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수첩 2012년 여름호
특별좌담 한국시, 무엇이 문제인가
새 천년을 넘긴지도 벌서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20세기 후반의 한국시에 대한 평가와 21세기 한국시에 대한 전망을 세울 시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20세기 시적 성과 가운데 평가하고 기념할 만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시적 지향들이 21세기를 빛낼 것이지를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중심과 주변,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아우르는 평단의 중진으로부터 한국현대시가 안고 있는 주요 쟁점들을 토론하였습니다.
참석자: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반경환(문학평론가)
유성호(문학평론가)
구모룡(문학평론가-사회)
사회 지금-이곳의 시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시의 경향을 두고 미래파 논쟁이 있었고 시와 정치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시와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20세기말 이래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시와 문화의 연관성에서 시를 이해하려는 생각도 보입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시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 물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는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21세기라는 전대미문의 경쟁, 성과, 위험 사회를 직면하여 시를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전혀 무익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성호 최근 시쓰기에 나타난 뚜렷한 주류적 흐름이나 쟁점은 빈곤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란 무엇인가 혹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일종의 본질론과 역할론은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본질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정'에 관련한 논의였을 것이고, 역할론은 '정치'나 '윤리' 같은 키워드가 그동안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최근 이완되어가는 '시어'의 특수성 문제, 시적 소통 혹은 난해성의 문제 같은 것을 거기에 얹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전통적인 시론에서 가르쳐지고 통용되던 시어의 응축성이나 '소리와 뜻의 조화로운 결속' 같은 기율이 회복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자명한 전제로 있던 것이 필연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가 하는 논의가 가능합니다. 거기에 기층언어 혹은 토박이말 지향의 근대시 흐름을 상찬하는 풍토가 이제는 의미 있는가 하는 '시어=민족어' 같은 층위도 고민해볼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소통이나 난해성 문제는 시적 해독의 어려움을 무분별한 위험성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비평적 차원에서 새로운 태도를 마련해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쉬운 시가 좋은 시가 아니듯 어려운 시도 나쁜 시가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를 인접 문화 양식과 접속하여 활로를 뚫는다든가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시라는 특별히 서정시라는 양식이 독립적 권역을 가질 때는, 다른 문화와의 존재론적 차별성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 점에서 시는 시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에서 관념의 차원을 덜고 현실의 차원으로 직핍하는 태도는 여전히 되찾아야 할 근대시의 기율이라고 생각됩니다. 리얼리즘 흐름을 딱히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도 우리 시대의 현실적 모습의 다차원을 시가 수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시인=지사=지식인'이라는 상이 많이 깨지고 급기야는 언어 세공사로 전락한 느낌이 드는 만큼 시인의 위상 제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석주 한 차례 ‘미래파’ 소동이 지나갔습니다. ‘미래파’의 여진은 없습니다. 태풍 뒤의 고요가 찾아왔다고나 할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래파는 무엇이었나. 그들이 실패했다면 무엇에 실패한 것이었나. 첫째, ‘미래파’의 실험은 무국적 판타지 놀음입니다. 이 계통 불명의 상상 실험은 단성생식(單性生殖)의 실험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공모자들을 낳을 수 없는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드코어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짧은 동안에 많은 시선을 끌어 모으기에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보여 주겠다”고 했지만 스타일의 혁신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부가 없는 시선들의 주체입니다. 그들이 바꾼 것은 소재였을 따름이지요. 셋째, 그들은 소통할 수 없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애초부터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일과성 태풍이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실험적이었습니다. 그 실험은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묘성을 쫓아가는 실험은 정치라는 함의를 놓치고, 정치성을 전면화한 시들은 감각적 새로움을 놓치게 마련이지요.
진은영은 랑시에르의 관점을 원용하면서 그 점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유아론적 주체의 자폐적인 언어일 뿐이라는 비판이 새로운 시인들 머리 위로 빗물처럼 쏟아진 걸 보면, 이 정치적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시인은 지나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자책한다. ‘기묘한 감성적 충격을 생산하는데 몰두했던 시들에서는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이 사라지고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을 최대화한 시들에서는 기묘함이 실종되는구나!’ 이중효과의 적절한 생산은커녕 견디기 힘들 만큼 어정쩡한 상황이 발행하는 것이다.”(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감각과 정념의 논리 속으로 녹아들어간 정치적 함의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의 무의식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정치일 터입니다. 어쨌든 2000년대 시인들의 의식의 층위에서 정치성은 휘발되어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신형철은 2000년대 한국시의 정치학을 살피면서 간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대문자 정치는 끝났다.”(「스키조와 아나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대문자로서의 정치가 2000년대 시에는 유의미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 언설은 2000년대 시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혁명이냐 사랑이냐 라는 선택지를 사람이냐 짐승이냐, 라는 선택지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파’를 포함해서 2000년대 시의 의미를 확정하려는 시도는 아직은 이릅니다. 대문자로서의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올까요? 그 자리는 사소한 일상의 경험들로 채워집니다.
이장욱은 정치색이 탈색시킨 채 “당신은 사랑을 잃고/나는 줄넘기를 했다” 혹은 “나는 사랑을 잃고/당신은 줄넘기를 하”(이장욱, 「정오의 희망곡」)는 사소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나쁜 아버지-권력은 그 일상에 어떤 억압의 그림자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문학적인 것’ 위에 ‘정치적인 것’을 겹쳐낼 수 있었던 지난 연대를 달구었던 악성(惡性) 부성신화의 열기가 완전히 걷힌 2000년대는 무의식의 층위에서조차 정치는 자취없이 사라집니다. 2012년 현재, 한국시는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시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본원적인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김소월-한용운-서정주-김영랑-박목월-조지훈-박재삼-송수권-박정만-김용택-허수경-안도현-장석남-문태준 등으로 이어지는 서정성의 창궐은 한국시의 풍요 그 자체였습니다. 유치환-이육사-고은-조태일-김지하-백무산 등으로 이어지는 저항시는 한국시의 주류였던 여성적 자아의 목소리에 남성적 자아의 목소리를 보태 한국시의 외연을 넓혔습니다. 두 가지의 큰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에 붙는 명칭은 다양합니다.
초현실주의, 무의미, 비대상, 넌센스, 형태파괴, 해체주의...... 따위들. 이상-김춘수-김수영-이승훈-오규원-이성복-황지우-정재학 등의 시가 보여준 선적(禪的) 직관을 시적 형식으로 진화시킨 시인들입니다. 이상(李箱) 이후 한국 현대시에서 선시의 다양한 변주가 나타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김수영은 「꽃잎」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을 썼는데, 이 시들은 한결같이 도저한 비약과 초논리의 직관으로 비벼진 현전에 대한 사유는 이미 선적인 상상력이 범상하게 발휘되고 있습니다.
시에 나오는 ‘순자’는 열네 살 난 소녀입니다. 시인의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어린 일꾼이지요. “너는 열네살 우리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삼일이 되는지 오일이 되는지 그러나 너와 내가 접한 시간은 단 몇분이 안 되지 그런데/어떻게 알았느냐 나의 방대한 낭비와 넌센스와/허위를/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갑한 영혼을/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이라는 구절에 따르면 어린 순자는 ‘나’의 전모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너 혼자서 깜찍하고나”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나는 김수영의 이 엉뚱하고 발랄한 시를 선적 직관으로 일상을 관조하는 선시로 읽습니다.
‘순자’는 ‘나’의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 단박에 뚫어보고 비웃으며, 내가 그 속에서 허우적이는 “썩은 문명의 두께”를 물리칩니다. ‘순자’ 앞에서는 진리도 너무나 간단해서 우습습니다. ‘나’는 그 간단한 것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방황하고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 거대한 낭비의 어처구니없음에 실소를 터뜨린다, 작고 보잘것없는 소녀 ‘순자’는 깨달음을 전하는 선사다. 김수영은 이 말도 안 되는 넌센스를, 집에 일하러 온 소녀를 통해 내적 각성에 이른 제 보잘것없는 생활을 시로 건져냅니다. 바로 이 난센스가, 이 뒤죽박죽인 생활이 곧 시였음을, 그 안에 사사무애(事事無碍)며 만법여여(萬法如如)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김수영, 「꽃잎 삼(三)」을 읽으며 이 안에서 선적인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시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김수영은 한국 현대시의 선적 전통에서 파격이고 일탈이었던 이상의 유일한 정신적 직계입니다. 김수영은 이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한국시의 주류적 흐름인 김소월과 한용운과 서정주는 부정합니다. 제 앞에 있는 한국문학사를 통째로 부정합니다. 상징어법으로 말하자면 베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길을 만듭니다. 그것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입니다. 김수영이 나아간 방식은 임제(臨濟)의 방식입니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 한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자유자재해진다.”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합니다. 김수영은 제 앞에 선 것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유 자재함에 이릅니다. 한국 현대시는 김수영 이후 반-기억, 반-논리로 무장한 선의 화법을 익숙하게 내면화해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새롭지 않습니다.
1980년대 황지우가 형태파괴의 시를 내놓았을 때, 그것은 추악한 당대 정치 현실에 고도로 계산된 선적인 대응이었던 것입니다. 아방가르드와 선의 세계는 이렇듯 진부함을 죽이고 넌센스를 제 존재태로 삼음으로써 상통합니다. 황지우는 “그러니까 형태 파괴의 전략은 1) 우리 삶의 물적 기초인 파편화된 모던 컨디션과 짝지어진 ‘훼손된 삶’에 대한 거울이며; 2)파시즘에 강타당한 개인의 ‘내부 파열’에 대한 창이며; 3) 의미를 박탈당한 언어의 넌센스,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란이었으며; 4) 검열의 장벽 너머로 메시지를 넘기는 수화(手話)의 문법이었다”(황지우, 『황지우 문학앨범』)고 말합니다. 김수영이 먼저 가고, 그 뒤로 오규원과 이승훈이 가고, 다시 이성복과 황지우 등이 나아간 길이 파격과 일탈로 스스로를 특화한 선적 직관의 길이었습니다. 나는 이상-김수영-황지우로 이어지는 선시의 적통 속에서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 담보된다고 생각합니다.
반경환 시란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이란 그 언어를 갈고 닦는 언어의 사제(言+寺)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어의 기능은 사물의 인식기능과 의사소통기능과 의미와 의미의 관계를 맺는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언어가 없으면 사물을 인식할 수도 없고, 인간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할 수도 없고, 또, 그리고, 역사 철학적인 문맥의 차원에서, 의미와 의미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따져볼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문자)는 인간이 발명해낸 최고급의 걸작품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언어에 의하여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어는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며, 몸 자체입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것은 형식의 문제이며,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것은 내용의 문제이며, 시를 통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은 시의 목적의 문제입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것은 시인의 취향과 성격의 문제이며, 자기 자신의 호흡에 맞고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형식을 창출해 내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내용의 문제는 자기 자신의 삶의 내용을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학자로서, 회사원으로서, 노동자로서, 농부로서, 관리로서, 기업인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할아버지로서, 할머니로서 그 삶의 내용을 쓰되, 가능하면 정직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기교는 삶을 질식시키고, 기교는 시를 질식시킵니다. 더럽고 타락하고 추악한 모습들, 더없이 간사하고 교활하고 잔인한 모습들, 수많은 질투와 위선의 모습들, 더없이 인자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한 몸을 희생시켜가며, 타인과 이웃들을 살리고 공동체 사회를 구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발가벗었다는 생각까지도 더욱더 발가벗기고, 한 인간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도덕이 생겨나고, 미학이 생겨나고, 사상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란 이 세상을 더없이 맑고 깨끗하게 만들고, 모든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언어 예술입니다. 시인의 사명과 의무는 언어의 사제로서 언어를 더없이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켜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어의 역사와 그 위상을 이렇게 말해 보고자 합니다. ‘몽고어 대 한국어’, ‘중국어 대 한국어’, ‘청나라의 만주어 대 한국어’, ‘일본어 대 한국어’, ‘영어 대 한국어’의 역사는 우리 한국어의 수난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한국인들은 그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모든 점에서 지배민족의 가치관을 받아 들이고, 자기 자신들의 언어와 가치관을 평가절하하는 ‘자기 비하’의 역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역사는 식민지의 역사이며,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역사이지요.
따라서 그 사대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지배계급, 혹은 상류계급의 인사들은 ‘아메리카’, ‘뉴욕’, ‘워싱턴’, ‘글로벌’, ‘어젠다’, ‘태스크 포스’, ‘프로젝트’, ‘모라토리움’. ‘네거티브’, ‘포지티브’, ‘서브프라임 모기지’, ‘커밍 아웃’, ‘웰빙’, ‘프리미엄’, ‘미디엄’, ‘프린스’, ‘BK', 'TK', 'MB', 'DJ’, 'SKY,' 등의 수많은 외국어들을 그들의 교양과 신분과시용으로 사용하게 되고, 대다수의 어리석고 바보와도 같은 대중들은 비천하고 더러운 모국어로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고, 그 상류계급의 인사들과 피지배계급의 인사들은 두 번 다시 화해할 수 없는 양극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어의 몰입교육은 한국어의 쇠퇴와 우리 한국인들의 몰락을 뜻하게 됩니다. 또한 영어의 몰입교육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을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고, 우리 한국인들을 세계 속의 천박한 야만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미국의 가치, 미국의 사상, 미국의 언어, 미국의 문화가 하나의 대홍수처럼 범람하게 되고, 하지만 영원히 미국인이 될 수 없는 소수의 상류계급의 인사들은 그 모든 것을 미국의 입장에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이민족의 문화에 맞서서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와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도, 대한민국의 정치도 미국식이고, 대한민국의 경제도, 대한민국의 학문도 미국식입니다. 대한민국의 예술도, 대한민국의 체육도 미국식이며, 대한민국의 사회도, 대한민국의 문화도 미국식입니다. 하지만 이 제 정신이 없는 우리 한국인들이 단, 하나 흉내낼 수가 없는 것은 미국의 문명과 미국의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는 최고급의 지혜, 즉, 사상과 이론을 정립해낼 수가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최고급의 인식의 대제전’, 즉, ‘지혜싸움의 대투쟁’에서 패배를 하게 되면 그 민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한국어의 역사와 그 위상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한국어의 위기는 소위 미래파 시인들이라는 국적 불명의 괴물들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언어의 난삽성과 혼란성,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애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은 우리 한국의 현실을 아주 유효적절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어로 시를 쓰지만, 그들의 한국어 속에는 수많은 외국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고, 그들은 외국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것 같지만, 소위 고급영어는 커녕, 미국의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낼 수 없는 사상(지혜)이 없는 무뇌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종 심급은 경제가 아니라 언어입니다. 영어의 제국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말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주체자나 민족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분단국가이며, 전시작전권을 외국군대가 갖고 있는 몰주체적인 국가이기도 합니다. 남북분단은 언어의 분단현상이며, 외국어의 홍수는 언어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온갖 사색당파와 부정부패가 남발하는 정치문화의 현상은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소속한 당파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언어의 혼란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돈이 돈을 낳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통해서 소위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을 파편화시키는 현상은 언어의 오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 소위 미래파 시인들은 그들이 문화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과거의 문화유산을 모조리 거부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더욱더 측은하고 불쌍한 젊은이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먹고 살 일은 더욱더 어려워졌고, 그들이 떠맡고 나가야 할 고령화 사회는 너무나도 어렵고,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너무나도 싸늘하고 잔인하게 이기적인 관계로 변해 버렸습니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비역사성과 무의식, 혹은 내면으로의 침잠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정신분열증 속으로의 도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양해열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시인의 사명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1.1에서 2.9 사이의 난이도로 입수하는 비오리,//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굴러/ 산 그림자가 놀라지 않게 물풀이 다치지 않게 날개 접고 다리 뒤로 뻗어 몸의 곡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방금 사선으로 잠수한 비오리,// (......)/ 피라미가 비오리 혀, 독설을 물고 훨훨 타는 갈밭 위로 붉은 노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찰나// 아, 공중사리탑// 그가 낡은 처마 끝으로 갔다/ 고난도의 다비식, 전광판도 기록하지 못했다.” (양해열, [難易度 3.0의 入寂]({반경환 명시감상} 제3권) 부분
양해열 시인의 [난이도 3.0의 입적]은 ‘비오리 대 피라미’라는 극적인 대결구도를 통해서, 우리인간들의 가장 아름다운 삶과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연출해낸 제일급의 명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난이도 3.0의 입적]은 해탈이고, 열반이며, 득도입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며, 언어의 비옥한 텃밭입니다. 언어는 ‘난이도 1.1에서 2.9 사이로’ 입수하는 비오리처럼 살아 있어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오리의 혀’와 그 ‘독설을 물고 훨훨 타는 갈밭 위로’ 입적하는 피라미처럼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먹는 자가 먹히는 자이고, 먹히는 자가 먹는 자인 생존의 바다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은 그 어떠한 군더더기도 하나가 없는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죽음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오리가 피라미를 낚아 챈 것이 아니라, 피라미가 비오리의 혀와 그 독설을 물고 어떠한 전광판도 기록할 수 없는 ‘공중사리탑’을 쌓았다는 양해열 시인의 [난이도 3.0의 입적]의 경지를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양해열 시인의 [난이도 3.0의 입적]은 한 마리의 피라미의 최후를 통해서 언제, 어느 때나 ‘백절불굴의 장인 정신(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으로 가장 아름다운 삶과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연출해낸 제일급의 명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 20세기를 돌이켜 식민지 시기의 시인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시사에 남을 시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이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먼 후일 몇 명의 시인이 한국시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 예단하긴 어렵습니다. 그 동안 꾸준하게 높이 평가되어온 시인들이 다수 있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20세기 후반시사에서 주된 의미망을 형성할 시인으로 어떤 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21세기라는 지금 혹은 미래의 시점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장석주 김소월의 집·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픔을 고유의 가락에 싣는 노래들, 한용운의 님 없음에서 비롯된 슬픔의 형이상학적 승화, 백석의 서북 방언 속에 펼쳐지는 풍물시, 정지용이 보여준 우리 말의 황홀경, 서정주의 능청과 웃음의 시들, 이상의 위트와 패러독스, 유치환의 한자(漢字)가 많은 거칠고 투박한 저항시, 윤동주의 곧고 바른 내면 도덕의 한결같음, 조지훈의 성리학에 바탕 위에서 펼쳐지는 의고적(擬古的) 지사주의 등은 우리 시의 자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1950년대 이후 한국 시사에 누가 남을 것인가라는 논의는 그 진폭이 넓을 것이다. 진폭이 넓을 만큼 당연히 합의된 결론을 끌어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시의 스펙트럼이 확대되고, 외연이 커졌기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현상이다. 김수영의 아이러니와 도저한 자기부정, 김남조의 종교적 숭고미로 승화된 심화된 서정성, 박재삼의 내재화된 토속 정서 속에 오롯하게 빛나는 천진한 슬픔, 신경림의 쇠퇴하는 농경문화에 드리워진 음울한 인류학적 보고서, 천상병의 천진무고한 어여쁨, 정, 김춘수의 저 집요한 무의미의 철학시, 김종삼의 일관된 음악적 투명성, 박재삼의 내재화된 토속 정서 속에 오롯하게 빛나는 천진한 슬픔, 고은의 민족 박물지를 그려내는 ‘만인보’의 역동적 상상력, 신경림의 쇠퇴하는 농경문화에 드리워진 음울한 인류학적 보고서, 천상병의 천진무구한 어여쁨, 황동규의 시적 주체와 풍경 사이의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놀라운 지적 통어력, 정현종의 우주적 울림, 오규원의 풍경과 사물을 낯설게 하기, 김지하의 풍자와 추의 미학, 박정만의 난만한 서정성, 서정춘의 단시, 송수권의 남도 가락, 최승호의 냉소적 세계 소묘, 이성복의 요설, 황지우의 파괴와 해체의 양식화, 김혜순의 무의식의 언어를 끌어내는 도발적 상상력, 최승자의 섬뜩한 자기모독, 채호기의 에로스의 미학 언어들, 기형도의 숙성된 절망, 황인숙의 발랄하고 명랑한 비관주의, 허수경의 순정한 사랑시, 김영승의 슬픈 자기(自己) 희화(戱畵), 김기택의 묘사를 사회적 메시지로 승화시킨 사물시들, 이문재의 생태주의적 서정시, 나희덕의 모성적 끌어안음, 송찬호의 작은 것들을 감싸고 옹호하는 따뜻한 수사학, 황병승의 시적-아비 부정하기, 장석남이 보여주는 고요의 동학, 문태준의 느림 지향의 생태주의..... 이 모든 시인들이 20세기 후반 시사에서 주된 의미망을 구축할 것이다. 물론 하나의 예단이다.
반경환 1950년대 이후, 한국 시문학사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시인을 21세기라는 관점에서 말해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고전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히 살아남은 작품에 주어지는 말이며, 호머의 {일리어드}나 {오딧세우스}, 보들레르의 {악의 꽃},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로버트 프루스트의 {불과 얼음}, 파블로 네루다의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작품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의 시인들은 아직 이러한 세계적인 대작가들의 역량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형식주의, 표현주의, 일본의 하이쿠 등과 같은 새로운 형식과 사상(내용)을 독창적으로 창출해낸 시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새로운 형식과 사상(내용}을 창출해내지 못하면, 그는 진정한 시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노벨상은 새로운 이론(발명), 새로운 사상의 창시자에게만 주어지고 있으며, 우리 한국인들이 노벨상과 거리가 먼 것은 자기 자신의 사유를 역사 철학적인 토대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시문학사에 국한시켜 말해본다면, 1950년대 이전에는 김소월, 이상, 윤동주, 백석, 정지용 등이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송수권,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최승호, 장석주, 송재학, 박노해, 김기택, 기형도, 송찬호, 손택수, 문태준, 이대흠, 양해열, 박성준 등 중에서, 그 몇 명이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김수영의 시세계는 한국적인 정한의 세계(염세주의와 패배주의)를 힘의 세계로 끌어올린 세계이며, 그의 장인 정신은 순교자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춘수의 ‘무의미의 세계’는 일체의 대상과의 관계를 지워버리고, 언어와 이미지를 통한 상상력의 혁명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송수권 시인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문단의 주류를 벗어나 변방의 시인을 자처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의 [김치와 서정시] 같은 서정시의 세계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세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성복의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아버지 살해의 세계이며, 그의 가장 독특하고 역동적인 언어의 세계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성복 시인만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염세주의, 그리고 박남철의 과감한 형태파괴([사자], [시인연습], [용의 모습으로], [텔레비전])와 최승호의 문명비판의 세계({고슴도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장석주의 은자隱者 혹은 성자의 삶의 세계({몽해항로}, {붉디 붉은 호랑이}, {오랫동안}), 송재학의 {내간체를 얻다}의 세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의 세계, 김기택의 {태아의 잠},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손택수의 {나무의 수사학}, 문태준의 {가재미}, 이대흠의 {귀가 서럽다}, 양해열의 {영산수궁가} 등이 떠오릅니다. 판소리 서사시집 {영산수궁가榮山水宮歌}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설이요, 그 극적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는 희곡이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가 노래이기 때문에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요컨대 판소리 서사시집 {영산수궁가}는 소설, 희곡, 구비서사시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지식과 그 시적 재능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전인미답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연보호와 생태환경의 측면에서----2030년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4대강 사업을 비판하고 있는 제1부의 [영산수궁가]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또한 여순사건을 재조명하고 있는 제2부의 [저어새타령]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판소리 서사시집 {영산수궁가]는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자 자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유성호 20세기 전반기는 소월, 만해, 지용, 백석, 이상, 임화, 윤동주 중심으로 어느 정도 문학사적, 비평적 합의를 취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이분들이 20세기 후반기에는 문학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역이 20세기 전반기로 정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간 미당, 청마, 목월, 혜산, 지훈 등의 경우는 20세기 후반까지 지평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미당과 목월이 중요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청마, 혜산, 지훈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한정하여 볼 때는 여전히 1950년대부터 본격적 활동을 했던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이 중요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용래나 박재삼, 박인환, 김종삼, 한하운, 신동문 같은 다소 미니멀한 활동을 보였던 이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1970년대의 김지하, 고은, 신경림, 정현종, 황동규, 오규원, 최하림, 마종기, 조태일, 김명인 같은 이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남조나 홍윤숙, 강은교, 천양희 같은 여성시인의 몫도 중요하고요. 현재의 시점으로 본다면 갱신 가능성이 높은 시인은 김수영과 김춘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성복, 이시영, 기형도, 최승자, 박노해, 백무산 같은 이들도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시조의 몫도 살펴야 하는데 가람, 이호우, 이영도, 정완영 같은 이들이 중요합니다. 추후 더 많은 논의를 하겠습니다.
사회 20세기 후반의 시단에서 지나친 평가를 받은 시인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부당한 소외를 겪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상징 조작이나 해석공동체의 독점적인 평가로 인하여 과대평가된 시인이 있다면 어떤 분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분이 있다면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한 해석과 평가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다 구체적인 상징조작의 사례를 들어서 문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울러 소외된 분이 있다면 그 요인이 무엇이고 오늘날 새롭게 평가하는 방안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경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지나친 평가를 받은 시인도 있고, 반대로 부당하게 소외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이성복, 황지우, 김사인, 도종환, 김경주, 황병승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김종삼, 송수권, 송종규 등이 해당될 것입니다.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등은 창비와 문지에서 일종의 대작가시스템, 혹은 스타시스템에 의해서, 그들의 업적과는 무관하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들로 집중조명을 받고, 모든 문학상을 싹쓸이해간 시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고은과 신경림은 창비와 문단을 넘어서서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특전과 특혜를 받은 시인들이기도 하지요. 한국사회에서 ‘창비’와 ‘문지’는 문화권력 그 자체이며, 그들의 문화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비판했다가는 이 반경환이처럼, 이름도, 얼굴도 없이 쓰디쓴 천형의 형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마르크스도 비판을 받고 프로이트도 비판을 받고 있는데, 제가 왜 그처럼 쓰디쓴 천형의 형벌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비판의 자유’가 없는 대한민국 사회의 희생양이며, 대한민국의 문화권력의 희생양입니다.
어떤 집단이든지, 그 집단이 집단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이념이 더욱더 중요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무조건의 충성과 맹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정 집단이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부르고,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부르게 되면, 그것은 곧 ‘진리’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백낙청이 고은과 신경림을 민족시인이라고 부르고, 고은을 김수영보다도, 서정주보다도 더 뛰어난 시인(고은 시선집 {어느 바람}의 발문)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학상들을 싹쓸이해간 황동규와 정현종 시인에 대한 ‘문지’ 인사들의 찬양은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창비’하면 고은과 신경림이고, ‘문지’하면 황동규와 정현종입니다. 이 대시인들이 창비와 문지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상징이며, 이 상징조작은 철두철미하게 오인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작동을 하게 됩니다.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은 대한민국의 불세출의 시인들이며, 그 시인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어떠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게 되면, 그는 곧바로 이 문화권력으로터의 쓴맛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든 시인들과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지식인들의 근 본 사명인 비판의 능력을 무장해제당한 자들일 수밖에 없지요.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 “현대는 바로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이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그 신성에 의하여, 그리고 입법은 그 존엄에 의하여 비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이든 입법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당연히 초래할 것이며, 또한 이성이 그의 공명 정대한 비판을 견디어 낸 것에만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칸트가 서양의 철학의 역사에서 지난 천 년간, 마르크스 다음의 두 번째의 사상가가 된 것은 이처럼 비판철학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모든 학문의 예비학입니다. 비판의 자유가 없는 나라는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독재국가의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비판만이 또 위대합니다. 이 비판의 제일의 기능은 ‘정화기능’이고, 제이의 기능은 ‘강화기능’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삼의 기능은 ‘성화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정화기능’은 더없이 더럽고 추한 때를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기능이며, ‘강화기능’은 그 순수한 영혼의 주체자가 가장 사악한 무리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화기능’은 그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인간----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꿈과 희망을 가져다가 주고 ‘인간이라는 종’을 건강하게 해준 인간----을 부처와 예수와도 같이 성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은도 염세주의이고, 신경림도 염세주의자입니다. 황동규도 염세주의자이고, 정현종도 염세주의자입니다. 이 염세주의는 패배주의의 산물이며, 이 패배주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약소국가의 국민으로서 우리 한국인들은 문화선진국이나 거대한 제국의 건설은 커녕,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고은의 시 [광장 이후]({어느 바람}를 살펴보면, “아 독재가 있어야겠다/ 쿠테타가 있어야 겠다”라는 시구가 있는 데, 그는 마치, ‘밀실공포증’을 앓고 있는 정신병자와도 같습니다. 만인평등과 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자, 모든 인간들이 “사이버 속”의 “누에”가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 벌레의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독재정치가 새롭게 출현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민주화의 대표적인 인사로서 민주주의 사회가 이루어지면 어떠한 사회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민주주의 사회가 이루어지면, 우리 한국인들을 어떻게 인도해갈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목표도 없었던 판단력의 어릿광대와도 같았던 것이지요. 정치(민주화 운동)란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추진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들을 제시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책들을 실행해 나가는 데서, 여러 이익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가면서,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키고 고귀하고 위대한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 정치 지도자(민주화 인사)의 덕목인 것입니다. 그는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의 표본으로서, 적당히 민주화 인사의 탈을 쓴 채, 그토록 오랫동안 ‘군사독재정권과의 치정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지요.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독재정권이 없었다면 민주화 인사로서의 고은은 커녕, 민족시인이라는 월계관마저도 그는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고은의 [미당 담론]은 자기 자신의 스승을 향해서, “천도天道도 옳으냐 그르냐를 물어야 한다”고 하면서 미당을 비판한 글입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전형적인 ‘뒷북 비판’이며, 두 가지의 점에서 크나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미당이 살아 있을 때 비판을 감행하지 못한 것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을 연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한국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와 알베르 까뮈처럼, 미셸 푸코와 데리다처럼, 스승과 제자간의 생산적인 논쟁을 연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논쟁의 문화를 퇴보시켰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서정주에게 그의 도덕적 타락----친일행위 및 독재권력과의 결탁----에 대한 단죄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경림은 그의 대표작인 「農舞」에서, 기껏해야 2- 30대의 젊은 나이로,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 맡겨두고”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가 술을 마시고”,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라고, 자기 자신과 처 자식들과 부모형제들의 삶을 팽개쳐 버린 건달들의 삶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퇴폐적인 삶은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뿔」, ?뿔?, 창작과비평사, 2002))라고 노래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민족시인의 반열에 오른 2000년대에도 도저한 염세주의자(패배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일제 식민시대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과 4.19 혁명과 5.16 군사쿠테타를 거쳐서, 언제, 어느 때나 묵묵히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의 전체의 삶을 모독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염세주의자인 신경림, 1956년 등단 시절부터 1970년대의 ?農舞?, 그리고 2002년의 ?뿔?에 이르기까지 염세주의자인 신경림, 노무현과 민주화 운동을 할 때에도, ‘무명산악회’의 제일급의 인사들과 산행을 할 때에도, 날이면 날마다 축제를 하듯이 문학상을 받고 또 그 숱한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할 때에도 너무나도 원통하고 허무해서 염세주의자인 신경림, 울 때도, 웃을 때도, 술을 마실 때에도,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를 걱정할 때에도 염세주의자인 신경림----. 하지만 이 신경림이 염세주의의 역사 철학적인 배경과 그 의미를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이고, 이제는 어느 누구보다도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낙천주의라면 과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요? 신경림의 초기의 염세주의는 유 소년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 그 염세주의는 오늘날 이 땅에서 진정으로 고통을 받고 신음을 하고 있는 사회적 하층계급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자장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가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의 모든 친구들, 예컨대, 고은, 백낙청, 유종호, 김우창,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송건호, 리영희, 박현채, 김진균, 안병직, 이호철, 강만길, 염무웅, 김병걸, 임채정, 이부영 등과도 같은 수많은 정치인들과, 법조인들과, 경제인들과, 학자들과, 예술가들도 다같이 가난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의 염세주의의 촌극은 사회적 하층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자장가이며, 대규모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은과 신경림의 시적 성취도 지나치게 과대포장된 불량품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해갈 그 어떠한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늘날 고귀하고 위대한 국가는 영토의 넓이에 있지도 않고, 그 국가의 구성원들의 머리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암, 이삭, 야곱, 모세, 예수,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 베르그송, 스필버그, 아인시타인 등의 유태민족처럼, 한 민족이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되는 것은 그 민족이 어떠한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작가)를 배출해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공자, 노자, 장자, 맹자 등의 중국인들, 존 로크, 토마스 홉스, 프란시스 베이컨, 셰익스피어, 뉴턴 등의 영국인들, 데카르트, 사르트르, 발자크, 위고, 나폴레옹 등의 프랑스인들,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괴테, 베토벤, 바그너의 독일인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가장 고귀하고 찬란한 인식의 대제전은 혈통에 의한 것도 아니며, 외모에 의한 것도 아니며, 오직, 최고급의 논문(작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한국인들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이 된 것은 이러한 지혜싸움의 대투쟁, 즉, 가장 고귀하고 찬란한 인식의 대제전에서 패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더럽고 추하게 바라보면 이 세상은 더럽고 추하게만 보입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게 풍요롭게 바라다 보입니다. 저의 {행복의 깊이} 1, 2, 3, 4권은 지난 20여 년 동안 피와 땀과 눈물로 쓴 낙천주의자의 행복론입니다. 고은과 신경림은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의 표본들이고, 그것은 황동규와 정현종도 예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해미읍성 순교 터를 돌아보다가 예수가 말했다./ “저들처럼 이름도 없이/ 두 팔 제대로 벌리고 달릴 십자가도 없이/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달려 건들거리거나/ 흠씬 매맞아 죽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나보다 웃길이지.”/ ―황동규, 「해미읍성에서」(?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 지성사 2003년) 부분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 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정현종,「바보 만복이」 부분
하지만 황동규와 정현종의 시적 성취는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어 있고, 그들의 세계관은 철두철미하게 소시민의식으로 축소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염세주의의 산물이며, 패배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명문대학교의 교수이자 제일급의 시인인 그들이 옹호하고 있는 인물들은 기껏해야 “저기 이름없는 풀꽃”이거나 “흠씬 매맞아 죽은 사람”이거나 “바보 만복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도 그들이 자기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사회적 하층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자장가를 부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대규모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황동규와 정현종은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특권층의 인물이며, 그들의 사명은 마치, 셰익스피어나 괴테처럼, 엘리어트나 보들레르처럼, 세계적인 대작가(대시인)가 되고, 우리 한국인들을 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할 수 있는 대스승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대학교수로서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 우리 한국인들도 하루바삐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흄,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프루스트 등의 세계적인 대작가를 배출해내야 한다고 역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또한 그들은 대학교수로서 우리 나라의 어린 아이들을 입시지옥---문화선진국에는 입시지옥이 없습니다----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 즉 문화선진국의 교육제도를 하루바삐 받아들이자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황동규와 정현종 역시도 이미 역사 철학적으로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는 지식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 공산주의, 낙천주의, 염세주의, 실존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서구의 사상에 그토록 경도되어 있었으면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카르트, 칸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헤겔, 마르크스, 니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의 철학은 물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재는 모든 인류의 스승이며, 천재 생산의 교수법을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염세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염세주의를 통해서 돈과 명예와 명성을 얻고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사회비판은 뜬구름 잡는 식의 익명비판이며, 어느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는 曲學阿世의 비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에 이어서, 이성복, 황지우, 도종환, 김사인, 그리고 황병승, 김경주 등도 문화권력을 등에 업고 지나치고 과도하게 평가를 받은 점이 있지요. 이성복은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라는 시구에서처럼 아버지 살해의 대표적인 선구자이며 그것에 못지 않게 시적인 업적을 쌓은 공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후, ‘연애시’로 도피를 하게 되고, 이제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삶을 부단하게 억압하고 감시를 하게 되지요. “완벽한 허위, 완벽한 범죄”의 세계에 가담하면서, 한국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게 되지요. 황지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지우는 문학적으로는 모더니스트이고, 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이지요. 또한 그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그 어떠한 출구도 마련하지 못한 염세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는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지요. 황지우의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천사적인 사랑은 지식인으로서의 교활한 위선일 때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자들, 즉 문화권력자들이 염세주의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가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1990년대 초, ‘불세출의 대형비평가’ 김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한국사회에서 영원한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죄인이기는 하지만, 비평가란 ‘위험스러운 물음표, 불쾌한 바보’라는 니체(영원한 인류의 스승)의 말을 더없이 신봉하고 있는 낙천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문단에서 가장 성공한 자들, 예컨대, 김현, 김윤식, 백낙청, 유종호, 정과리, 이문열, 황석영,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이성복, 황지우, 박노해, 김용택 등을 정면으로 비판했지, 상대적으로 약하고 힘없는 자들은 절대로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무한한 성원과 격려의 뜻으로 너무 지나치게 칭찬을 한 바가 있습니다. 소위 성공한 자들이란 대사기꾼이라는 말이 있듯이, 만일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비평가들은 비평가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능하면 젊은 친구들, 소위 미래파들에게는 어떠한 비판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소위 미래파--광인파들의 장래는 전혀 밝지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의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고, 이 고령화 사회의 기생동물들(캥거루)로 태어난 것이 소위 그들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이미, 벌써 일가를 이루고 부모님 곁을 떠날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버지(문화권력자= 창비와 문지 등)의 유산만을 상속받으려고 하는 그들의 행태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광인파들은 아마, 언젠가 나이가 들어서 제 정신이 돌아오면, 자기 자신들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정체불명의 시들을 마치 자기 자신들의 시적 사기의 증거물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작가)를 배출해내지 못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문화산업의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그 책 판매대금과 함께, 캐릭터, 영화 등의 스토리산업으로 벌어들인 돈만해도 IT 산업의 몇 배가 된다고 합니다. 영화, 연극, 드라마, 뮤지컬, 만화까지도 그 밑텍스는 문학이고, 이 문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루바삐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시단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시인은 김종삼 시인과 송수권 시인과 송종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종삼 시인의 시선집 {평화롭게}에는 [북치는 소년], [민간인], [라산스카], [묵화], [實記], [추모합니다],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 씨], [어부], [술래잡기], [시인학교] 등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있고, 저는 그의 시세계를 [폐허 속의 시학]으로 살펴본 바도 있고, 제 {행복의 깊이]에는 어느 시인보다도 그의 시를 많이 다룬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백의 미학을 더욱더 중요시 하는 탐미주의자이며, 동화적 상상력과 함께 천사적인 사랑을 지닌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문화적 권력과는 거리가 먼 주변인으로서, 그 어렵고 힘든 삶마저도 이처럼 아름답고 풍요롭게 노래한 바가 있었습니다. 시(예술)는 어렵고 힘든 삶마저도 이처럼 아름답고 풍요롭게 미화시키면서, 그리하여 끝끝내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와 그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송수권 시인은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꿈꾸는 섬},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파천무}, {아내의 맨발},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 등의 뛰어난 서정시를 쓴 바가 있습니다. 그는 창비와 문지에서 시집을 낸 바가 있으면서도, 오히려, 거꾸로 외롭고 고독한 주변인의 삶을 선택하고, 서정시의 순교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오히려 거꾸로 전라도의 언어와 그 가락으로, 자기 자신의 고향인 전라도를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여름 낙조], [김치와 서정시] 같은 주옥같은 서정시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송종규 시인의 시집으로는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고요한 입술},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녹슨 방} 등이 있으며, 현재는 대구에서 시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송종규 시인의 시세계는 ”나는, 아무래도, 나에게는 불편한 옷“이라는 [폐가}에서처럼, 불행한 의식의 산물이며, 그의 회의주의(실존적 회의주의)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송종규 시인의 운명의 지배자인 거미는, “아비며 어린 새끼며 집요한/ 탐욕의 본능까지, 호시탐탐” 그의 튼튼한 집마저도 얽어맬 것이며, 시인의 이름 대신에, “목화 솜 같은 실을 뽑아 조개구름 같은” 그의 “문패“를 내걸게 됩니다. 따라서 시인은 우주적인 미아일 뿐, 그의 집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는 불행한 의식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치열하게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이 세상과 그 모든 것을 부정해 나가게 되는 그의 회의주의는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난 시로서 그 업적을 낳게 됩니다. 그는 요즈음 미래파의 시인들처럼, 사회 역사의식을 괄호치고, 내면의식으로의 세계, 즉, 정신분열증의 세계로 도피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시인 수첩}에서도 이처럼 훌륭하고 뛰어난 시인에게 한 번 특집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성호 실명 거론하기가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가령 과대평가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먼저 시집 판매량과 그에 따른 인지도 상승 같은 것이 외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낸 시인의 명성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대학에 오래 재직한 시인의 경우나 매체에 오래 종사한 분들의 경우 후학이나 출신들이 축적해놓은 상찬적 비평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일종의 과대평가 혐의가 생겨나지요. 제 생각에는 이런 경우 작품성이나 갱신 가능성 혹은 후진들의 섭렵이나 수용 가능성보다는 당대의 어떤 인적, 매체적 구도가 명성을 만들고 파급하며 거기에 제도적, 비평적 후원이 그러나 성가를 확대해가는 것 같습니다.
이와는 달리 소외 그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당연히 잘 팔리지도 않고, 대학이나 매체 귀속이 약한 분들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역에서 작품에만 골몰하는 분들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사실 1950년대 시인들 중 매체나 대학으로 귀속되지 않았던 박용래, 김종삼, 박인환 같은 이들이 떠오르네요. 1960년대의 경우에도 신동문, 이성부 같은 이들이 있고요. 새로운 평가 기준은 시의 존재 방식과 연동된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대학과 매체가 끊임없이 평가의 카르텔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는 거기에 흡수되지 못한 이들의 소외가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김수영의 경우 이런 걸 넉넉히 넘어서거든요. 특정 대학이나 매체가 독점하지 않은 그에 대한 대중적, 학문적 관심은 일정한 소외와 상찬의 실상도 작품의 파급력만은 못하다는 걸 입증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지금-여기, 그걸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따져보아야 합니다.
장석주 평가의 과장은 해석공동체의 소산이기 보다는 대중의 독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시집이 많이 팔려서 허명을 얻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 시인들이 몇 명 있지만 우려할 바는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해석공동체에 의해 능동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시인들을 언급하고 싶다. 이를테면 박인환, 김현승, 박용래, 전봉건, 김현승, 이형기, 장만영, 구자운, 김관식....... 같은 좋은 시인들이 20세기 시사에서 홀대받은 경우는 해석공동체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사회 오늘날 시전문 매체가 매우 많습니다. 아울러 소위 메이저급 종합 매체에서도 부단하게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인 배출과 시집 생산의 제도적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서 말한 상징조작 또한 이러한 제도와 연관이 있을 것인데 바람직한 방안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가령 새로운 형태의 합의와 통합을 통하여 시집을 계열화하는 방법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또한 등단 과정과 그 이후 시인의 활동에 관한 광범한 사회학적이고 비평적인 평가 작업이 뒤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저항도 있을 것이고 쉽게 동의를 이끌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일종의 창작 윤리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장석주 시전문 매체의 난립은 2000년대 들어 가속화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시인도 양산되고 있고, 시집도 많이 나온다. 이것을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문제의 난감함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좋고 나쁜 시들과 시집을 가리고 평가하는 비평가의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런데 시 비평가도 덩달아 양산되고 있고, 이들이 난립한 각각의 시 전문 매체에 들러붙어 기생한다. 서로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상호공존하는 셈이다. 창작 윤리의 정립도 개인의 몫이다. 제 돈 들여 시집을 펴내는 사람을 뜯어 말릴 수는없다. 제도적으로 선택과 배제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 공간에서 시전문 매체의 난립, 시인과 시집의 양산은 불가피해 보인다.
유성호 신인 배출 시스템은 전통적인 신춘문예가 여전히 문청들의 매혹적 등용문으로 기능하고 있고, 각 문예지들도 창간과 동시에 신인들을 뽑고 있습니다. 이제 문은 그야말로 널어질 대로 넓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춘문예의 경우 최근 표절 시비가 몇 건 있고 난후 신뢰가 많이 떨어졌고, 단시일 내의 평가 작업에 대한 회의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춘문예가 만약 사라지거나 축소된다면 우리 나라 예비 문인들의 열망과 숫자는 반쯤 꺾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저급 신문사에서 이렇게 100년 가까운 전통을 유지해주는 건 그 점에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집 출간은 이제 완전히 시장의 몫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신생 출판사들도 과감히 뛰어들고 있고 이제는 어느 누가 제어하거나 계도할 수 없는 자율성과 폭발성과 자동적인 질적 위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자본과 상징 권력이 결속하여 만들어내는 질적 위계화가 요즘 느슨해지는 형국인지라, 오히려 저는 양적 확대는 환영하되 비평적 개입을 통해 상징 권력이 행하는 서열화에 저항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등단 과정이나 시집 출간 그리고 시인들의 활동 영역에 대한 어떤 외적 개입도 이제는 무망하기 때문에, 저로서는 시장의 자본과 상징 권력의 결속 과정으로 편제되는 일률성에 균열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경환 계간시전문지 {애지}의 편집자로서, 지혜사랑 시집을 출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철학예술가(비평가)로서 요즈음 시전문지의 출현과 수많은 시인들의 배출현상을 매우 우울하고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지요. 대한민국은 지난 시절 군사독재정권이 ‘시의 시대’, ‘소설의 시대’, 아니 ‘문학의 시대’를 매우 역설적으로 이끌어 주었다고 할 수가 있지요. 군사독재정권은 전혀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었고, 그들의 무소불위의 권력의 횡포는 오히려 수많은 지식인들을 문학의 길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지요. 유시민, 김영환, 박노해, 양성우 등이 그 대표적인 증거일 것입니다.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철학, 역사학 등은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서 학문연구를 개진하는 분야이지만, 문학은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화법, 즉, 일종의 우화가 가능한 장르입니다.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철학, 역사학 등의 출구가 막혀 있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외치기 위하여 시(문학)를 읽고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지요. 1980년대의 시의 시대는 수많은 베스트 셀러와 수많은 제일급의 시인들을 배출해냈지만, 그러나 군부독재가 물러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90년대는 문학의 영역이 지나치게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상매체와 전자매체에 의한 문자매체의 쇠퇴의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은 시의 영역의 축소 현상과는 정반대로 무수한 잡지의 출현과 수많은 시인들의 출현 현상은 매우 이상하고도 기이한 현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이상하고도 기이한 현상은 1980년대의 시의 시대의 산물이고, 시의 시대가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 즉, 문학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문학지망생들로 인도했던 것이지요. 1990년대의 각대학들마다 문예창작학과를 개설하고 수많은 문학지망생들을 불러 들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문학의 시대는 그 역사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수많은 잡지들의 범람과 수많은 시인들의 등장은 역사적 쇠퇴기에 나타나는 일종의 거품(과잉)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황금만능의 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문학은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두 번째는 문예창작학과나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마저도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시인과 작가들의 고령화 현상과, 그리고 신인들의 연령이 고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문지나 창비, 문학동네, 민음사 등은 그나마 얼마되지 않은 젊은 시인들을 잡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고, 그밖의 잡지들은 젊은 청년들을 신인으로 배출해낸다는 것이 밤하늘에서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몇몇의 특별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문인들의 모임에서 젊은 시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40대가 가장 젊은 층에 속하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5~60대입니다. 나이 50이 되면 이 세상과 삶에 대한 뜨거웠던 열정도 식어버리고,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지는 우울증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문학의 쇠퇴현상은 문학이 기초학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수많은 시전문지의 출현은 두 가지 점에서 순기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인들이 아주 손쉽게 발표지면을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특정매체의 독점의 폐해를 완화시키고, 중앙과 지방, 중심과 주변의 간극을 좁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잡지들의 출현현상은 잡지의 수준과 시인들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잡지편집자들이 그 편집권을 악용하여 등단장사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전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잡지들은 그 지면을 통하여 잡지운영의 자금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매관과 매직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인의 배출과 시집 생산의 제도적 문제를 잡지의 편집자와 시인들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으로 문학예술의 중요성을 알고 그토록 문학예술을 활성화시키고자 한다면,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제도’를 도입하면 되는 것이지요. 초, 중고등학교 때부터 독서지도 전담교사를 두고, 매학기마다 그 수준에 맞는 필독서를 정해주고, 그것에 대한 독후감, 작문, 논문을 써오게 하는 것입니다. 초,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문의 꽃인 철학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오후 3시가 되면 방과후가 되게 하고, 그리고 그 방과후 시간에는 학교 숙제, 취미활동, 독서, 봉사활동, 미술이나 음악 등의 개인 과외교습을 받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은 물론, 사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게 되지요. 프랑스에서는 국어교과서가 따로 없고,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이면 모든 책이 교과서로 채택된다고 합니다. 이때의 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학교시험은 이순신에 대해서, 김소월에 대해서, 이청준에 대해서, 김수영에 대해서, 안데르센에 대해서, UN의 기능에 대해서, IMF의 기능에 대해서, 나폴레옹에 대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서, 알렉산더에 대해서, 괴테에 대해서,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상대성원리에 대해서, 뉴턴의 역학이론에 대해서, 양자역학에 대해서, 니체에 대해서, 프로이트에 대해서 써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하니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작가)는 인종이나 출신성분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 사람의 미모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사상가)의 업적은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논문(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초, 중고등학교는 대학에 진학해서 최고급의 논문(작품)을 쓰기 위한 기초교육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입시지옥(학교에서 학원으로, 오직 외우고 또 외우는 그 지긋지긋한 출세위주의 공부)으로 몰아넣고, 왜, 또한 이 땅의 제일급의 천재들을 표절의 대가들로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제도만 활성화된다면, 문학은 기초학문으로서 모든 천재들을 다 불러들이고, 그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작가)들은 저절로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문학잡지의 양산과 시집출간, 그리고 수많은 시인들의 출현과도 같은 이상한 현상도 모조리 다 일소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문학의 품격이 높아지고, 작가의 사회적 위상이 올라가면, 출판시장도 저절로 활성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간섭(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정부의 지원은 일종의 독약이며, 그것은 구제금융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학자들이 문화선진국의 교육제도를 연출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문인들이 이 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제도’를 하루바삐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화선진국에서는 모든 국가가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왜, 이 세계화 시대에 무엇이 그렇게 무서워서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공교육을 활성화시키고, 사교육비를 없애주고,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비법이 이처럼 있는데도, 왜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우리 한국인들은 모두가 그 입시지옥--주입식 교육제도의 희생양들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사상과 이론의 정립이며,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면 그는 어떠한 힘도 쓸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를 생각하면 수많은 잡지의 출현과 시집출간의 양산, 수많은 시인들의 등장은 아주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 지금-여기의 시점에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걸쳐 우리시의 미래를 짊어질 시인들로 평가할 만한 분들이 있다면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그 동안 평가받지 못한 분들까지 포함하되 뚜렷하게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 분들 중심으로 논의를 해 주십시오. 아울러 이 분들을 통해 21세기 한국시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장석주 21세기의 젊고 새로운 시인들은 기성세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쓴다는 점에서 “괴기한 청년들”이다. 어느 시대에나 청년들이란 심리학적으로는 돌연변이, 사회학적으로는 위악(僞惡)의 가면을 쓴 후레자식들, 정치적으로 기성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아들이다. 어찌됐든 기성세대들에게 불유쾌한 존재들인 것은 분명하다. 기성세대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언어들을 쓰는 ‘미래파’의 등장에 어리둥절했고, 나중에는 화를 냈다. 그게 화까지 낼 일이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소통이 안 되는 데서 비롯된 무력감을 분노로 해소하려는 듯 보였다. 김수영은 일찍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들이여”(김수영, 「절망」)라고 그들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들은 괴기하기는 했지만 나날이 새로워지지는 않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경구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경전에 나오는 경구다. 모든 것은 앞서 있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을 뒤집어 읽으면 새로운 것은 그 반복 속에서 옛것을 창조적으로 배반하는 양태로 출현한다는 뜻이다.
이 “괴기한 청년들”은 어디서 왔을까. 당연히, 그것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몸 안에 아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존재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순히 정자의 기증자가 아니다. 그 아버지를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라고 말한다. 김수영 시의 두 축은 자유와 혁명이다. 하지만 21세기 젊고 새로운 시인들은 자유와 혁명을 지우고, 그 자리에 피의 냄새와 고독을 놓고 그 질료성에 반응하는 감각의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이를테면 ‘미래파’ 시인들은 물론이고 외연을 조금 넓혀 2000년대 이후 나와 활동하는 시인들 대부분은 “거대한 뿌리”와 단절된 상상력을 공유한다. 그들은 상징적 의미에서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들로 길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아버지(기성시인들)와 소통이 안 되는 것도 아버지의 화법이나 통사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화법은 아버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뒷골목의 음지에서 학습된 것들이다. 부성의 부재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강한 힘과 완고함을 갖추고 가정을 지배하는 아버지들은 사라졌다. 아버지가 없는 가장에는 가짜-아버지, 즉 오빠들이나 장남들, 아니면 부성이 투사된 어머니들이 아버지를 대체한다. 하지만 그들은 ‘충분한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란 보다 복잡한 사회문화적인 인자를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존재다. 부성은 아들에게 “순수한 동물적인 삶의 규칙”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난 사회문화적 유전자를 학습시켜 그의 신체에 덧입혀야 한다. 부성은 타고난바 생명 본질이 아니라 자연-그것 위에 덧입혀진 것이다. 아버지들은 자연-본능으로 뭉쳐진 어린 자아들에게 사회화 학습을 시켜야 한다. 이것이 사회가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의무이자 책임이다. 아버지가 부재하는 가정에선 때로 어머니가 이것을 대신하는데, 가짜-아버지들은 아들들을 아버지로 만드는데 항상 진짜-아버지들보다 그 훈련이 가혹하다.
심보선의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에 따르면,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거창한 이야기”가 없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는 서사가 없다. 이때 서사는 전(前)문명적인 것의 복합성과 싸워 초극하는 문명의 서사다. 아버지가 없는 집은 조용하다. 마치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듯 무성생식을 통해 생명을 얻은 듯 조용하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수되는 부성의 연결고리는 단절된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아버지들이 어머니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끌어안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몸짓은 거의 같다. 아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가슴에 대고 아이를 안는다. 자식과 얼굴을 마주치는 몸짓은 다음과 같다. 아이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팔을 쭉 뻗으면서 눈을 마주본다.
이렇듯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다른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들에게 아버지를 각인하고 학습시킨다. 아버지는 단순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자를 넘어서서 부성 문화라는 아니무스에 바탕을 둔 복합적인 문화의 전달자다. 시인은 엄마와 장남의 대화를 통해서 아버지가 민족-국가-법과 겹쳐지는 것임을 슬쩍 내보인다. 아버지는 자아 위에 군림하는 초자아, 대타자인 것이다. 아직 장남은 아버지의 부성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크지 않다. 장남은 “해석자”에 머문다. 왜 해석자가 필요하냐 하면 부성 부재의 가정에는 모호한 정념들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안간힘을 쓴다. 사태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은 아들들은 무의식을 갖고 기표의 놀이에 빠져든다. 황병승과 김경주가 대표적인 예다. 어머니가 일차적인 성장을 담당한다면 아버지는 이차적인 성장을 담당한다.
아이들에게 이차적인 성장을 책임질 아버지가 없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이차적인 성장에서 배제된 아이들은 영원히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사코 어린시절로 회귀한다. 아버지라는 옷이 너무 헐겁기 때문에 유아기로 퇴영하는 데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그들은 “일차성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무의식적인 환상”(루이지 조야)에 머물기를 최종목표로 삼는다. 그들은 무의식적인 환상 속에서 기표놀이를 하며 아버지의 책임을 방기한다. 그런 ‘미래파’의 시적 아버지는 1980년대에 해체시를 이끈 시인들이다. 이를테면 ‘미래파’ 시인들의 세계에서 이성복, 황지우, 이윤택, 장정일, 김영승, 기형도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 멀리로는 이상과 김수영이 있다. 그들은 혁명을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고 선언했지만, 그들은 단지 제 뿌리를 잘랐을 뿐이다. 21세기의 좋은 시인들은 ‘미래파’ 논의와 연관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상상력을 만들어가는 시인들이다. 나는 이수명, 유홍준, 권혁웅, 강정, 김행숙, 조연호, 김경주, 이장욱, 장석원, 심보선...... 등등의 시인들을 주목하고 있다. 이들이 21세기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열 것이라고 본다.
반경환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걸쳐서 우리 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시인들로는 송찬호, 손택수, 문태준, 이대흠, 양해열, 박성준, 김승일, 그리고 김경주 등을 손꼽고 싶습니다. 이 중에서 송찬호는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언어학적 상상력은 상징주의 차원에서 그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가 없는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는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이고 젊다고는 할 수가 없지요. 손택수는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는 역경주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고, 이대흠은 모성의 원리를 통하여, 그 모든 것을 다 끌어안는 대덕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문태준은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함께 그 아픔을 노래하고 있고, 양해열은 그 자유분방한 전라도 언어를 통해서 대서사시적인 극적인 구조와 그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장중하고 울림이 큰 장인정신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 양해열이 전라도 순천에서 살지 않고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면 이미 진작에 대스타가 되었을 것이지만, 아무튼 그의 {영산수궁가}는 한국시문학사에서 신기원을 이룬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지하의 {오적}이나 송수권의 {달궁아리랑}은 그의 업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들은 박성준과 김승일인데, 이 시인들은 소위 미래파와는 다르게 서사구조를 엮어내가는 힘이 있으며, 그 언어들도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박성준과 김승일은 앞으로 한국시문학사의 새로운 기수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박성준과 김승일은 가장 젊은 신인들이지만, 소위 미래파와는 반대방향에서 시적 작업을 하고 있어요. 언어의 혼란성과 난잡성도 없고, 극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모국어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젊은 시인들이 미래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며, 서정시로의 바람직한 회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다시 소위 미패파 시인들의 시집을 주목해서 읽어보았고, 그들도 한국시문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시인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들의 시세계는 하나의 유행의 사조와도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대중성이라는 것, 유행이라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세계, 하나의 환상(거품)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예요. 신체절단, 시간屍姦, 동성연애, 본드흡입, 근친상간, 식인食人, 자위, 자학, 살인, 강간, 간음, 음주가무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래파 시인들의 세태풍조는 우리 사회 전체의 세태풍조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입문의례가 없는 불량배들의 퇴폐문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문화가 보편적이고도 영속적인 문화로 자리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는 달리 평가해야 하겠지만.
아름다움의 기원이 추함이고, 추함의 기원이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는 있지요. 왜냐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이란 그 주체자의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고호가 그린 창녀가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모델이고, 뭉크의 절규의 주인공이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초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인간적이고 더없이 추한 모습이 예술작품(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가 있었던 것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지 않게 하고 있었던 그 사회에 대한 고발로서나 가능한 것이지요. 가장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한 인간이 가장 더럽고 추하게 일그러지고 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그 그림들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고,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죽어가게 한 대역죄인아라는 양심의 가책이 바로 그 예술작품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만큼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 사회를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사회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바로 이것이 모든 시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소위 미래파들의 퇴폐적인 모습들은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의 산물이라는 혐의점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김경주, 황병승, 김민정 등도 아주 중요한 시인들이고, 좀 더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성호 제가 기대하는 분들은 어쩌면 젊은 시인들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작품 활동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자세히 적기는 어렵지만, 우리 시대의 종교적 혹은 생태적 상상력을 넓히고 있는 고진하, 이문재나, 중견으로서 이미지의 작법에 누구보다도 힘을 기울이는 장옥관, 송재학, 황학주, 그리고 현실적 동력을 시에 흡입하여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이시영, 송경동, 최금진 이런 분들이에요. 고재종, 최영철, 김창균, 엄원태 같은 분들도 떠오르고요.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당대의 평균적 미의식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감수성을 제기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전위가 중요할 텐데요. 이들의 언어는 기존 문법에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하였고, 새로운 언어 감각에 대한 실물적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언어는 전위로서의 자기 몫을 다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의 일부로 흡수되어갔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모종의 거시적 전환을 요청 받기에는 일정하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도 되지만, 시인들의 의식이 소소한 일상 감각의 쇄신 과정에 깊이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 중 일부는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 자연으로의 침잠, 사적(私的) 기억이나 감각적 내면으로의 퇴행을 서둘러 담론화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타자와 소통하는 사회적 울림보다는 소통 거부의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를 시적 외장(外裝)으로 택하는 미적 고립을 선택한다든가, 가장 미시적인 관찰과 표현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편향을 보여주기도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 있고 창조적인 시적 전위들에 의해 이러한 의구심과 비판은 부분적으로 혹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하나하나 극복되어가고 있습니다. 장석원, 하재연, 이근화, 신동옥, 김경주, 이준규, 김언, 신해욱 등이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말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사회 세 분 선생님들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려운 질문들에 성실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좌담을 계기로 20세기 후반의 우리 시를 조망하는 새로운 논의들아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21세기 새로운 시의 기풍이 일어 르네상스가 전개되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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