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재미, 선명의 미학
백우선(동시인)
작품의 내용이, 대상으로 하는 사물의 이치에 맞아야 진정성을 갖게 되고 진정성이 있어야 공감이나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사물의 이치에만 너무 사로잡히면 상식이나 과학적 사실의 전달에 머물고 말 수도 있다. 사물의 바른 이치를 바탕으로 하되 개연성이 있는 시적 변용과 상상력의 가미가 그래서 함께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기준으로 하여 지난 겨울호 여섯 가지 문예지의 작품들을 읽은 결과, 단순하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지닌 작품 셋과 재미있는 발상과 극화가 돋보이는 작품 셋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작품 중 전자의 작품 세계는 좀 싱거운 듯하지만,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단순미는 곧 여백이나 함축의 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사물에서 새롭게 파악된 핵심이나 본질을 통한, 멀고 넓고 오래 번져가는 울림의 공유는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잔잔히 누리게 해준다. 넓은 폐사지에 고즈넉이 서 있는 한 채의 아담한 사리탑에서 느낄 수 있는 ‘텅 빈 충만’과 같은 행복감을 맛보게도 해 준다. 그런가 하면 재미가 돋보이는 후자의 작품들은 감칠맛이 있다. 독자를 즐겁게 끌어당겨서는 오래 또는 자주 함께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독자들은 작품의 자양을 알게 모르게 자기 것으로 더 잘 받아들이게 되는 효과도 갖게 될 것이다.
내용이 단순한 작품들은 역시 단순한 표현에서, 재미있는 작품들은 극적인 형상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듬어져 있다. 대상의 모습이나 광경이 구체적이며 간단, 명료하다. 이들 여섯 편의 작품을 함께 찬찬히 음미해 보고자 한다.
하늘의 별 따기/정말 힘들다고/사람들은 말하지만//별을 좋아하는/내 동생 민지는//시간 날 때마다/빨강 별, 파랑 별/노랑 별을//도화지에/몇 개씩/잘도 따다 놓는다.
—김자연, ‘하늘의 별 따기’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
하늘의 별을 따기는 힘듦을 넘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인 민지는 말 그대로의 ‘별 따기’ 대신 ‘별 그리기’를 통해 별을 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별들을 도화지에 따다 놓는다. 실제의 별들은 한 가지 빛으로 보이지만, 민지는 여러 가지 빛깔의 별들로 따다 놓는다. 빨강, 파랑, 노랑 빛깔의 별들만이 아니라 갖가지 빛깔의 별들을 민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화지에 따다 놓을 것이다. ‘별 따기’의 새롭고 어린이다운 방법의 선택, 별빛의 다양화가 이 작품의 세계를 아름답게 해준다. 주인공 어린이가 자기의 꿈을 실현해 나아가는 생각과 행동에 아무 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다. 글의 흐름도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독자들도 민지와 함께 따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하늘의 별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갖가지 빛깔로 물들이면서 따 모으는 행복을 누리게 해 준다.
전봇대에 기댄/우산//손잡이로/물음표 그리고 있다//집을까 말까/망설이다 그냥 왔다//네가 주인이니?/묻는 것 같아
—김금래, ‘물음표’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
전봇대에 길게 기대어져 있는 우산을 보았다. 손잡이가 물음표 모양이다. 누군가가 버린 우산인지 잠시 그곳에 놓아둔 우산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쓸 만한 우산이다. 집어 들고 올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두고 왔다. 물음표 모양으로 생긴 우산 손잡이가 마치 네가 주인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주인이 아닌 화자는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우산 손잡이를 물음표로 본 것, 그 물음표의 물음에 양심적으로 반응한 것이 이 작품의 문학적 요소이다.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을 그 주인의 허락도 없이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행동지침을 담고 있다. 윤동주 시인이 괴로워했던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아주 작은 잘못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성을 띤 작품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소박한 상식의 실천이지만, 오늘날 크고 많고 무서운 잘못이 너무 자주, 많은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의 전언은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초겨울/나뭇잎 한 개를/주워 온 바람//길가 토끼풀꽃을/가만히 덮어 주었다.//-아이 따뜻해/-아이 따뜻해.
—노원호, ‘바람’ 전문. <시와 동화> 겨울호
노원호 시인은 ‘여운을 남기는 짧은 동시’를 지난해 “시와 동화”에 계절마다 10편씩 모두 40편을 발표했으며, 그 작품 뒤에마다 덧붙인 ‘시인의 말’에서는 동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밝혀 놓았다. 그 생각들 가운데 ‘짧은 동시’는 10행 미만의 길이와 생략, 정제, 압축, 여운, 엑기스 등의 특성을 가진 동시로 규정돼 있다. 오늘날 그렇지 못한 동시들에 대한 대안을 작품과 시론을 통해 보여준 셈이며, 철학적인 사유, 현실과 환상의 접목 등의 필요성도 언급해 놓았다.
위 작품의 주인공은 사람이 된 바람이다. 자연 현상과는 달리 마음이 따뜻한 바람이다. 날씨가 쌀쌀해진 초겨울, 아직 겨우살이 채비를 제대로 못 갖춘 누군가를 위해 나뭇잎 하나를 주워 와서는 길가 토끼풀꽃을 가만히 덮어 준다. 생색을 내는 일이란 없다. 나뭇잎을 담요처럼 덮은 토끼풀꽃은 ‘아이 따뜻해’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가만히 덮어 주는 바람의 행동과 따뜻해하는 나뭇잎의 말에는 그들이 다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한 배려와 감사가 함축돼 있다. 속마음을 겉으로 다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의 교감은 더욱 은근하고 깊어지며, 독자들의 심금은 오래 울린다. 첫 연 시어들의 [ㅊ,ㄱ,ㅎ], [ㅗ,ㅏ], [ㄹ](설측음 종성) 등의 안배에 의한 소릿결의 조화, 둘째 연의 동일 어구 반복이 잔잔하면서도 밝은 리듬으로 다가온다. 첫 연의 침묵에 이은 둘째 연의 발성 배치도 짜임새의 균형 효과를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지은이가 추구하는 단형 동시에 대한 지향이 잘 구현돼 있다.
배고픈 저수지//물수제비가 날아오자/밥! 밥! 하며, 입을 벌린다.//뽈,/뽈,/뽈,//받아먹으려는 입들/차례로 지나//쪽—/입 맞추는/입술 속으로/쏙, 들어간다.
—최진, ‘물수제비’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
좀 얇고 넓적하며 조그마한 돌로 물수제비를 뜬다. 수면에 거의 수평으로 힘껏 던진 돌이 물에 닿았다 튀어 오르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물속으로 빠져 드는 놀이를 새롭고 재미있게 극화했다. 수제비를 밥과 연결 짓고, 저수지를 배고프며 의인화된 물고기들로 표현했다. 물수제비를 날리면 배고픈 물고기들인 저수지는 ‘밥! 밥!’ 하며, 입을 벌린다. 받아먹으려고 ‘뽈, 뽈, 뽈’ 입을 벌리고 솟아오르지만, 물수제비는 그 입들을 그냥 지나가 버린다. 배고픈 저수지를 ‘밥’으로 심하게 곯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약을 올리는 놀이처럼 함께 즐거워한다. 돌에 부딪혀 튀어 오른 물을, 수제비를 받아먹으려고 솟구치며 입을 벌린 물고기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물수제비뜬 돌이 마지막 ‘쪽—’ 입 맞춰 주는 물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간다는 형상화도 선명하고 재미있다. 아마 이 저수지에서의 물수제비뜨기는 저수지의 배가 고프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기린이/밥을 먹으면//밥들이/미끄럼을 탈거야/긴/미/끄/럼/틀//꿀떡//밥들이/엉덩이 아프겠다./긴/미/끄/럼/틀//쿵덕.
—안영선, ‘기린’ 전문. <시와 동화> 겨울호
위 작품은 기린의 긴 목에 주목한 점은 기존의 딴 작품들과 동일하지만, 밥을 의인화하고 식도를 긴 미끄럼틀의 실제 모양처럼 형상화하면서 밥이 목으로 넘겨져 위(胃)를 향해 내려가고 위(胃)에 닿기까지의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점이 새로우며 구체적이고 재미있다. 기린이 밥을 먹기 시작한다. 기린이 먹이를 입에서 잘 씹고 나면, 이제는 주인공인 밥이 미끄럼을 탈 차례다. 어린이와 같은 밥은 저 아래에 보이는 위(胃)를 내려다본다. 식도가 길고 비스듬해서 미끄럼틀과 같다. 1음절씩 1행으로 배열해서 시형 자체가 실제 미끄럼틀처럼 길게 보인다. 기린이 밥을 ‘꿀떡’ 삼키고 밥이 목을 따라 미끄럼을 타기 시작하자 화자는 밥들의 엉덩이가 아플 것을 걱정한다. 일종의 편집자적 논평을 끼워 놓았다. 그 밥은 긴 미끄럼틀과 같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서는 위(胃)에 ‘쿵덕’하고 떨어진다. 아마 밥은 재미있어서 엉덩이 아픈 것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미끄럼을 또 타겠다며 기린의 입으로 올라가려고 할 것만 같다.
새 운동화 옆에/헌 운동화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헌 운동화는 밤늦도록/새 운동화에게 이야기합니다//비 오는 날/놀이터에선 물웅덩이 조심하고/문방구에 가면/게임기 앞에 쪼그려 앉지 말고/심부름 갈 땐/신호등 없는 찻길 꼭 조심하고//헌 운동화는/그동안 나랑 함께 걸었던 길을/새 운동화에게 들려주느라/바쁩니다.//나랑 빨리 친해지라고.
—박예분, ‘헌 운동화’ 전문. <열린아동문학> 겨울호
위 작품은 헌 운동화가 새 운동화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기려는, 정성스러운 장면을 재미있게 극화했다.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낡아서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자 새 운동화를 마련했다. 헌 운동화를 버리기 전에 새 운동화와 나란히 놓아두었더니, 헌 운동화가 새 운동화에게 밤늦도록 나와 함께했던 일들을 이야기해준다.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물웅덩이를 조심하고, 문방구에 가면 게임기 앞에 쪼그려 앉지 말며, 심부름 갈 땐 신호등 없는 찻길을 꼭 조심하라고 헌 운동화는 새 운동화에게 그 동안 나와 함께 걸었던 길을 자세히 일러준다.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 주느라 헌 운동화는 바쁘다. 헌 운동화는 나에게서 버려질 것이면서도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한다. 나에 대한 섭섭함이나 새 운동화에 대한 시샘은 없다. 자신이 떠날 때를 알고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오직 그 동안 함께했던 나를 위해 지극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아낌없이 나만을 위하는 헌 운동화의 목소리는 이해득실만을 따지며 각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소리로 들려올 것이다.
------------------------
<오늘의 동시문학> 2011 봄호에서
<가져온 곳 : 오늘의 동시문학>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아오는 길 / 김강태 (0) | 2012.03.22 |
---|---|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시 모음 '꽃의 패러디-오규원'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0) | 2012.03.19 |
'남편 누나의 남편'은 뭐라고 부르지? (0) | 2012.03.13 |
기획연재·Ⅲ | 현대시조 감상 ① 이병기, 이은상 / 홍성란 (0) | 2012.03.12 |
조선일보 연재/사랑시 50편과 애송시 100편 링크 (0) | 2012.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