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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학의 현장] 깨달음과 감동을 주는 시를 쓰자 - 오세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3. 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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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현장] 오세영 시인 특강 / 손현숙
[55호] 2012년 01월 10일 (화) 손현숙 시인

문학의 현장 16

2012년 새해에 처음으로 열린 ‘문학의 현장’에는 서정적 미학을 추구하면서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현하는 오세영 시인을 모셨다. 예술원 회원이며 서울대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은 이날 강연에서 독자와 소통되지 않는 시가 좋은 시일수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시는 영원성과 감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오세영 시인의 강연내용을 지상중계한다.

- 일시 : 2012년 1월 10일 6시 30분
- 장소 : 유심 아카데미 세미나실

아직 날씨는 쌀쌀하지만 유심 아카데미의 세미나실은 오세영 시인의 시를 연모 하는 열기로 뜨겁기만 하다. 시에 목을 매는, 어쩌면 너무나 바보 같은 사람들의 모임. 진정한 이 시대의 문학인들이 가득히 앉아 문자와 언어들의 세상을 기웃거린다.

오늘의 초청시인은 오세영 시인. 선생은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전라남도 영광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마쳤다. 처음 후학들과의 인연은 1974년 충남대학교에서 시작했으나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23년을 봉직하고 지난 2007년 8월, 아름다운 정년으로 교수 생활을 마감했다. 문단은 1968년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그동안 17권의 시집을 펴냈고 학술서적 또한 20권이 넘는다.

선생의 작품인 〈원시〉 〈자화상〉을 김윤 시인과 김지헌 시인의 낭독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이어서 차분한 선생의 강연이 시작됐다. 다음은 강연 요지.

*** * ** *** **** ***

좌석이 마련되어 있으니 앉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모임이 좋긴 좋습니다. 보고 싶은 분들도 볼 수 있고요. 신달자 교수님, 지난가을에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감사합니다. 신현득 선생님도 참 오랜만에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오면 항상 쑥스러워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시인이시고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인데요, 그런 분들께 강의를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저를 학자라기보다 시인으로 불러 주신 것으로 알고 오늘은 제 육성으로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제 시 몇 편을 읽어내려 가겠습니다. 저는 시를 아주 쉽게 쓰는 사람이어서 비록 텍스트가 없다 하더라도 잘 전달될 줄 믿습니다. 저는 난해하게 시 쓰는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예컨대 이상이라는 시인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상을 연구한 박사논문들이 수십 편 나왔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상의 난해시나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단 한 번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도대체 난해한 시를 해독해서 뭐 하자는 겁니까. 시 감상이 무슨 수수께끼 풀거나 퀴즈 맞히기입니까? 물론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의미야 있겠지요. 그러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행위는 문학의 세계가 아니라 원래 과학(학문)의 세계입니다. 난해해서-아마 작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일지도 모릅니다만- 논자들이 자꾸 이렇게 저렇게 해석해 논란이 되니까 작자는 그 덕택으로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평론가들은 자신의 현학 취미를 과장 선전하여 지명도를 얻고, 뒷북을 치는 아류들은 그에 편승해 자신들도 그 반열 서 있다는 허위의식 내지 자기 합리화에 빠집니다. 독자들은 자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작품이 뭔가 훌륭해서 그렇게들 떠드는가 보다 하고 여기게 되지요. 일종의 희극입니다.

제 생각으로 시는 독자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쉽게 이해되면서도 내면에 깊은 사유가 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더 향상된,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어떤 궁극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야지요.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을 써놓고 ‘이게 시다! 너희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는 식의 지적 혹은 거짓된 냉소주의, 혹은 문학적 사기야말로 시의 묘혈을 파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제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이 그럴 뿐입니다. 이제 헛소리는 그만하고 제 시 〈새벽〉이라는 시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루에 떨어진 채 금화(金貨)는/ 빛나고 가볍게 고요가/ 음반 위에 쉴 때,// 우랄 알타이 모음이 잠든/ 베갯머리에서/ 담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그리다가/ 꽃이여,// 찰랑거리는 시간의 델타 위에/ 너는 묻히고, 만가(輓歌)를 부르는 새벽,/ 모이를 줍고 있던 밤새들의 낮고/ 깊은 목소리.// 문을 밀치면 투명한/ 방으로 걸어오던 초상화./ 고요의 좁은 출구를 지나서/ 꽃피듯 옷을 벗는다.// 실내에서 나래치는 나비 떼/ 선반에 얹어둔 햇빛을 털고,/ 무겁게 누운 저 평원을/ 깔고 앉아, 빛을 길어 올리는/ 동아줄 붙잡고 새벽은,// 잿더미 위의 앙상한 하늘을/ 밀어젖힌다.
—〈새벽〉 전문

꼭 좋아서가 아니라 제 추천작이기 때문에 한번 읽어본 작품입니다. 저는 《현대문학》을 통해 1965년에서 1968년까지의 기간에 꼭 세 번의 추천을 받고 등단했어요.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신달자 교수 역시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신 교수하고는 같은 도반이자 문하생으로 대학 때부터 시로써 우정을 맺어 온 친구 사이입니다. 그런데 박목월 선생은 또한 1939년을 전후해 《문장》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정지용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셨기 때문에 인맥으로 따지고 보자면 정지용의 제자가 박목월, 박목월의 제자가 오세영 그렇습니다. 물론 목월 선생의 문하에는 많은 시인들이 계시지만, 어찌 됐든 저는 지용과 목월의 맥을 잇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그분들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저로 하여금 시의 위의를 지키게 한 힘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또 한 편 읽어 보겠습니다.

타버린 정신들은 어디 갔는가./ 가령 설원(雪原)에 버려진 장미꽃 하나,/ 혹은 알타이에 떨어지는 햇살,/ 바람과 소나기, 그리고 유월은/ 불탄다.// 내 살 속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뛰어가고, 알코올이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이십세기는 불을 지핀다. 물질이 흘린/ 피. 싸늘한,/ 실용(實用)의 새는 날 수 있을까,/ 어두운 내 얼굴을 날아서, 찬 서리 내린 굴뚝과/ 기계들이 죽은 무덤을 넘어서/ 어제의 어제를 넘어서/ 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선(電線)에 걸린 달, 인간의 숲속에서/ 전화가 울고 아흔아홉 마리의 이리가 운다./ 저것 보라면서/ 불타는 서울의 술집들을 가리키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타버린 정신의 재/ 죽음, 혹은 창조의 불빛.
—〈불 1〉 전문

젊은 시절에는 저도 이런 시들을 썼습니다. 1970년에 간행된 처녀시집 《반란하는 빛》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물론 저는 이 같은 작품들을 결코 훌륭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때 저는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써댔지요. 지금 보니까 이건 시도 아닌 것 같고요. 다만 습작 시대의 제 상상력과 언어적 감수성 훈련에는 조금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 첫 시집의 시들은 그저 습작시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문단에서 제 이름이 좀 알려지니까 몇 년 전인가 어떤 출판사에서 지명도가 있는 시인들의 첫 시집만 모아서 재출판하는 시리즈를 계획할 때 제 첫 시집도 거기 끼워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복간본이 나왔는데 그때 이 시들을 읽어본 젊은 평론가들이나 젊은 시인들이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이 시들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에는 이런 시를 쓰시지 않고 낡아빠진 서정시를 쓰십니까,” 라고요.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세월이 지나 문학적으로 철이 들게 되면 이런 시들은 아마 쓰지 않을 것”이라고. 세대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나의 관점에서는 이 처녀시집 수록 작품들은 아직 시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일종의 글쓰기 연습작품들이었어요. 이 첫 시집의 서문을 박목월 선생님이 써주셨는데 좋다 나쁘다 혹은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는 말씀은 전혀 없으셨고 다만 문학적 감수성만큼은 반짝거린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마 앞으로의 제 문학적 가능성을 보아 서문을 써주셨던 것 같아요.

〈꿈꾸는 병〉 이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의 지평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쉬는/ 에프 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꿈꾸는 병〉 전문

이 시에는 시의 감각성 같은 것이 살아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시는 나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쓴 것인데, 1970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어머니는 20살에 시집을 가서 22살에 홀로 되셨습니다. 결혼한 지 두 해 만에 당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유행병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일제 총독부에서는 아버지의 시신을 임의로 화장을 해 그 유골가루를 바람에 날려버려서 저는 사실 제 아버지의 산소가 없어요. 그리고 그때 저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유복자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교에 다닐 때까지 비록 외가에서 성장하기는 했지만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항상 홀로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께서 저를 믿고 사시다가 내 나이 29살, 51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첫 시집을 내기 바로 직전이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 한 1년간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심장질환으로 여러 해를 고통 속에서 보내시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치셨거든요. 병고로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가끔 앰뷸런스 신세를 지며 심야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처음에는 이제 내 삶은 해방이다 하는 불효의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세 달이 못 가서 제게 우울증이 찾아왔고 생전의 어머님께 저지른 불효가 죄의식이 되어 불면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외로움 탓도 있었을 겁니다. 사실은 미리 결혼해서 며느리의 간병으로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도록 했어야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때 저는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능력도 없었고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할 적마다 가슴 아픈 나의 회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든 나는 그 시기 우울증을 앓으면서 나름의 인간적 성숙을 경험했지요. 이 시에서 화자는 소녀로 되어 있지만 기실 그는 그 시절 자살을 항상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밤 10시〉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아내가 약을 파는/ 밤 10시,/ 나는 시를 쓴다./ 바닷가로 떠나는/ 밤 열차의 기적 같은 슬픔이// 하이얀 원고지를 적시고/ 구겨진 빵세, 아빠의 시집을 든 채/ 하린이는 쌔근 쌔근 잠이 들었다.// 흰 물새를 타고/ 너의 바다로 떠난 어린 딸아/ 물새가 날지 않는 어느 날,/ 너는 알게 되리라.// 젊은 아빠의 번민을,/ 안개 낀 밤이 불면을,/ 밤 10시/ 안정제를 권유하는 /아내의 피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시를 쓴다./ 먼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밤 10시-딸에게〉 전문

제가 충남대학교 교수가 된 것은 1974년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 4년 후에 어찌어찌해서 대전에 자리한 충남대학교의 교수 공개채용에 응모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공영어, 교양영어,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 전공 등 네 과목을 두 번씩이나 시험 쳐서 간신히 턱걸이로 합격하여 임명된 국문학과 전임강사. 제가 국립 충남대학교 교수가 된 내력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3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1년 전에 결혼을 한 상태였지요. 상대는 집안끼리 통혼관계가 있었던 가문의 한 규수로 약대를 졸업한 약사였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물론 집도 없었지요. 제 아내는 가사에 재정적 도움이 좀 될까 하여 대전 교외 변두리의 한 골목에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얻어 약국을 개설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가게 말고 딸린 방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물론 안방이었고 다른 한 방은 내가 공부를 하는 일종의 서재였습니다. 집 바로 뒤 공터에는 호남선 철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이든 밤이든 시도 때도 없이 열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달리곤 했지요.

아내는 바깥의 약국에서 약을 팔았습니다. 저는 그 뒷방의 작은 서재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곤 했지요. 그러나 막상 시를 쓰려고 하면 아내가 약을 파는 바깥 소리에 휘말려 번번이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시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첫돌을 넘긴 첫째 아이 하린이는 내 곁에서 세상 모르게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기적소리가 울리더니 목포행 완행열차가 쇳소리를 내며 내 등 뒤로 달렸습니다. 저 기차는 이 야간의 어둠을 뚫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역시 목적지는 남해안의 목포겠지만 저에게는, 잠자는 하린이의 꿈속에서 한 마리 새가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환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에는 그런 가정사만 반영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시적 진술 가운데 ‘젊은 아빠의 번민’이라는 말이 있듯 그것은 이제 막 대학의 초임 교수가 되어 순박하게 학자의 꿈을 꾸던 그 시절의 모순된 사회 상황과 거기에서 기인된 지식인으로서의 내면적 갈등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된 것이기도 했지요. 제가 교수로서 대학에 첫발을 내 디딘 해는 바로 박정희의 유신통치 시대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긴급조치 9호 긴급조치 13호라는 초헌법적 대통령의 영이 국민을 칼날처럼 옥죄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대학에서는 교수 재임용제라는 제도가 대학 역사상 초유의 법으로 제정되어 반정부적 성향을 지닌 교수들이 강제 퇴출당했습니다. 학내에 상주한 정보부 요원들은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심지어 강의시간 뒷 자석에 마치 학생처럼 앉아 교수의 발언 내용을 일일이 메모해서 기관에 보고하는 실정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교수가 정의로운 말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고 그것이 학생들에게는 어용 혹은 위선으로 비쳤을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순수한 학자를 꿈꾸던 내 청춘의 이상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좌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 이제 갓 가정적으로 안정을 찾게 해준 제 직장과 제 옆에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그 평화로운 안식과 밤 10시까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약을 파는 아내를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가정과 사회와 한 지식인으로서 시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놓고 저는 번민과 우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호남선 야간열차처럼 구속 없는 먼 남해의 어떤 수평선 너머로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새벽 3시〉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새벽 세시,/ 강물이 강물로 흐르고,/ 바다는 바다로 푸르고,/ 까투리 장끼 곁에 눕고
새벽 세시,/ 달빛은 눈썹 위에 쌓이고,/ 은하는 귀밑머리 적시고,/ 별빛은 이마에서 꿈꾸는 시간,/ 세시에 깨어/ 경을 읽는다.// 일(一)은 다(多)이고 다(多)는 일(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니며……// 화엄경(華嚴經)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 그 말씀/ 아, 가슴으로 내리는 썰물소리/ 갈잎소리.
—〈새벽 3시〉 전문

새벽 세 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불경을 읽으면서 쓴 시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대부터 ‘무명연시’라는 큰 제목으로 연작시들을 썼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 이런 연작시들을 모아서 같은 제목의 《무명연시》라는 연작시집을 냈는데 이 시집에 대해서 문단에서는 당시 뭐 그렇다 할 평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다만 유일한 두 평론가가 있었는데 한 분은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계시는 최동호 씨였고 또 한 분은 경희대학교 교수로 계시던 김재홍 씨였습니다. 제가 학교에서나 문단에서 퍽 외로운 때여서 이분들의 평가는 제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나는 아직도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다 알다시피 우리 문단이 온통 민중시의 세상이었습니다. 민중이라는 이름을 걸지 않으면 모두가 어용이며 반통일 세력으로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동떨어진 선시(禪詩) 유형의 순수시를 썼으니 누군들 외면하지 않겠습니까. 시라는 것은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정치적 도구이고, 시라는 것을 통해서 민주화를 해야 하고, 또 시를 통해서 남북통일을 해야 하고, 그것이 시고 그 나머지는 시가 아니다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로는 저항과 민중선동을 해야 할 이 같은 시대에 순수시를 쓴다는 것은 독재세력과 야합하는 일이며 투쟁정신을 회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그 자체가 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쳇말로 ‘왕따’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왕따는 지금까지 왕따입니다. 우리 문단에서 한 번의 왕따는 영원한 왕따인 것이지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인 사람이 정작 문단에서는 왕따를 당하다니…….

저는 체질적으로 홀로인 사람이지 어떤 시류나 집단이나 뒷북치는 패거리의 일원이 아닙니다. 생리적으로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와 같은 내 성격이 그런 왕따를 자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 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을 양분해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집단은 소위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파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나는 이제까지 이 두 문학 집단에서 단 한 번의 원고청탁을 받은 적도 없고 작품이 실린 적도 없으며 그들이 주관하는 그 어떤 기회에도 초청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가상하지 않습니까. 어떻든 내가 왕따를 당하던 시절에 쓴 시들이 요즘에 와서는 그래도 문학적으로 인정되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다 낭독되고 있으니 문학이란 참 오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회의하면서도 내가 그래도 아직 문학을 믿는 이유, 문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
〈그릇〉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
—〈그릇-그릇 1〉 전문

제가 깨져서 칼이 된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1970년대, 80년대에 철저하게 깨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오세영이가 있겠습니까. 그 시대에 부화뇌동했으면 문학적으로 지금 살아남아 있지를 못했겠지요. 오세영은 오세영이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긍심을 지켜야 시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으나 특히 개성과 창조정신을 본질로 한 문학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한국문단에 시인이 만 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 명의 시인을 모두 알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시인이라고는 그중 50명도 채 되지 못합니다. 생각해볼 문제이지요.

〈라일락 그늘에 앉아〉를 읽어보겠습니다.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라일락 그늘에 앉아〉 전문

마지막 그 한 줄의 내용이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눈물이 나서 마지막 한 줄은 읽어보질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사랑이란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야 더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요. 저도 연시들을 꽤 많이 썼습니다. 강연을 시작할 때 김윤 시인이 제 시 〈원시〉를 읽었는데요, 〈라일락 그늘에 앉아서〉도 그런 계열의 시 한 편입니다.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서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 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와/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하늘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전문


한때 좋아했던 여자를 위해서 쓴 시입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 한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소월을 강의하며〉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고려연방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통일은 우선/ 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 나더러 반통일 세력이라고 한다./ 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 만일/ 국가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면/ 나의 유일한 부동산인 집 한 채를/ 기꺼이 헌납할 생각이 있는 나인데/ 통일을 위해서라면 대학교수직도/ 기꺼이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 25년 교직 경력, 150만 원 월수는/ 이제 가진 자가 되었구나./ 그렇다. 나는/ 가진 자이다./ 집에 가면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 「왈패」가 있고/ 브람스의 음악이 있고/ 그보다는 아직 티브이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찔찔/ 흘릴 눈물이 있다./학생들이 떠난/ 빈 강의실,/ 홀로 남아 분필을 추스린다./ 소월(素月)의 허무주의처럼 흑판은/ 텅 비어 있는데/ 가만히 새겨 보는 그대 이름, 아니/ 산산이 부서진 나의 이름.
—〈소월(素月)을 강의하며〉 전문

이런 시도 쓴 적이 있습니다. 물론 1980년대에 소위 ‘분단시’라고 명명된 그런 시 예컨대 〈김치〉나 〈10월 어느 날〉 같은 시도 있습니다. 한국분단시 사화집 같은 데 꼭 실리는 작품입니다. 저들은 저를 나쁜 의미로 순수시인이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저는 민중시도 여러 편을 썼지요. 우리 문단에서는 민중시 집단에 들어가 조직의 일원으로 인맥을 형성하지 않으면 그 시인이 아무리 민중다운 민중시를 써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바로 그 불문율에 걸려 있었던 셈이지요.

제가 봉직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는 대학에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해야지 문학창작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학풍이 하나의 전통으로 지켜져 온 학과입니다. 그것은 제가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나 지금이나 움직일 수 없는 절대 명제입니다. 그래서 한 학년의 재적 25명 안팎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학생들은 시나 소설 같은 것을 창작하거나 기타의 문학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령 창작을 염두에 두고 입학한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재학 중 대부분 국어학이나 고전문학 아니면 비평과 같은 문예학자로 그 노선을 바꾸지요. 물론 이제나 저제나 서울대학교에서는 시창작 혹은 소설창작과 같은 문학창작 강의도 없습니다.

제 학창 시절의 원로 선생님들께서는 서울대는 시나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니니 정말로 창작을 하고 싶다면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동국대학교나 서라벌예술대학교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저도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시를 쓴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시를 창작한다는 죄 때문에 학과에서는 마치 비 맞은 장닭처럼 숨어다니곤 했습니다. 시 쓴다는 소문이 나면 처음엔 선배들이 불러서 타이르고, 다음엔 조교가 또 데려다 혼내고, 교수께서 아시게 되면 당장 자네는 서라벌예술대학이나 동국대학을 가라는 호통을 맞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전통이 서울대 국문학과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교수로서 서울대학교에서 시 쓴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만일 제가 시를 쓴다고 하면 교수들 사이에서 학자가 아니라 ‘시 나부랭이나 쓰는 사람’으로 지탄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동료로부터 실제로 그런 말을 듣기도 했고요. 서울대학교수로 인정을 받는데 적어도 국문학과에서만큼은 시창작이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아니 그로 인해 학자로서의 이미지는 오히려 크게 손상이 되지요. 비록 제가 학술 서적을 20권 가까이 발간했지만요. 그것은 문단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세영이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나 하는 사람이지 지가 무슨 시인이냐 하지 않습니까. 비록 시집을 17권이나 발간했지만요. 제가 시인입니까, 아닙니까? 양자의 한쪽에서는 저 사람은 학자니까 시인이 아니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저 사람은 시인이니까 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저는 실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정체성은 항상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들에게 시창작 강의를 해보고도 싶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는 시창작 강의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그것은 물론 다른 사립대학에의 출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사립대의 문학창작과에 가면 비록 수능시험의 성적 저조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문학의 천재성이 숨어 있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심의 그런 소망을 알았던지 어떤 사립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던 후배 시인 한 분이 제게 출강을 요청해요. 학생들에게 시창작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을 설레며 그 학교 문예창작과의 시창작 연습이라는 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시창작 강의에 무슨 묘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작품을 써오게 해서 발표시키고 토론하면서 제가 나름대로 문학 이론을 곁들여 정리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학생이 시라는 것을 써와서 읽는데 도저히 시라고 할 수 없는 글이었어요. 남북이 빨리 통일을 해서 하나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그 내용조차 선전선동의 구호였습니다. 그 당시 문단에서 유행하던 소위 ‘분단시’라는 것을 써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평했습니다. 통일도 좋고 분단도 극복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문학은 문학으로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시의 내용을 보면 당장 통일하자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인적 물적 교류를 트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 서서히 점진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학생이 불쑥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교수님은 반통일 세력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통일세력은 당장 통일을 원한다는 겁니다. 이젠 다 잊고 있을지 모르나-또는 시대가 그랬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 혹은 변명을 할지 모르나- 그 당시 운동권과 소위 민중시인들은 한결같이 모두 이런 주장들을 했지요. 이에 무슨 토를 달면 그것은 당장 반통일 세력으로 몰리거나 어용으로 지탄을 받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에게 내가 왜 반통일 세력이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가진 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통일이 되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말하는 통일이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었겠지요.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수라는 것은 가진 자(지금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당시 서울대학교 정교수라는 직책의 샐러리맨의 월급은 실은 대 기업 과장 수준도 채 되지 못한다)의 계급이다. 그런데 민중이 원하는 통일은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이고 바로 지금이 그러한 시점이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을 접수하게 되면 오세영 같은 서울대학교 교수는 그 직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이유로 오세영 같은 가진 자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 즉 반통일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또한 모두 다 잊고 있거나 그때는 모두가 그랬지 나만 그랬냐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 정치가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 민중 운동권들의 보편적 생각이자 공개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짐짓 그 뜻을 모른 체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 무슨 말인가. 남북이 통일되면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걸세. 자네가 의미하는 바 ‘가진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가령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만을 가지고도 이렇게 큰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만일 남북이 통일되면 그 두 배의 부를 축적할 것 아닌가. 노태우 대통령 역시 지금은 한반도의 반쪽만을 통치하고 있지만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대통령이 될 터인즉 그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겠는가.”라고요.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이 대학에서 문학창작 지도라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싸들고 그만 집으로 돌아와서 학기 중임에도 다시는 그 대학에 출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기대했던 환상이 깨져 버린 허탈감 때문이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 출강을 도와주었던 그 후배 교수에게 매우 미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런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거의 7, 8년 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사의 부탁으로 몇 달 칼럼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원고를 넘기는 날 마침 원고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담당기자와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의 인상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습니다. 그의 태도 역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났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 선생님 그때 저희 학교에 출강하셔서 시창작 지도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그 문제 학생이 저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앉아 그때 그 이야기를 새삼 꺼내며 담소를 나누었지요. 그의 변명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 기자는 지금 문단에 등단하여 상당히 주목을 받는 시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산다는 것은〉을 읽어 보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날려야 될 그 한 때를 기다려/ 안으로 소중히 품어 안은/ 새,// 산다는 것은/ 먼 박명의 하늘을 날아/ 암흑을 건너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둘수록 더 찬란하게 예비된/ 그의 비상.// 이른 봄,/ 목련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병아리 떼가/ 꽃망울 터지는 순간을 노려 나래 치듯// 반짝,/ 성냥불처럼 밝히는 생의 불꽃 속에서/ 육신을 벗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를 내 오늘/ 문득 본다.
—〈산다는 것은〉 전문

곧 목련꽃이 피겠네요. 여러분, 목련꽃 필 때 꽃봉오리 보셨어요? 마른 꽃가지에서 막 벌어지는 꽃봉오리를 보면 마치 병아리 같지 않습니까? 나는 병아리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목련꽃 봉오리가 활짝 꽃을 피워서 마침내 하늘에 꽃잎들을 날리는 것은 새가 하늘로 비상하는 것에 해당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또한 이렇게도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인생의 종말에 사람들은 그 가슴에 키우던 그 절실한 새 한 마리를 마침내 어딘가 푸른 하늘로 날려보내겠지요. 어떻든 이런 발상으로 쓰인 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우연히 인터넷을 쳐보니까 이 시가 어느 블로그에 올려 있어요. 그래 호기심이 나서 읽어봤더니 “산다는 것은 가슴에 개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웃음) 나는 불쾌하면서도 내심 웃기는 마음이 있어 대체 이게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생각해 봤지요. 여러분 워드 문자판에 ‘ㄱ’과 ‘ㅅ’이 바로 붙어 있는 것 아시지요? 그러니까 이분이 워드를 치면서 ‘ㅅ’을 칠 것을 바로 옆에 있는 ‘ㄱ’으로 오타를 친 것이지요.

인터넷에 올려진 제 작품들 가운데는 또 이런 것도 있어요 〈봄〉이라는 시인데요.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라는 구절을 누군가가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가 낮잠 든 사이에 온다”라고 해놓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도 많아졌지만 또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인터넷에 제 이름과 같은 다른 오세영-그러니까 동명이인-이 올린 작품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나의 관점에서는 가짜 오세영이지요.

엊그제는 인터넷 블로그에 또 오세영이라는 목사님의 시가 올라와 있어 정중하게 편지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은 퍽 합리적인 분 같아 앞으로는 제 이름과 혼동이 되지 않는 방식-예컨대 오세영이라는 이름 앞에 당신의 호나 목사라는 호칭 같은 것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올리겠다 하셔서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두세 분의 또 다른 오세영이 있어요.(웃음)

그것을 불러 보석이라 이름한다./ 햇빛에/ 눈부신 그 반짝거림,/ 강변 모래 언덕에/ 사금파리 하나 반쯤 묻혀 있다./ 보석이란 가장 소중한 마음을 이르는 것이려니/ 우리 어린 날/ 네게 바친 이 순수한 영혼의 징표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깨진 것은 모두 보석이 된다./ 한때 값진 도자기였을지라도,/ 한때 투박한 사발이었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장에 갇힌 그릇일 뿐./ 깨지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까닭에/ 보석이 된다./ 그 봄날의 풀꽃 반지도/ 그 강변의 모래성도/ 지금은 모두 강물에 씻겨갔지만/ 우리들의 강 언덕엔/ 눈부신 보석 하나/ 푸른 하늘을 지키고 있다./ 영원처럼······
—〈보석 2〉 전문

지금은 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도 많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가지고 놀 장난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금파리 같은 것을 주어서 갈고 닦아 마치 보석처럼 간직하고 그런 것들을 갖고 놀았지요. 사금파리가 뭡니까. 깨진 그릇이지요. 그런데 모든 그릇들은 본질적으로 항상 구속되어 있습니다. 식기로 사용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장에 갇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깨진 사금파리만큼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매여 있거나 구속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것들은 끝없는 자유. 완전한 자유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이나 깨지지 않고서는 절대의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시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지지 않고서 완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도 언젠가는 한 번 깨져야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소리, 낙엽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퀴 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강물이여,/ 한때 내 눈을 멀게 했던 네 뜨거운 시선,/ 열망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내 육신을 황홀하게 달구던 그 눈빛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때로는 여울에, 때로는 급류에, 아니 때로는/ 도도히 밀려가는 홍수에 실려/ 아득히 수평선을 가물가물 넘어가던 너의/ 쓸쓸한 이마. 그리고/ 어디선가 꽃잎이 지는 소리, 파도소리, 철썩이는 잔 물결의 여운./ 어느 먼 외방의 썰렁한 갯벌에 떠밀려/ 뭍을 향해 언제나 귀를 쫑긋 열고 살아야만 하는가./ 해파리, 민조개, 백합 아니/ 온종일 휘파람으로 울다 지친 소라/ 말해다오./ 구름이라 이름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해도 다시 이룰 수 없는 형상들을 향해 나는/ 이제 구름이라 불러본다./ 구름이여,/ 한때 내 맑은 영혼의 하늘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오색 빛 채운(彩雲)/ 그 빛나던 무지개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별빛에 실려, 달빛, 아니 어스름한 어느 저녁 답,/ 스러지는 한 조각 노을에 실려/ 아득히 먼 허공으로 희부옇게 사라지던 너의 그/ 두 빈 어깨 그리고/ 어디선가 내리치는 마른번개,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잔기침 소리/ 어느 먼 이역의 하늘로 불려가/ 흩뿌리는 싸락눈, 진눈깨비 아니/ 동토(凍土)에 떨어져 나뒹구는 우박이 되었는가./ 말해다오./ 너를 찾는다.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강물이라는,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해 저무는 가을 저녁/ 찰랑대는 강가의 시든 풀밭에 홀로/ 망연히 앉아.
—〈너를 찾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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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세영 시인과의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진솔했고, 담백했고,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예술가적 자긍심이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햇빛에 어둠이 더해지는 음예(陰翳)의 공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깊어 보였다. 아쉽지만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간. 유심의 홍사성 주간은 “선생님 아직은 쓸쓸한 이마는 아니십니다”로 다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렇다, 그는 진정 푸른 이마의 시인이신데 쓸쓸하다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누구나 저 지옥 같은 예술의 시간 속에서는 쓸쓸한 이마가 될 수 있는 것이리라. (사진삽입-청중1이나 청중2 중 좋은 것으로 넣어주세요)

그리고 한 시인의 질문이 있었다. 엉뚱하고 생뚱맞지만 재밌는 질문이었다. “공연문화를 즐기는 오세영 선생님은 공연장에 공짜로 가시느냐, 티켓을 사서 가시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더러는 장사익 씨 같은 분이 보내준 초대장이나 문화관광부나 국립극장, 주한 대사관과 같은 관련기관 혹은 단체의 초청에 의해서 가기도 하고, 그러나 아주 좋아하는 가수들 예컨대 조수미나 패티김 같은 분들의 연주회에는 쌈짓돈을 헐기도 하신다는데. 그리고 또 무슨 질문이더라, 사모님에 대한 질문도 오고 갔던 것 같다.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내는 곱지만 아름답지는 않다는 말씀에 좌중이 살짝 술렁이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재빨리 ‘곱다와 아름답다’의 사이를 널뛰면서 시를 찾아보려 애쓰는 모습들이었다. 여긴 시의 나라. 시인의 어법이 통했던 거다.

뒤이어 뒤풀이가 이어지고 맛있는 김밥과 소주와 과일과 안주로 풍성한 잔칫상이 벌어졌다. 모두 먹고 마시면서 잠시 출렁, 흔들려 보심이 어떠실지? 그러나 선생은 자세를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새까만 후배 앞에서도 늘 그 모습으로, 밥을 권하고 술을 권하고 과일을 챙겨 주셨다. 그리고 나 혼자서 몰래 엿본 선생의 왼 볼은 팽팽해서 수줍기도 했는데. 맞다, 먼 눈빛! 그에게는 소실점 밖을 바라보는 먼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늘, 여기까지 왔으리라. 모두 선생을 사랑했고, 한마음으로 선생을 존경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 오세영이라는 시인을 한 보따리 선물로 받고 가슴 벅찼으리라. 깨져야 완성을 본다는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을 노트에, 가슴에 머리에, 간직한 우리는 오늘의 큰 시인 곁에서 곁 바람을 쐬며 약간은 흐트러져서, 그러나 마음껏, 행복했다.

 

-정리/ 손현숙(시인)

 

* 출처: 유심  (2012. 3/4)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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