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나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평설 / 박남희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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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환경이 조금 다를 뿐 거의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요즘보다는 근대 이전의 봉건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젊은 남녀들의 사랑은 더욱 곡진했을 것이다. 서안나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은 사랑의 소통과 절연 사이에서 느끼게 되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 당시의 고유한 풍물이나 자연환경 속에 은유적으로 녹아있는 좋은 시이다.
시인이 시의 서두에서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이라고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피해서 처마 밑에 옮겨 앉는 행위를 그리고 있지만, 이 구절을 은유적으로 읽으면 한여름인 청춘의 시절에 ‘팔작지붕 홑처마’, 즉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밑 그늘을 따라 옮겨 앉는 일이야말로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연의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들 역시 남녀가 사랑을 꿈꾸거나 사랑을 하는 일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속내는 이어지는 구절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는 표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처럼 시 속의 화자는 흙담에 어려있는 흙내를 통해서도 사랑하는 당신을 느끼면서 애써서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 속의 주인공은 서원에서 공부를 하는 유생으로 남성인데, 그는 사랑하지만 쉽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하면서, 서원 근처를 돌아 흐르는 하회를 통해 사랑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야말로 화자에게는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랑의 이치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거나 그냥 둘인 경우에도 모두 해당이 된다. 이것은 화자가 사랑을 소통보다는 절연의 사랑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는 구절을 보면, 이들의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는 화자의 속내에서 잘 알 수 있다. 공부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서생의 안타까운 마음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면 극에 달한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는 구절은 비장을 뛰어 넘어 비극적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여인이 늙게 되면 사랑을 못 이룬 화자는 끝내 죽어 흰 뼈 몇 개로 남게 되리라는 슬픈 전언인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연풍경에 잇대어 절창을 낳고 있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이나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은 모두 사랑하지만 보낼 수밖에 없는 화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보여준 이별의 정한을 한층 높은 미학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는 절창이다. 목백일홍 꽃잎이 강물에 떨어지는 것은 화자가 사랑하는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은유적 표현이다. 하심(下心)을 하심(河心)에 실어 떠나보내는 화자의 마음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시산맥』(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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