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현장] 오세영 시인 특강 / 손현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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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날씨는 쌀쌀하지만 유심 아카데미의 세미나실은 오세영 시인의 시를 연모 하는 열기로 뜨겁기만 하다. 시에 목을 매는, 어쩌면 너무나 바보 같은 사람들의 모임. 진정한 이 시대의 문학인들이 가득히 앉아 문자와 언어들의 세상을 기웃거린다. 오늘의 초청시인은 오세영 시인. 선생은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전라남도 영광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마쳤다. 처음 후학들과의 인연은 1974년 충남대학교에서 시작했으나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23년을 봉직하고 지난 2007년 8월, 아름다운 정년으로 교수 생활을 마감했다. 문단은 1968년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그동안 17권의 시집을 펴냈고 학술서적 또한 20권이 넘는다. 선생의 작품인 〈원시〉 〈자화상〉을 김윤 시인과 김지헌 시인의 낭독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이어서 차분한 선생의 강연이 시작됐다. 다음은 강연 요지. *** * ** *** **** *** 좌석이 마련되어 있으니 앉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모임이 좋긴 좋습니다. 보고 싶은 분들도 볼 수 있고요. 신달자 교수님, 지난가을에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감사합니다. 신현득 선생님도 참 오랜만에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오면 항상 쑥스러워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시인이시고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인데요, 그런 분들께 강의를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저를 학자라기보다 시인으로 불러 주신 것으로 알고 오늘은 제 육성으로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제 시 몇 편을 읽어내려 가겠습니다. 저는 시를 아주 쉽게 쓰는 사람이어서 비록 텍스트가 없다 하더라도 잘 전달될 줄 믿습니다. 저는 난해하게 시 쓰는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예컨대 이상이라는 시인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상을 연구한 박사논문들이 수십 편 나왔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상의 난해시나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단 한 번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도대체 난해한 시를 해독해서 뭐 하자는 겁니까. 시 감상이 무슨 수수께끼 풀거나 퀴즈 맞히기입니까? 물론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의미야 있겠지요. 그러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행위는 문학의 세계가 아니라 원래 과학(학문)의 세계입니다. 난해해서-아마 작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일지도 모릅니다만- 논자들이 자꾸 이렇게 저렇게 해석해 논란이 되니까 작자는 그 덕택으로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평론가들은 자신의 현학 취미를 과장 선전하여 지명도를 얻고, 뒷북을 치는 아류들은 그에 편승해 자신들도 그 반열 서 있다는 허위의식 내지 자기 합리화에 빠집니다. 독자들은 자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작품이 뭔가 훌륭해서 그렇게들 떠드는가 보다 하고 여기게 되지요. 일종의 희극입니다. 제 생각으로 시는 독자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쉽게 이해되면서도 내면에 깊은 사유가 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더 향상된,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어떤 궁극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야지요.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을 써놓고 ‘이게 시다! 너희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는 식의 지적 혹은 거짓된 냉소주의, 혹은 문학적 사기야말로 시의 묘혈을 파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제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이 그럴 뿐입니다. 이제 헛소리는 그만하고 제 시 〈새벽〉이라는 시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한 편 읽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복간본이 나왔는데 그때 이 시들을 읽어본 젊은 평론가들이나 젊은 시인들이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이 시들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에는 이런 시를 쓰시지 않고 낡아빠진 서정시를 쓰십니까,” 라고요.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세월이 지나 문학적으로 철이 들게 되면 이런 시들은 아마 쓰지 않을 것”이라고. 세대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나의 관점에서는 이 처녀시집 수록 작품들은 아직 시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일종의 글쓰기 연습작품들이었어요. 이 첫 시집의 서문을 박목월 선생님이 써주셨는데 좋다 나쁘다 혹은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는 말씀은 전혀 없으셨고 다만 문학적 감수성만큼은 반짝거린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마 앞으로의 제 문학적 가능성을 보아 서문을 써주셨던 것 같아요. 〈꿈꾸는 병〉 이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 한 1년간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심장질환으로 여러 해를 고통 속에서 보내시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치셨거든요. 병고로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가끔 앰뷸런스 신세를 지며 심야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처음에는 이제 내 삶은 해방이다 하는 불효의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세 달이 못 가서 제게 우울증이 찾아왔고 생전의 어머님께 저지른 불효가 죄의식이 되어 불면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외로움 탓도 있었을 겁니다. 사실은 미리 결혼해서 며느리의 간병으로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도록 했어야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때 저는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능력도 없었고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할 적마다 가슴 아픈 나의 회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든 나는 그 시기 우울증을 앓으면서 나름의 인간적 성숙을 경험했지요. 이 시에서 화자는 소녀로 되어 있지만 기실 그는 그 시절 자살을 항상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때 저는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물론 집도 없었지요. 제 아내는 가사에 재정적 도움이 좀 될까 하여 대전 교외 변두리의 한 골목에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얻어 약국을 개설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가게 말고 딸린 방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물론 안방이었고 다른 한 방은 내가 공부를 하는 일종의 서재였습니다. 집 바로 뒤 공터에는 호남선 철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이든 밤이든 시도 때도 없이 열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달리곤 했지요. 아내는 바깥의 약국에서 약을 팔았습니다. 저는 그 뒷방의 작은 서재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곤 했지요. 그러나 막상 시를 쓰려고 하면 아내가 약을 파는 바깥 소리에 휘말려 번번이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시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첫돌을 넘긴 첫째 아이 하린이는 내 곁에서 세상 모르게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기적소리가 울리더니 목포행 완행열차가 쇳소리를 내며 내 등 뒤로 달렸습니다. 저 기차는 이 야간의 어둠을 뚫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역시 목적지는 남해안의 목포겠지만 저에게는, 잠자는 하린이의 꿈속에서 한 마리 새가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환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에는 그런 가정사만 반영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시적 진술 가운데 ‘젊은 아빠의 번민’이라는 말이 있듯 그것은 이제 막 대학의 초임 교수가 되어 순박하게 학자의 꿈을 꾸던 그 시절의 모순된 사회 상황과 거기에서 기인된 지식인으로서의 내면적 갈등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된 것이기도 했지요. 제가 교수로서 대학에 첫발을 내 디딘 해는 바로 박정희의 유신통치 시대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긴급조치 9호 긴급조치 13호라는 초헌법적 대통령의 영이 국민을 칼날처럼 옥죄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대학에서는 교수 재임용제라는 제도가 대학 역사상 초유의 법으로 제정되어 반정부적 성향을 지닌 교수들이 강제 퇴출당했습니다. 학내에 상주한 정보부 요원들은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심지어 강의시간 뒷 자석에 마치 학생처럼 앉아 교수의 발언 내용을 일일이 메모해서 기관에 보고하는 실정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교수가 정의로운 말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고 그것이 학생들에게는 어용 혹은 위선으로 비쳤을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순수한 학자를 꿈꾸던 내 청춘의 이상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좌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 이제 갓 가정적으로 안정을 찾게 해준 제 직장과 제 옆에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그 평화로운 안식과 밤 10시까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약을 파는 아내를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가정과 사회와 한 지식인으로서 시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놓고 저는 번민과 우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호남선 야간열차처럼 구속 없는 먼 남해의 어떤 수평선 너머로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새벽 3시〉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이때는 다 알다시피 우리 문단이 온통 민중시의 세상이었습니다. 민중이라는 이름을 걸지 않으면 모두가 어용이며 반통일 세력으로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동떨어진 선시(禪詩) 유형의 순수시를 썼으니 누군들 외면하지 않겠습니까. 시라는 것은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정치적 도구이고, 시라는 것을 통해서 민주화를 해야 하고, 또 시를 통해서 남북통일을 해야 하고, 그것이 시고 그 나머지는 시가 아니다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로는 저항과 민중선동을 해야 할 이 같은 시대에 순수시를 쓴다는 것은 독재세력과 야합하는 일이며 투쟁정신을 회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그 자체가 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쳇말로 ‘왕따’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왕따는 지금까지 왕따입니다. 우리 문단에서 한 번의 왕따는 영원한 왕따인 것이지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인 사람이 정작 문단에서는 왕따를 당하다니……. 저는 체질적으로 홀로인 사람이지 어떤 시류나 집단이나 뒷북치는 패거리의 일원이 아닙니다. 생리적으로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와 같은 내 성격이 그런 왕따를 자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 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을 양분해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집단은 소위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파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나는 이제까지 이 두 문학 집단에서 단 한 번의 원고청탁을 받은 적도 없고 작품이 실린 적도 없으며 그들이 주관하는 그 어떤 기회에도 초청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가상하지 않습니까. 어떻든 내가 왕따를 당하던 시절에 쓴 시들이 요즘에 와서는 그래도 문학적으로 인정되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다 낭독되고 있으니 문학이란 참 오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회의하면서도 내가 그래도 아직 문학을 믿는 이유, 문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 〈라일락 그늘에 앉아〉를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봉직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는 대학에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해야지 문학창작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학풍이 하나의 전통으로 지켜져 온 학과입니다. 그것은 제가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나 지금이나 움직일 수 없는 절대 명제입니다. 그래서 한 학년의 재적 25명 안팎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학생들은 시나 소설 같은 것을 창작하거나 기타의 문학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령 창작을 염두에 두고 입학한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재학 중 대부분 국어학이나 고전문학 아니면 비평과 같은 문예학자로 그 노선을 바꾸지요. 물론 이제나 저제나 서울대학교에서는 시창작 혹은 소설창작과 같은 문학창작 강의도 없습니다. 제 학창 시절의 원로 선생님들께서는 서울대는 시나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니니 정말로 창작을 하고 싶다면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동국대학교나 서라벌예술대학교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저도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시를 쓴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시를 창작한다는 죄 때문에 학과에서는 마치 비 맞은 장닭처럼 숨어다니곤 했습니다. 시 쓴다는 소문이 나면 처음엔 선배들이 불러서 타이르고, 다음엔 조교가 또 데려다 혼내고, 교수께서 아시게 되면 당장 자네는 서라벌예술대학이나 동국대학을 가라는 호통을 맞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전통이 서울대 국문학과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교수로서 서울대학교에서 시 쓴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만일 제가 시를 쓴다고 하면 교수들 사이에서 학자가 아니라 ‘시 나부랭이나 쓰는 사람’으로 지탄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동료로부터 실제로 그런 말을 듣기도 했고요. 서울대학교수로 인정을 받는데 적어도 국문학과에서만큼은 시창작이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아니 그로 인해 학자로서의 이미지는 오히려 크게 손상이 되지요. 비록 제가 학술 서적을 20권 가까이 발간했지만요. 그것은 문단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세영이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나 하는 사람이지 지가 무슨 시인이냐 하지 않습니까. 비록 시집을 17권이나 발간했지만요. 제가 시인입니까, 아닙니까? 양자의 한쪽에서는 저 사람은 학자니까 시인이 아니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저 사람은 시인이니까 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저는 실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정체성은 항상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들에게 시창작 강의를 해보고도 싶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는 시창작 강의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그것은 물론 다른 사립대학에의 출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사립대의 문학창작과에 가면 비록 수능시험의 성적 저조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문학의 천재성이 숨어 있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심의 그런 소망을 알았던지 어떤 사립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던 후배 시인 한 분이 제게 출강을 요청해요. 학생들에게 시창작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을 설레며 그 학교 문예창작과의 시창작 연습이라는 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시창작 강의에 무슨 묘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작품을 써오게 해서 발표시키고 토론하면서 제가 나름대로 문학 이론을 곁들여 정리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학생이 시라는 것을 써와서 읽는데 도저히 시라고 할 수 없는 글이었어요. 남북이 빨리 통일을 해서 하나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그 내용조차 선전선동의 구호였습니다. 그 당시 문단에서 유행하던 소위 ‘분단시’라는 것을 써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평했습니다. 통일도 좋고 분단도 극복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문학은 문학으로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시의 내용을 보면 당장 통일하자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인적 물적 교류를 트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 서서히 점진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학생이 불쑥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교수님은 반통일 세력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통일세력은 당장 통일을 원한다는 겁니다. 이젠 다 잊고 있을지 모르나-또는 시대가 그랬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 혹은 변명을 할지 모르나- 그 당시 운동권과 소위 민중시인들은 한결같이 모두 이런 주장들을 했지요. 이에 무슨 토를 달면 그것은 당장 반통일 세력으로 몰리거나 어용으로 지탄을 받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에게 내가 왜 반통일 세력이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가진 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통일이 되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말하는 통일이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었겠지요.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수라는 것은 가진 자(지금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당시 서울대학교 정교수라는 직책의 샐러리맨의 월급은 실은 대 기업 과장 수준도 채 되지 못한다)의 계급이다. 그런데 민중이 원하는 통일은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이고 바로 지금이 그러한 시점이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을 접수하게 되면 오세영 같은 서울대학교 교수는 그 직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이유로 오세영 같은 가진 자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 즉 반통일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또한 모두 다 잊고 있거나 그때는 모두가 그랬지 나만 그랬냐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 정치가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 민중 운동권들의 보편적 생각이자 공개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짐짓 그 뜻을 모른 체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 무슨 말인가. 남북이 통일되면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걸세. 자네가 의미하는 바 ‘가진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가령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만을 가지고도 이렇게 큰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만일 남북이 통일되면 그 두 배의 부를 축적할 것 아닌가. 노태우 대통령 역시 지금은 한반도의 반쪽만을 통치하고 있지만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대통령이 될 터인즉 그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겠는가.”라고요.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이 대학에서 문학창작 지도라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싸들고 그만 집으로 돌아와서 학기 중임에도 다시는 그 대학에 출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기대했던 환상이 깨져 버린 허탈감 때문이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 출강을 도와주었던 그 후배 교수에게 매우 미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런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거의 7, 8년 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사의 부탁으로 몇 달 칼럼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원고를 넘기는 날 마침 원고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담당기자와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의 인상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습니다. 그의 태도 역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났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 선생님 그때 저희 학교에 출강하셔서 시창작 지도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그 문제 학생이 저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앉아 그때 그 이야기를 새삼 꺼내며 담소를 나누었지요. 그의 변명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 기자는 지금 문단에 등단하여 상당히 주목을 받는 시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산다는 것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우연히 인터넷을 쳐보니까 이 시가 어느 블로그에 올려 있어요. 그래 호기심이 나서 읽어봤더니 “산다는 것은 가슴에 개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웃음) 나는 불쾌하면서도 내심 웃기는 마음이 있어 대체 이게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생각해 봤지요. 여러분 워드 문자판에 ‘ㄱ’과 ‘ㅅ’이 바로 붙어 있는 것 아시지요? 그러니까 이분이 워드를 치면서 ‘ㅅ’을 칠 것을 바로 옆에 있는 ‘ㄱ’으로 오타를 친 것이지요. 인터넷에 올려진 제 작품들 가운데는 또 이런 것도 있어요 〈봄〉이라는 시인데요.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라는 구절을 누군가가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가 낮잠 든 사이에 온다”라고 해놓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도 많아졌지만 또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인터넷에 제 이름과 같은 다른 오세영-그러니까 동명이인-이 올린 작품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나의 관점에서는 가짜 오세영이지요. 엊그제는 인터넷 블로그에 또 오세영이라는 목사님의 시가 올라와 있어 정중하게 편지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은 퍽 합리적인 분 같아 앞으로는 제 이름과 혼동이 되지 않는 방식-예컨대 오세영이라는 이름 앞에 당신의 호나 목사라는 호칭 같은 것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올리겠다 하셔서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두세 분의 또 다른 오세영이 있어요.(웃음) 마지막으로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 **** ***** ****** 이렇게 오세영 시인과의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진솔했고, 담백했고,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예술가적 자긍심이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햇빛에 어둠이 더해지는 음예(陰翳)의 공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깊어 보였다. 아쉽지만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간. 유심의 홍사성 주간은 “선생님 아직은 쓸쓸한 이마는 아니십니다”로 다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렇다, 그는 진정 푸른 이마의 시인이신데 쓸쓸하다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누구나 저 지옥 같은 예술의 시간 속에서는 쓸쓸한 이마가 될 수 있는 것이리라. (사진삽입-청중1이나 청중2 중 좋은 것으로 넣어주세요) 그리고 한 시인의 질문이 있었다. 엉뚱하고 생뚱맞지만 재밌는 질문이었다. “공연문화를 즐기는 오세영 선생님은 공연장에 공짜로 가시느냐, 티켓을 사서 가시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더러는 장사익 씨 같은 분이 보내준 초대장이나 문화관광부나 국립극장, 주한 대사관과 같은 관련기관 혹은 단체의 초청에 의해서 가기도 하고, 그러나 아주 좋아하는 가수들 예컨대 조수미나 패티김 같은 분들의 연주회에는 쌈짓돈을 헐기도 하신다는데. 그리고 또 무슨 질문이더라, 사모님에 대한 질문도 오고 갔던 것 같다.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내는 곱지만 아름답지는 않다는 말씀에 좌중이 살짝 술렁이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재빨리 ‘곱다와 아름답다’의 사이를 널뛰면서 시를 찾아보려 애쓰는 모습들이었다. 여긴 시의 나라. 시인의 어법이 통했던 거다. 뒤이어 뒤풀이가 이어지고 맛있는 김밥과 소주와 과일과 안주로 풍성한 잔칫상이 벌어졌다. 모두 먹고 마시면서 잠시 출렁, 흔들려 보심이 어떠실지? 그러나 선생은 자세를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새까만 후배 앞에서도 늘 그 모습으로, 밥을 권하고 술을 권하고 과일을 챙겨 주셨다. 그리고 나 혼자서 몰래 엿본 선생의 왼 볼은 팽팽해서 수줍기도 했는데. 맞다, 먼 눈빛! 그에게는 소실점 밖을 바라보는 먼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늘, 여기까지 왔으리라. 모두 선생을 사랑했고, 한마음으로 선생을 존경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 오세영이라는 시인을 한 보따리 선물로 받고 가슴 벅찼으리라. 깨져야 완성을 본다는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을 노트에, 가슴에 머리에, 간직한 우리는 오늘의 큰 시인 곁에서 곁 바람을 쐬며 약간은 흐트러져서, 그러나 마음껏, 행복했다.
-정리/ 손현숙(시인)
* 출처: 유심 (2012.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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