋아 휴학을 하는 바람에 1980년이 되어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5년 동안 학원에도 안 다니고 독학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였기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섯 살 위의 형과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이 대화 상대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말더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급우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얼굴이 빨갛게 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말까지 마구 더듬어 그날은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밤에 악몽을 꾸었지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면 아침이 될 때까지 잠이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이 시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과 보트 피플, 그리고 ‘고문정국’이라고 일컬어진 1980년대적 상황이 그것입니다.

 

  4학년 때 수강한 이나경 교수님의 ‘서양미술사’ 시간에 슬라이드 필름 화면으로 처음 본 그림 「절규」를 비롯한 뭉크의 일련의 그림은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림이란 우아미와 숭고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제게 이나경 교수는, 아니 뭉크는 추의 미, 죽음의 색조, 비극의 현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시에서 아픔과 슬픔을, 비천함과 비참함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란 대개 희망적인 것을 이야기하거나 희망을 추구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당선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뭉크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말한 바 있으므로 몇 줄 옮겨봅니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동생 라우나가, 열네 살에는 식구 중 가장 좋아했던 누나 소피에가 같은 병으로 죽어 뭉크는 폐질환에 대한 공포 속에서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연보에 의하면 뭉크는 어린 시절에 기관지염으로 세 번이나 입원해야 했으며, 2남 3녀의 형제 중 나머지 두 명도 일찍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자신 “나의 일생은 나의 건강과의 싸움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아 비극적인 제재를 반복해서 그렸을 것이다.

 

  비극적인 집안 환경에 대한 응시를 저는 뭉크한테서 배웠던 것입니다. 뭉크는 화폭에 가계의 비극을 옮겨놓았지만 저는 세계의 비극적인 상황을 시로 형상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트 피플(boat people)은 뭐냐 하면, 1975년 월남의 패망을 전후하여 해로를 통하여 탈출한 베트남의 난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월맹군의 공세가 치열해지자 많은 난민이 국외로 탈출하였고, 사이공 함락과 함께 월남의 군인이나 월남 정권의 협력자와 그 가족들이 난민이 되어 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성립 후에도 난민의 해외 탈출이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보트나 어선으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아 ‘보트 피플’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그 후 1979년 베트남-캄보디아전쟁, 중월전쟁의 영향과 공산화가 된 베트남의 국내 사정으로 난민의 수는 더욱 늘어나, 인도적인 견지에서 보트 피플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배 한 척에 일가나 몇 집의 식구가 타고 가는데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몰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인접국으로부터의 강제 추방이나 상륙 거부로 인한 참상이 전해지자 ‘바다의 아우슈비츠’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선 이후 베트남이 자본주의 시장으로 전환함에 따라 국내 사정이 좋아져 외국에 정착한 보트 피플 출신이 다시 베트남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바다에서 또 보트 피플이 뒤집혀 타고 있던 사람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을 장식할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제 등단작에 ‘보트 피플’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시에 ‘치욕적인 광경’이니 ‘자백’이니 ‘부인’이니 하는 시어가 등장하게 된 것은 제3공화국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분이어서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이런 대통령이 다시 나와야 나라가 산다는 말씀을 한참 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을, 저렇게까지 심하게 괴롭혀도 되느냐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반드시 언론에 보도되는 간첩단 사건도 이상하게 여겨졌고 인혁당사건 같은 것도 의문투성이여서 아무리 경제발전이 중요하지만 인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이 된 저로서는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아버지만큼 우러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의 일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1982년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경남 의령 경찰관 총기난사 사건(62명 사망)이 있었고, 1983년에 소련 상공 KAL기 격추 사건(269명 사망)과 미얀마 랭군 아웅 산 폭파 사건(17명 사망)이 있었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수한 학살극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눈감고 있을 수 없었고, 어디에선가 또 누군가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수산 필화 사건의 소문을 듣고 있어서 저는 고문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가졌던 것이고, 그래서 화가 뭉크와 보트 피플과 공안정국의 인권탄압을 묶어 한 편의 시로 써보았던 것입니다.

 

  저의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에는 등단작의 계열에 들어갈 수 있는 시편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저 철조망이

저주스러웠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음을

한참 지나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

 

맑은 창공, 조각구름이 흐르던 날

생각하였다 죽음은 단지 사라짐인가

내가 내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감시탑 뒤로 우두커니 서 있는

세계의 하반신이 불타고 있었다

 

엎드려! 서치라이트를 피해

긴 어둠의 끝으로 기어가며

내내 울었다 그때 발뒤축마다에

숨쉬며 따르는 별이 있었다

의당 사랑해야 할 여러 개의 추상명사가

아주 가까운 데서 반짝였다

 

개 짖는 소리 일순 당겨진

살처럼 긴장한다 들키면 마지막이야

내가 정작 우리가 되었을 때

우리라는 집단은 잠들지 못한다

어느 한때 나는 안 적이 있었던가

시치미를 떼고, 서로의 팔뚝에 놓던 모르핀을

 

잠시 회상하였다 어린 시절의 놀이터와

즐겨 부르던 노래 몇 소절을

갑작스런 섬광, 나의 눈에는

영원토록 흐를 강이 비쳤다 그래도

자유의 이름으로 고뇌할 수 없는

소리 없는 몸부림과 무수한 철조망들.

 

―「안과 밖」 전문

 

  이런 시를 쓰게 된 데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저의 독서체험의 영향이 컸습니다. 예전에 썼던 산문 「젊은 날의 독서 체험」의 일부를 다시 적습니다.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하는 헐벗은 군상의 드라마에 감동하였고, 그것은 내게 구원의 빛을 비춰주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마에아 시게루의 『살아 있는 송장』의 공통점은 교도소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콩밥이나마 세 끼의 밥이 꼬박꼬박 나오는 교도소가 아니라 시베리아 유형지의 바라크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실화(實話)를 나는 가슴 조이며 읽었다. 지옥도를 보는 듯한 『죽음의 집의 기록』의 목욕탕 장면이나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엄청나게 많은 고문의 실례는 나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반추하게 해주었다. 오직 생존 하나를 위해 발버둥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졸시 「안과 밖」은 이런 소설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벽’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소리 죽인 울음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이런 책 외에 제가 읽은 최고의 소설 중에는 캔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가 있고 최고의 영화로는 <대탈주>와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제가 포로수용소나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책을 즐겨 읽게 된 데는 몇 차례의 가출과 불면증 치료차 다닌 몇 군데 병원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폭력과 광기의 나날』 등 일련의 시집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끔찍한 폭력과, 그 폭력이 야기한 광기를 소재로 하여 시로 썼습니다. 불면의 밤마다 끙끙 앓으며 쓴 시인지라 거칠기 짝이 없었고, 문학평론가나 독자들의 환영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해체시는 이미 운명을 다하였고, 신서정 시인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90년대에 저는 욥의 수난과 폭력과 광기에 대해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시대에 맞지 않는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세계 곳곳에서 분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고, 제 시적 관심사는 진ㆍ선ㆍ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폭력과 광기에 대한 의문과 해답 찾기였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고등학생들이 푸는 시험문제에 자주 나온다는 시는 아래에 있습니다.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TIME』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 사진 앞에서」 전문

 

  1992년 한 해 동안 『TIME』지에 실린 모든 사진 중에서 연말에 그해의 대표 이미지 사진으로 선정되어 두 면에 걸쳐 크게 확대되어 다시 실린 사진입니다. 배짝 마른 아프리카의 흑인아이가 힘이 없어서 일어나지도 못해 어른이 일으켜주려고 하는데, 자세히 보십시오. 아이의 모습이 마치 불자가 오체투지로 절하는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지구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살이 너무 쪄 지방제거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값비싼 안주로 술을 마시다 귀갓길에 주택가 골목길에서 오바이트를 합니다. 저의 최소한의 양심이 이런 시를 쓰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 못 먹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닐까요?

 

  폭력과 광기에 대한 저의 관심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조금 바뀌었습니다. 타인과의 유대와 타인에 대한 사랑, 용서와 화해를 꿈꾸게 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2001년, 『뼈아픈 별을 찾아서』라는 시집에서 아버지를 향해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감히 말했습니다. 시집 머리말에 이 시집을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하고선 이런 시를 올려놓았습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던진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실험정신에서 서정성으로의 회귀를 인정해준 몇 분이 이 시집에 제2회 ‘지훈상’의 영광을 얹어주었습니다. 저는 생태환경의 오염과 생명체의 대량살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서 『생명에서 물건으로』와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란 시집을 냈습니다. 그리고 첫 시집 『사랑의 탐구』와 다섯 번째 시집 『박수를 찾아서』와 시선집 『젊은 별에게』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집을 2007년에 냈는데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였습니다. 이 시집은 뜻밖에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더니 김남조ㆍ고은ㆍ김재홍ㆍ이가림ㆍ유자효 선생이 심사하여 시와시학상 작품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뜻밖이었지요. 전통문화에 대한 재해석이 시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회의하며 펴낸 시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옛날의 광대와 구도자와 노래와 예인을, 지금 이 시대의 광대와 구도자와 노래와 예인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형상화해 보았던 것입니다. 광대는 백수광부ㆍ백결ㆍ처용과 붉은 악마ㆍ서동ㆍ원효ㆍ하보경ㆍ김명환ㆍ김봉열ㆍ신기남ㆍ차진용ㆍ동춘서커스단ㆍ공옥진ㆍ추송웅ㆍ김광진ㆍ이외수ㆍ유봉과 송화ㆍ이영유ㆍ황우석ㆍ공길이와 장생ㆍ김형곤입니다.

 

  구도자는 운암과 지상ㆍ노힐부득과 달달박박ㆍ엄장과 광덕ㆍ한산자와 습득ㆍ초의선사와 추사ㆍ혜초ㆍ성철ㆍ청화ㆍ수경ㆍ지율입니다. 노래는 황조가ㆍ구지가ㆍ공무도하가ㆍ선운산가ㆍ치술령곡ㆍ혜성가ㆍ풍요ㆍ도솔가ㆍ제광매가ㆍ안민가ㆍ우적가ㆍ처용가ㆍ가시리ㆍ서경별곡ㆍ예성강곡 전편ㆍ정선아라리ㆍ망부가ㆍ이화중선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예인은 박수무당 김석출ㆍ사물놀이패 김용배ㆍ별신굿 김유선ㆍ병신춤 임순이ㆍ도살풀이 김숙자ㆍ발탈 이동안ㆍ남사당패입니다. 이들 가운데 두 번째 광대 백결의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말이 영 말 같지 않고

노래가 도무지 노래로 나오지 않을 때

백 번을 기운 누더기옷 입었다고 붙여진 이름

백결이여

무엇을 바라 금(琴)을 탔는가

누구를 위해 악(樂)을 만들었는가

세상에는 지금 음(音)이 없다

음(音)이 없는데 어찌 시(詩)가 나오랴

 

영해박씨 족보에 나온다는 백결이여

죽고 사는 것이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일이라고?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서라, 한 곡조 또 한 곡조로

방아 찧고 절구 빻아

풍성한 새해 상을 차렸다는 백결이여

음(音)을 갖고 악(樂)을 만들었으니

세상 꽉 채운 것이 음악이로구나

 

광대여, 거문고 끌어안고서

아픈 이 세상 크게 울게 하라

배고프고 목마른 저마다의 생애

음악으로 제대로 한번 위로도 해보고

서럽지 않게……마음이라도 옹골차게

 

―「광대를 찾아서 2—백결」 전문

 

  이 시는 우리 조상 중 대표적인 광대로 백결로 설정, 백결의 업적을 높이 기린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시에서 음악성이 무시되거나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아서 쓴 것입니다. 온고이지신의 정신에 입각하여 쓴 이런 시에서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은 신기한 것에 호기심을 갖거나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자기 세대의 어법을 좋아하니까요.

 

  저의 제10시집은 중국 서북부 실크로드 일대를 여행하고 온 이후 꼬박 10년에 걸쳐 쓴 61편의 시를 모은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입니다. 이 시집은 한 번의 여행을 화두로 하여 10년에 걸쳐 길을 걸어가며, ‘길’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쓴 시입니다. 저는 운전학원에 아직 한 번도 가보질 않아서 운전면허증이 없습니다. 오로지 버스와 전동열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자연히 길을 많이 걷게 되고, 주로 차 속에서 시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혜초가 4년에 걸쳐 도보로 걸어갔던 그 길,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대 40개국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읽으며 저는 「혜초의 길」 연작시 61편을 썼습니다.

 

많이 걷게 될 것이다 후세 사람들아

걷다 보면 성년 되고

걷다 보면 노년 되고

네가 걸음 멈추면

밤하늘의 별들도 운행 멈출 것이다

우리 어차피 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마음의 집 한 채 여기서 또다시 허물고

 

―「길의 아들—혜초의 길 5」 중에서

 

부처는 스물아홉에 집을 떠났네

집 떠나야 길이 열리고

사람 만나야 사람 만들 수 있고

길 떠나야 사람 사귈 수 있는 것

 

산과 산이 모여 산맥이 되는 이치나

모래와 모래가 모여 사막이 되는 이치가 어찌 다를까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마을 이루고

집과 집이 모여 도시 이루는 것을

물과 물이 모여 강이 되듯이

별과 별이 모여 밤하늘이 되듯이

 

―「떠나는 자, 머무는 자—혜초의 길 18」 중에서

 

오천축국 가보고 알았겠지

부처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깨닫고

길에서 죽었다는 것을

부처에게 길은 집이고 도량이고

병원 영안실이었다는 것을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혜초의 길 26」 중에서

 

  제가 지금까지 냈던 10권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사랑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 저의 시는 폭력과 광기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랑과 용서의 과정도 거쳤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광대와 구도자를 만났고 혜초를 만났습니다. 자료를 통해 만나기도 하고 연희의 장소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울며 웃으며 만났던 그들과의 만남이 저를 시를 살찌웠기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가 내 몸과 영혼에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열한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혜초의 길이 제10시집을 이루었으니 제11시집은 통곡의 벽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통곡의 벽에 대한 설명을 부기하며 저의 시론 정리는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 같은 비극을 지켜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아아 저는 여전히, 인간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관심의 시선을 거둬들일 수 없습니다. 공포와 전율이 없는 세상, 사랑이 충만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오늘도 저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거칠고 차가운 시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지양의 대상일 따름, 제가 바라는 세상은 정이 넘쳐나는 따뜻한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