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집『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우체국 하면 편지가 있고 편지, 하면 언뜻 떠오르는 시가 내게는 몇 편 있습니다. 유치환 시인의 '행복' 이 먼저이고 이수익 시인의 '우울한 샹송' 이 있고 안도현 시인의 '바닷가 우체국' 도 있습니다. 모두가 디지탈 우체국이 아닌 아날로그 우체국들이지요. 늘 무엇인가를 찾으러 다니는 신경림 시인의 '떠도는 자'의 노래도 있습니다.
이 우체국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기능과 역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우체국 하면 무엇이 연상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택배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보험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도 부치고 소포도 부치고 이력서도 부치고 펜팔도 하고 전보도 받고 기쁜 소식과 슬픈 온갖 소식을 전해주던 우체국이 언제부턴가 소포라는 말 대신 택배라는 말이 자리를 잡았고 편지라는 단어도 메일이라는 신용어에 밀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올 초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우체국 계단에 앉아 있던 김충규 시인은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움이 없는 세계로 아주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이 시인의 시 한 편을 문학지에서 읽다가 시가 더 보고 싶어서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을 한 권 샀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시가 끝나는 맨 뒤에 웬만하면 다 있는 시의 해설이나 평이 없었습니다. 평이나 해설이 없다고 해서 시를 감상하는데 불편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인의 어떤 성격이 읽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시집은 몇 번 덮었다 폈다 하면서 하루 이틀이면 다 읽는 편인데 이 시집은 읽다가 덮고 읽다가 덮곤 하면서 한 달 걸렸는지 두 달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제목만 봐도 무덤이라는 단어가 여럿이 있고 공동묘지로 쓰여진 시가 4편이 있는가 하면 꽃상여를 본 아침, 죽음의 숲 등...대개 이런 시편들은 숨죽이고 읽기 마련인데 때론 이런 어둡고 칙칙한 단어들은 가슴을 짓눌러 불편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다른 이보다 더 그리워했을까요. 그리움을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시인.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우표를 붙이고 우편이 되어 떠나려했던 시인.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시인은 여름이 끝나 가는 이 계절에 그리움을 다 맞이하지도 못한 채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정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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