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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뒤집기와 여백의 표현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8. 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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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기와 여백의 표현
- 서정춘 시집 <봄, 파르티잔>



서정춘 시집 『봄, 파르티잔』은 너무나 당당하다. 모두 33편의 시가 수록된 총 48 페이지의 시집이다. 구차한 발문도 없고 고뇌에 찬 시인의 프로필 사진도 없이 그냥 그뿐이다. 시집을 내주는 출판사 측에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시인의 배짱에 아마도 편집자가 두손들고 하는 수 없이 책의 부피를 늘일 생각으로 장정을 하드커버의 양장을 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두 페이지를 차지하는 시는 「ㅇ(이응) 」 하나밖에 없다. 한결같이 짧은 시들이다.
최근 우리 나라의 시집들, 알쏭달쏭하고 현학적인 주례사 같은 해설도 덧붙여 대체로 60편 정도의 시를 실어 120 페이지 분량으로 시집 한 권을 묶는 상식적인 관행을 시인은 일축해 버린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서 나는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광복 후 60년대 중반까지 시집 한 권의 분량은 거의 30편쯤이었으며, 다만 세로쓰기의 조판이었던 점이 지금과 사정이 달랐을 뿐이라는 기억이 떠오른다.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봄, 파르티잔

십 년 넘게 시를 즐겨 읽고, 시를 쓰고 있는 젊은 삼십대 여성 독자들에게 나는 이 시를 보여줬다. 그리고 간단한 감상을 써보라고 하였다. 그들은 '파르티잔'을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6.25 때의 '빨치산' 그 어원인 러시아말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영화 「남부군」을 떠올리기도 하였지만 너무 짧은 시라는 점이 충격적인 듯하였다. 이윽고 나는 답안지를 회수하는 시험관처럼 그들의 독후감을 받아들었다. 김행란씨는 올해 광주일보 신춘 당선을 한 신진 시인이다.
―'빨치산'이라는 무거운 주제로도 이렇게 가벼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제목이 없다면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여인의 노래쯤으로 생각할 법한데…. (김미영씨)
―빨치산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와 봄이 주는 생명력과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작품 속에서의 여운을 매개로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3행뿐인 아주 짤막한 시이지만 그 짧음 속에 끊임없는 절규와 하고 싶은 말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움과 아픔이, 작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절제되어 있다. (나정숙씨)
―봄을 빨치산(파르티잔)으로 대비해 그린 점이 충격적이다. 대부분 봄은 긍정적인 이미지 아닌가. 하지만 빨치산을 서정적 이미지로 묘사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가슴 뭉클한 묘사다. 봄이라는 계절이 겨울의 벼랑 끝에 선 아주 짧은 시간적 개념으로 비쳐진다. (김행란씨)
내 생각에 이 시를 읽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뉠 것 같다. 그 하나는 생략된 주어가 '봄'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빨치산(파르티잔)'이라는 것. 시인은 일부러 그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냥 여백 속에서 독자를 향해 웃고 있다. 절묘한 제스처이다.

우네
물고기 처량하게
쇠 된 물고기
하릴없이 허공에다
자기 몸을 냅다 치네
저 물고기
절 집을 흔들며
맑은 물소리 쏟아 내네
문득 절 집이 물소리에 번지네

절 집을 물고
물고기 떠 있네
―풍경(風磬)

절 집의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그 쇠로 된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울려내는 맑은 물소리. 시인의 어법을 잘 드러내는 이 시의 묘미는 '뒤집기'에 있다. 절 집에 매달린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가 절 집을 물고 있다는 것. 세계를 뒤집어 생각하기에서 시인은 영감을 얻는 것일까. "갑자기,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저수지 전체를 한 번 들어올렸다가 도로 내립다 칠 때"라고 낚시터의 풍경을 묘사한 시 「저수지에서 생긴 일」도 바로 그런 식의 발상이다.
이 시집 속에는 50년대의 소년 시절, 시인의 추억이 애잔하고 아름답다. 조랑말이 끄는 '말구루마'를 타고 갈 때 그 말이 꼬리를 쳐들고 내놓는 말똥에서 볏짚 삭은 냄새를 맡으며 따뜻한 풀빵을 연상하는가 하면(시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채소밭에 거름으로 똥을 끼얹고 언덕 구덩이에 호박씨를 심는 부모님 모습이 그려진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도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너는 가난뱅이 울아비의 작은 딸
나의 배고팠던 누님이 아이보개 떠나면서 보고 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봉선화 ( 1950년대 )

가난했던 그 시절에 먹는 입[食口]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남의 집 '아이보개'로 떠나는 누님과 봉선화가 오버랩 된 이 시 역시 「봄, 파르티잔」과 똑같은 기법으로 쓰여졌다. 첫 행의 '작은 딸'이 누님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정춘씨는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잠자리 날다」로 당선된 후 28년만에 첫 시집 『竹篇』을 내서 화제가 됐었다. 그 동안 시인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의 시를 쓰지 않고 세월을 보냈으리라. 그런데 느닷없이 그는 다시 『竹篇』을 들고 무려 28년만에 시단에 복귀하였고, 다시 5년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놓고 있다.
이번 시집 속에 보이는 '뒤집기'의 어법과 이중적 의미 사용의 기법 등 기교 속에 시인 스스로 쉽게 안주하지나 않을까 좀 염려스러운 느낌을 차마 떨치기가 어렵다. 이제 시인은 인생에 대한 해석과 통찰이 무르익을 시기가 아닌가.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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