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의 건망증
오명선
질문이 건너가기도 전에
눈빛이 마음에 닿기도 전에
나의 문장은 너에게 읽히지 못하고 사라졌다
너의 공식에 의하면
내 기억력은 딱 3초
기억이 녹스는 시간을
너는 일방적으로 요약하고 결론 짓는다
소유권은 너에게 있지만
내 기억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내뿜는 물방울이
내가 쓴 길고 긴 문장이라는 것을 넌 알지 못했다
몸을 숨기던 수초도
헤엄쳐 온 길들도
징검다리는 되지 못했다
네가 생각하는 3초는 짧지만
이 어항 속의 3초는 천 년,
너는 아직, 건망증의 힘으로 살아 있다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 2012)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한 때 잠깐 낚시를 해본 적이 있었다.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만 먹고 기능성 고어텍스 고가의 옷을 사는 것처럼 한 달 월급에 가까운 돈으로 프랑스제 미첼인가 뭔가 하는 릴과 국산 릴 한 개, 그리고 한 칸짜리부터 다섯 칸짜리 사이 낚싯대 몇 개와 가방, 자질구레한 부속품을 한꺼번에 장만을 했었다. 하지만 미늘 없이 낚시를 한다는 선인들의 고상한 취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게으른데다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또 그 때만 해도 민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처음엔 잔고기는 놔주고 큰 것들은 가져왔는데 그것마저도 처치 곤란이었다. 나중엔 잡은 고기를 다 놔주고 빈망만 들고 왔다. 그런데 낚시는 집에까지 와서도 비린내를 풍기는 데다 낚싯대 하나하나 칸칸이 빼서 물기를 닦고 바늘 하나까지 갖추려 칸막이에 넘치지 않게 정리정돈을 잘해놔야만 헝클어지지 않았다.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낚시 가는 횟수는 뜸해지고 낚시가방은 열어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사갈 때도 옛정이 든 물건처럼 한동안 같이 따라다녔다. 낚시도구는 주인이 읽어주기를 기다리다 청춘을 보내버리고 소박 받고 세월을 보내다가 애정이 식을 대로 다 식어 늙어갈 무렵에야 결국은 새 주인의 사랑을 받으러 떠났다.
낚시를 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금붕어의 건망증이 얼마나 심한지를. 오죽 심하면 3초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어떤 녀석은 잡고 보면 주둥이가 다 헤져있는데 주둥이가 아프지도 않은지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인지 그런 입술을 하고서도 계속해서 낚시바늘을 넙죽넙죽 무는 것이다. 붕어는 3초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만약에 3초를 기억한다면, 3초에 3초를 계속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삶은 얼마나 더 고달프고 걱정이 많을까. 금붕어처럼 저렇게 깜박깜박 잊음으로서 근심도 걱정도 함께 잊고싶어하는 것이 건망증의 힘일 수도 있겠다.
혹 당신의 머리 속은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처럼 온갖 잡동사니를 꽉 채워 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하다면 청소도구인 이지클린이나 다른 유틸리티프로그램을 동원해서라도 싹 지우고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외로움도, 그리움도, 고독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파생되는 걱정 많은 세상에 어쩌면 우리도 저렇게 붕어의 건망증을 가지고 산다면 정신건강 뿐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좋겠다.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 비움으로서 새로운 정보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고 한다. 비움은 채움의 또 다른 이음동의어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남겨진 그리움마저 다 지워버리는 포맷까지 하는 우를 범하지는 마시라. <정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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