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은 죄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신세기》(1938.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1938. 3 <신세기>에 실린 시입니다. 참 오래된 시인데 우물가에서 물 떠주는 처자 하면 조선을 물려받은 이성계의 설화가 생각납니다.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는데 천천히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워줍니다. 시 속의 처자는 버들잎을 띄워주지는 않았지만 물을 청하는 낯선 이에게 물을 떠 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에 웃고 받습니다.
시 속에 남정네는 과거보러 한양 가던 선비였는지도 모르겠고 나무하고 산을 내려오다 목이 말라 물 한 바가지 떠 달라는 잘 생긴 타동네 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 준 처자는 떠꺼머리 총각만 봐도 얼굴 살짝 붉히는 앳된 처녀였을지도 모르겠고 아직 고추도 설 여문 예닐곱 신랑한테 시집을 와서 암 것도 모르는 꼬마신랑 땜에 애 태우는 새색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질러가는 길 없냐고 묻기에 대답해주고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옆에 있는 샘물 떠 주었을 뿐입니다. 그리곤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기에 웃음으로 얼버무린 것 밖에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달 마중을 갔었는데 임 마중을 갔었다고 소문이 나는 것처럼 그새 누가 봤는지 온 동네에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물을 달라기에 물을 떠 건네주었을 뿐이고 누가 어떤 소문을 내든 웃음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소문의 당사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살포시 흘린 웃음이었겠지요.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우물가는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뉴스의 장소였습니다. 평양성에 해 안 뜬다고 해도 모르는 일이라고 처자는 항변하지만 웃음의 의미를 두고 퍼져나가는 소문을 잠재우기에는 부족한 듯 보이는 재미난 시입니다. <정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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