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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만드는 사람이 사라진다
경향신문 백철 기자 입력 2012.07.14 10:55 수정 2012.07.14 11:59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전 자체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해외에 이메일을 보내는 직장인들에게 어학사전은 필수다. 어려운 어휘가 등장하는 전공서적을 보는 학생들도 사전을 자주 참고한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고 인터넷 사전의 이용이 늘어나면서, 사전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지난해 2월 김종환 NHN 사전 & 전문정보실장(44)이 한국사전학회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네이버 영어사전의 경우 이미 2010년 10월에 월간 사용자 수가 460만명, 국어사전의 경우 315만명을 돌파했다. 김 실장은 "최근에는 모바일 사전 성장률이 PC 사전 성장률보다 높다"고 말했다.
출판사 사전편찬팀 해체 또는 축소
인터넷 사전의 이용이 늘어나면서 종이사전을 쓰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전 출판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전에 담기는 내용(단어와 뜻풀이)을 만드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있다.
사전도 책이다. 책에 '원고'가 필요하듯 사전도 마찬가지다. 사전 원고를 쓰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언어학자나 전문 연구기관에서 사전을 만들고, 출판사는 출판만 담당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내부 편찬팀에서 나름의 기준으로 편찬 원칙을 세워서 원고를 쓰는 방식이다. 출판사 사전편찬자들은 사전의 다양화를 위해서라도 출판사 편찬팀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두산동아, 민중서림, 금성출판사, 시사YBM, 교학사 등 많은 출판사에서 사전을 만들어 왔으며, 현재도 여러 종류의 사전들이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업체는 콘텐츠 개발팀이라 할 수 있는 사전편찬팀을 해체했거나 그 수를 대폭 줄였다. 시사YBM과 교학사는 수년 전 사전편찬팀을 해체했다. 금성출판사도 2010년 사전편찬팀을 없앴다. 민중서림은 한때 사전편찬에 종사하는 사람만 40~50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10여명이 국어사전, 외국어사전 등을 만들고 있다.
인터넷 사전 시대가 열리면서 사전업계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사용료를 받는 식으로 수익구조를 바꿨다. 하지만 이전만큼 상황이 좋진 못하다. 17년가량 사전편찬팀에서 일한 정병호 두산동아 어학콘텐츠기획팀 차장은 "포털이 출판사에 불공정한 계약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종이사전과 콘텐츠 사전(인터넷 사전, 애플리케이션, 전자사전 등)을 합쳐도 이전보다 매출이 준 것은 맞다"고 말했다.
출판사에서 사전을 만들지 않게 되면 포털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사전 서비스의 지속가능성도 흔들릴 수 있다. 어학사전 중 국어사전은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국립국어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연세대 국학연구원 등 연구기관에서 수익과 무관하게 언어 연구와 사전 출판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어사전의 경우 지속적인 개발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관련업계 종사자들의 지적이다.
안상순 전 금성출판사 사전팀장(57)은 "예를 들어 영영사전을 번역한다고 해서 저절로 영한사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원어에 가장 적합한 대역어를 찾아내고,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잘 설명해주는 사전을 만들어야 하지만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고명수 민중서림 편집위원(52)은 "국어사전 외에 외국어사전(한영사전 등 이중어사전)을 편찬할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현재 사업도 사실상 예전에 만들어둔 것을 가지고 파는 정도"라고 말했다. 좋은 외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내외에 출간된 여러 가지 고품질 사전을 참고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할 정규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한사전조차도 2명이 겨우겨우 책을 내는 상황이라는 것이 고 편집위원의 설명이다.
언어 뜻풀이 발전없으면 '죽은 사전'
고 편집위원은 사전을 통해 이익을 내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 다다랐다고 보고 있다. 그는 "출판사에서 종이사전 외에 전자사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지속적으로 개발해 왔지만 전자사전도 거의 쇠퇴했고, 애플리케이션은 포화상태에 다다랐다. 요새 사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남아있는 직원도 대개 40세가 넘었다"며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지 않는 문제도 지적했다.
사전 전문가들은 사전 콘텐츠를 끊임없이 갱신하지 않으면 향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안상순 전 금성출판사 팀장은 "언어는 시간이 갈수록 변하게 마련인데 꾸준히 그 언어를 연구하고, 뜻풀이를 갈고 닦지 않으면 '죽은 사전'이 된다"고 말했다. 안 전 팀장은 "사전의 미래가 암담해지면 언어학적 탐구의 전통과 흐름이 끊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사전학회장을 지낸 박형익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60)는 "사전은 해당 언어를 쓰는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나타낸다"며 국가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국가가 학자들로 하여금 신조어, 새로운 뜻풀이, 세대와 지역마다 다른 발음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이것이 사전의 품질 향상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박 교수는 출판사에 '철학'을 주문했다. 학습사전이나 영한사전 등 '잘 팔리는' 사전에서 나온 이윤의 일부를 사회적 기여 차원에서 언어학적 완성도가 있는 사전 제작에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사전에는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자의 철학도 녹아들어 있다. 이익을 많이 내겠다는 경영방침보다 이익은 조금 줄어들겠지만 수준 높은 콘텐츠 개발을 중시하는 경영방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종환 NHN 실장도 사전의 공공재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국가적인 관점에서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상업적인 사전시장이 너무 약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포털이나 출판사에 '열심히 개발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사전이 꾸준히 개발되지 않으면 우리도 서비스를 할 수가 없다. 소비자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포털이 사전 콘텐츠 개발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일정 부분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일부 네이버 어학사전의 경우 전문가 조언을 통해 신조어 등의 내용을 자체 보강하기도 한다"고 말하며 "독일어, 베트남어 등 여러 가지 외국어사전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하는 등 사전에 관한 꾸준한 투자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병호 두산동아 차장은 한국어를 중시하는 교육정책이 있어야 사전업계도 살고 세대가 흘러도 한국어가 제대로 보전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전찾기 항목이 있다는 점을 들면서 "종이사전시장이 침체됐지만 교과서에 사전찾기가 들어 있는 초등학생 국어사전은 사정이 나쁘지 않다.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서도 사전을 통한 어휘교육을 강화하고 사전을 교과서처럼 여기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나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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