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도서관은 없다 / 최금진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9. 15. 18:45
728x90

도서관은 없다


최금진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일어나 반란군처럼 밖으로 뛰쳐나가고
취업을 위해 앉아 있던 의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서관 의자들과 한바탕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실업의 인간들이여 투항하라
실업은 도서관장님이 해결할 몫이 아니다
세상은 봄이어서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수능필살기, 만점9급공무원, 부동산중개 등등의 책들이
공중에 날아올라서는
화르르 책 속의 글씨들을 네이팜탄처럼 터트리고
집에 가라, 집에 가서 차라리
아직 웃음의 흔적 기관을 자극할 만화책이나 봐라
벚꽃잎이 낙하산을 타고 도서관 마당을 점령하는데
오늘날 인류가 실용서적을 내기 위해 나무를 밴 것 말고 뭐가 있나
기원전 천칠백 년에 사라진 모헨조다로, 하라파 같은 도시들이
도서관 벽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긴 글렀어요, 다음에 만나면 나의 돈 많은 신랑이 되어주어요
젊은 도서관 사서는 의자에 깊이 몸을 눕힌 채
아득히 먼 문명이 되어버린 첫사랑 애인을 생각한다
침묵의 언어를 젊은 나이에 터득한 사서가
이 전쟁의 주모자는 아니다
사람들 귓구멍을 꽉 틀어막은 이어폰에선 음악이 줄줄이 샌다
벚나무 꽃들이 피워놓은 화형장으로
폭삭 늙어버린 젊은이들이 끌려나간다
실업, 실업의 시대
연애편지 따위의 글을 가지고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도서관 관장님은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모두 포위되었다, 투항하라, 오늘은 벚꽃이 피는 날이다
벚꽃이 보시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장 아지랑이 속에서 증발하는 햇빛 한 장씩 읽고 오라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달아나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꽃들이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현대문학, 12월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최근에 도서관 가 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취업준비를 마지막으로 도서관은 잊어버린 단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유비쿼터스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구청에 소장돼 있는 32만 권의 도서 전체에 전자 태그를 붙여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신청을 하면 관내 지하철이나 각 동에 있는 마을문고에 그 다음 날 배달을 해 준다고 합니다. 신청인은 시간이 날 때 찾아가면 된다고 하니 참 편리하겠지요. 시집도 볼 겸 저도 가끔 이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요즘 도서관을 보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시에서도 말하듯이 상업화된 도서관의 무용론입니다. 참 안 되었지요. 실용서인 수능책이나 공무원이 되기 위한 도서와 부동산중개사를 위한 책들이 인문서적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있습니다. 시집도 당연히 서점에서처럼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겠지요.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서 살림살이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시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기이한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실기시험을 포함하여 각종 시험에서 주관식으로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 전체를 써보시오 한다거나 어느  연만 써보게 할 수도 있고 객관식으로 시 제목을 나열해놓고 어느 시인의 시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한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5개 정도만 출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어디 가세요? 도서관 가는데요. 무슨 시험공부 하시려구요? 아, 네, 시집 좀 읽어보려구요. 옆에서 이런 대화를 들어볼 날이 혹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호순>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 바닷가에서 / 송경동  (0) 2012.09.24
금붕어의 건망증 / 오명선  (0) 2012.09.19
웃은 죄 / 김동환  (0) 2012.09.13
잃어버린 열쇠 / 장옥관  (0) 2012.09.08
우체국 계단 / 김충규  (0) 2012.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