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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Ⅲ | 현대시조 감상 ① 이병기, 이은상 / 홍성란 | ||||||||||||||||
이병기·이은상의 ‘노래가 된 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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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가람시조집》 (1939) 발문에서 가람은 시조를 사적(史的)으로 추구한 이, 이론으로 분석한 이, 비평의 기준을 세운 정령한 주석가라 했습니다. 시조를 계몽적으로 보급시킨 이가 또한 가람이요, 시조학이 설 수 있는 것도 가람에서부터라 했습니다. 가람은 확호(確乎)한 어학적 토대와 고가요(古歌謠)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시조를 쓰되 그 전통에서 출발하여 전통과 결별하고 다시 시류에 초월한 시조 중흥의 영예로운 위치에 섰다 했습니다. 가람이 남긴 업적을 몇 가지만 쉽게 든다면, 서지학자로서 《한중록》·《인현왕후전》·《역대시조선》·《의유당일기》·《근조내간선(近朝內簡選)》·《어우야담》·《가루지기타령》 등 귀중한 고전문학 작품을 발굴 소개하여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백철과 함께 《국문학전사》를 집필하고 《국문학개론》을 펴내 국문학의 과학적 체계화에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다 시인으로서 관념적 이론 추수에 머물지 않고 〈시조는 혁신하자〉 (1932)는 글을 통해 현대적 참신성과 사실성을 갖춘 시풍으로 일신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 결정체가 바로 《가람시조집》입니다. 때를 같이 하여 가람은 《문장》지의 시조 신인작품 추천위원으로서 김상옥·조남령·오신혜·이호우·장응두와 같은 걸출한 시인들을 배출하였으니 마땅히 현대시조의 아버지요, 대들보로서 서까래를 깊이 드리운 거장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면모를 알아 김수영은 예술의 힘으로 커진 사람은 인간으로도 큰사람이 된다는 표본 같은 이가 가람이라 했습니다. 그는 가람이 소장한 민족설화 같은 자료들이 한없이 탐난다면서 가람은 대우(大愚)를 아는 사람이요, 고도의 겸손을 가지고 있으되 청춘과 인생을 가졌으니 과연 가람이라고 1955년 2월 2일의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시여 침을 뱉어라》). 널리 알려진 대로 가람은 뇌일혈로 쓰러진 뒤에도 거리낌 없이 매일 두 홉씩의 술을 다섯 차례나 들고, 영양가야 밥보다 술이 낫다며 당신의 병은 술과 관계없다 했답니다. 그토록 술을 좋아하면서 담배는 피우지 않았는데 까닭은 손수 키우는 20여 종 30여 분(盆)이 넘는 난초 때문이었습니다. 난초는 술 향기는 좋아하되 담배 연기는 아주 싫어한답니다. 이런 난초가 병들면 이웃에서도 난분을 가람에게 가져와 다시 살려가곤 했는데 그래서 가람 댁을 난초병원이라 했답니다(최승범, 《스승 가람 이병기》). 최승범 시인은 전북대 문리대 제1회 국문과 학생으로 가람을 모셨는데, 그때 가람은 짙은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학교에 나왔답니다. 가람이 이렇게 민요 같은 우리 가요 전반에 대해 조예가 깊어진 것은 한성사범학교 시절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1910)를 들은 뒤입니다. 그는 주시경의 영향으로 우리말 우리글 연구에 뜻을 세우고 교사가 된 뒤 박봉을 쪼개어 고서적을 수집 연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고가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그런 까닭으로, 시조는 정형시이지만 꼭 한정된 자수가 아니고 몇몇 자를 가감하여 쓸 수 있는 너그럽고 자유로운 형식(3장 8구체)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시조가 우리말의 자연스런 발화를 바탕으로, 네 마디씩 3장으로 풀고 맺는 자율적 정형시라는 점을 인식한 것 아닐까 합니다. 그리하여 가람 시조는 노래시로서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평시조에서 짧은 호흡의 어휘 반복은 무겁지 않은 리듬을 만들고, 구 단위 또는 장 단위의 반복은 의미 심화와 아울러 유려한 노래가 되게 합니다. 시인의 기질에 따라 나타나는 친숙한 구어체 사용과 어미 변화와 토씨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해조를 이루는 데 기여합니다. 이 모든 시조 작법은 가람 시조가 노래시로서 작동하게 합니다. 〈별〉은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한국적 리리시즘을 재현(신석정)”한 가람의 전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당시 풍토에서 서정을 이만큼 원숙하고 유려하게 펼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놀랍습니다. “서늘도 하여”의 ‘도’나 “나오드라”의 ‘드’라든가 “~게오”와 “호올로” 종장에서 취한 종결어미 ‘~라’와 같은 조어법은 시를 감칠맛 나게 합니다. 지구라는 땅덩어리에 사는 인간들은 전쟁으로 귀중한 생명을 앗고 앗기지만 정작 초개 같은 냉이꽃 한 잎에게도 목숨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2차대전과 6·25전쟁을 겪고 난 뒤 가람의 시조에는 예리하고도 거침없는 세태 풍자와 사회참여적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 시조의 조어법을 살펴보면 첫째 수의 “~이면 ~야 하겠고”라는 대구(對句)를 초장과 중장에서 반복하면서 각 장의 끝마디에서 ‘고’를 중첩하고 있습니다. 둘째 수에서는 “지난 봄 진달래”와 “지난여름 꾀꼬리”라는 유비 상동 관계를 중첩하면서 의미를 심화시키는데 역시 각 장의 끝마디에 ‘가’를 중첩하여 음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과 해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람의 후기 시조에 대해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정한 모습은 물러가고 정이 격한 구호가 난무한다거나, 고조를 배웠으되 아직 그 진묘를 몸으로 얻기 전에 먼저 자기의 시조를 선입관념으로 형성하여 버린 듯하다고 했습니다. 또 신시의 영향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시조의 역사성과 시조의 정형시적 가치를 무시한 공연한 공로를 쌓은 것이라고까지 폄훼(貶毁)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승범 시인은 후기의 조박(糟粕)하다는 작품도 “어떠한 경지에 머물지 않은 가람 시조의 진경(進境)”이라 했습니다. 과연 가람은 시조 형식 안에서 대자유를 누린 시인입니다.
최근 김복근 시인은 그의 《노산시조론》에서 노산의 친일논란의 부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북한 학자 우연오의 논문 〈반일, 애국, 광복의 리념을 안겨준 계몽기 서정가요〉를 소개했습니다. 우연오의 논문은 계몽기 서정가요의 대표적 작품 10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4편이 노산의 〈사우〉, 〈그리움〉,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라는 것입니다. 우연오는 이 노래들이 은유적 수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일제의 검열과 감시를 피하려 한 작품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람이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임종국)”인 것처럼 노산 또한 반일 애국 광복의 염원을 은유적인 방법으로 노래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운 시인입니다. 민족을 노래하고 조국을 노래한 시인이 또한 노산임을 양주동은 〈교단 삼십년〉의 ‘우정록’에 적고 있습니다. 그 방대한 조국의 역사와 민족의 울분과 생활을 현대인의 깊은 사상으로 표현한 시인은 이 땅에 일찍이 없었으며, 노산 시조의 길고 짧은 호흡은 한국인의 생활 단면을 표출시킨 시 정신으로 줄줄 흘러가는 물결 같은 언어의 짜임새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 했습니다. 그 줄줄 흘러가는 물결 같은 언어의 짜임새가 바로 노래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산의 시조만큼 곡에 올려져 우리의 심금을 울린 예는 없을 것입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으로 시작하는 〈사우〉가 박태준 곡으로 불린 것이 1922년. “내 고향 남쪽 바다~ ” 〈가고파〉가 김동진 곡으로 불린 것이 1932년.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봄처녀〉, 〈금강에 살으리랏다〉가 홍난파 곡으로 불리는 등 《조선가요집》(1933)에는 노산 시조 15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박을수, 《한국시조문학전사》). 노산은 〈성불사의 밤〉을 부를 때는 고요히 눈을 감고 조용한 목소리로 불러 주었으면 좋으련만 술자리에서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들겨 가며 목청껏 불러대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더라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노산의 시조가 우리의 정서와 감성에 얼마나 잘 맞고 있는지를 실증해 주는 것(오세영)이며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말이겠습니다. 노산 시조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람의 시조가 그런 것처럼 현대적 소재를 평이한 일상어(구어체)로 쉽게 풀어 시조의 자재한 리듬에 잘 얹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노산은 시조를 가리켜 “정형이비정형(定型而非定型), 비정형이정형(非定型而定型)”이라 했고 가람은 정형시(整形詩)라 했는데 이것은 모두 시조의 형식이 가지는 탄력성(이근배)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조는 조윤제가 논구한 바 3·4·3·4 3·4·3·4 3·5·4·3 글자 수나 맞추는 시형은 아닙니다. 이는 시조를 공부할 때 유용한 준거 틀이 되는 소중한 자산임은 분명하나, 이 통계 수치로 시조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시조는 3장 6구 12마디의 정형률 안에서 편편이 자율적으로 리듬을 생성해내야 하는 자율적 정형시입니다. 글자 수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말의 흐름, 네 마디의 가락을 탄다는 것입니다(종장 구조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랬을 때 편편이 아름답고 유의미한 현대시조가 되는 것입니다. 피천득은 이 시조를 두고 애수적(哀愁的)이면서도 밝고 맑고 아름다운 빛이 시조 장장(章章)에 넘친다 했습니다. 짧으나 여운이 넘쳐흐르고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고금을 통하여 봄을 읊은 노래가 몇 천 수 몇 만 수요, 사랑을 노래한 시가 많을지나 이 한 수같이 가슴에 애끊는 정을 쏟게 하는 글이 또 어디 있겠냐 했습니다. 짧으나 여운이 넘쳐흐르는 것은 시인이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참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지 않고 참은 말을 독자는 상상하며 음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천득은 또 저 유명한 〈가고파〉를 해설하면서 ‘그’라는 지시대명사가 11번이나 반복되는 현상을 두고 “그”라는 음(音)을 낼 때 시인이 말하는 물과 바다와 새를 완연히 본다 했습니다. 영시에 여수(旅愁)를 읊은 〈The south Country〉가 비평가들에게 칭송되지만 〈가고파〉에 비길 것이 못 된다 했습니다. 왜 그럴까. 이 작품은 크게 두 개의 의미 단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수에서는 “두 마리 새”를 매개로 끝없이 함께 날고자 하며 3, 4수에서는 “두 조각 배”를 매개로 가없는 바다를 함께 흘러가고자 하는 연모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A B C D E F와 A’ B’ C’ D’ E’ F’는 “두 마리 새”와 “두 조각 배”를 매개로 반복되는 유사한 패턴입니다. 유사한 패턴의 변화 반복은 연모의 정감을 심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변화 반복과 함께 노산이 선택한 조어법이 심화되는 연모의 감정을 유려하게 풀어가며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d의 경우 또한 음 지속량을 늘리려는 첩어 활용이라기보다 유연한 리듬 생성을 위한 조어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해서 〈새가 되어 배가 되어〉는 연모의 정감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D E와 D' E'에서 2음절과 1음절이라는 퍽 적은 음량을 썼습니다. 시조 한 마디 안에 음량은 음절로 치자면 4음절에 해당하는 4mora인데 여기서는 2음절과 1음절을 썼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장음 정음과 같은 음운 자질이 한 마디 안의 음량을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저 황진이의 시조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에서 첫 마디가 “어져”라는 2음절 감탄사로 채워진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예시한 작품 외에도 우리는 노산의 시조를 읽을 때 ‘까닭 없는 감상, 원인을 알 수 없는 애수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노산 시조의 이런 특징을 지적하여 김용직은 “한국적 낭만주의의 속성이 쉽게 잡힌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삼라만상을 애틋하게 여기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산은 세 가지 원이 있다 했습니다. 첫째는 국토산수를 두루 밟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해 보고 싶은 것이요, 둘째는 거기에 실려 있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두루 뒤져 발양(發揚)해 보고 싶은 것이요, 셋째는 방방곡곡에서 이 민족과 이 문화를 이끌어 나간 모든 고람(古覽)을 숭모함과 아울러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도 고상한 지조를 지켜 구국행(救國行)을 짓고 있는 모든 동지들 앞에 경례해 보고 싶은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나라와 민족과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나올 수 없는 발원입니다. 노산의 〈오륙도〉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륙도! 얼마나 소박한 이름이냐. 깨끗한 이름이냐. 내가 우리나라 지명 중에서 사랑하는 이름이다 ……. 자연 그대로를 가장 솔직하게, 그저 봉우리가 대여섯 개 되는 섬이라고 부른 것이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그렇습니다. 시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연스럽게 솔직하게 깨끗하고 쉬운 우리말로 구순하게 풀어가는 시가 좋은 시 아닌가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읊조린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노산과 무애 양주동은 일본 동경 유학 시절 같은 방에 기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 노산은 무애에게 시고(詩稿)를 보여 주며 평을 청하곤 했답니다. 그 시조들을 보며 “시조의 묘체는 오로지 ‘토’에 있다.”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던 말을 했더니 노산이 “아무렴!” 하며 맞장구를 쳤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시에서 조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줍니다. 시어 선택과 조사 및 어미 활용에 세심한 배려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양주동은 《노산시조집》에 〈제사(題詞) 5수〉를 헌정하였습니다. 양주동은 시조에 갖가지 투(套)와 체(體)와 격(格)과 풍(風)이 있는데 육당, 담원, 가람 같은 이들이 한 특질만을 가진 데 비해 노산은 여러 체를 두루 갖춘 ‘늠실 바다’라 했습니다. 늠실 바다……. ‘늠실늠실’이라는 부사는 물결 따위가 부드럽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 또는 속에 엉큼한 마음이 있어 슬몃슬몃 넘겨다보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늠실 바다’는 물결 일렁이는 듯한 유려한 시어 구사와 늠실늠실 자아올렸다 풀어내렸다 자아올리는 듯한 조어법과 여기서 비롯하는 노산의 리듬 감각을 비유한 말 아닌가 합니다. 시선(詩仙)의 경지를 슬몃슬몃 넘겨다보는 노산의 언어 감각을 비유한 말 아닌가 합니다. 지금까지 가람과 노산의 시조 세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와 민족·민족어를 귀중히 받들어 일평생 갈고 닦아 잘 갈무리해 온 두 거장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조 3장은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발화를 네 마디씩 탄력적으로 이어가는 자율적 정형시로서 자수율이라는 글자 수에 매이지 않고 있다는 점, 현대적 소재를 평이한 생활 언어(구어체)로 풀어내어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어휘적 반복이나 구절의 변화반복, 어미와 조사 활용 등 이음새 처리에 능란한 조어법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과 함께, 두 거장의 이러한 작시법은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가락의 노래가 되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시조는 처음부터 노래시라는 것입니다.
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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