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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의 詩精神을 청진하다 - 김명원 (시인 ․ 대전대 겸임교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9. 2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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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의 詩精神을 청진하다

 

                                                                                             김명원 (시인 ․ 대전대 겸임교수)

 

1. 들어가는 글

 

   황제가 시인을 초청하여 자신의 궁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길게 늘어선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마치 광활한 경기장의 계단들 같은 첫 번 째 테라스를 지났다. 다음으로는 금속으로 된 거울들이 장식 된 눈부신 대기실과 끝이 없이 연결되는 무지개빛 대리석의 서재들, 그리고 은가루의 마당을 지나 백단향으로 만든 카누를 타고 수목으로 뒤덮인 수많은 강들을 지났다. 현실이 꿈과 혼동되어 버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현실이란 꿈의 여러 가지 형상들 중의 하나였다. 지상과 궁전은 오묘한 정원들과 우수에 찬 강들, 신비스런 건축물들, 그리고 빛의 여러 가지 형체들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시인이 시 한 편을 낭송한 곳은 궁전의 마지막 두 번 째 탑 아래에서였다. 시가 시인의 입에서 고통스럽도록 절절하게 흘러나온 순간, 그 시는 시인에게 불멸의 칭호와 동시에 죽음을 선사하였다. 시의 원본은 유실되어 버렸다. 그 곳에 있었던 어떤 사람은 그 시가 한 행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가 한 단어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사실은 그토록 짧은 시가 그 거대한 궁전 전체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에는 궁전에 있는 도자기 하나 하나와 그것들에 그려져 있는 하나 하나의 그림들조차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에는 숱한 밤의 적막과 장렬한 노을의 구름이 빚어내는 주홍빛깔과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무늬마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을 알 수 없는 먼 과거에서부터 그때까지 제국에서 살았던 생명체들, 신들, 용들이 누렸던 파란만장한 운명의 불행했거나 행복했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던 시가 읊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는 눈을 감고 경탄의 신음을 내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죽을 듯 절망하면서 비통하게 시인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네가 내 궁전을 탈취해 가버렸도다!”

   망나니의 쇠칼이 번쩍 들리고, 시인의 목은 무참하게 베어져 버렸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곤 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두 개의 물체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은 마지막 음절과 함께 탄생한 언어의 집을 축조하는 대신 궁전이 사라져버리도록 하기 위해 그 시를 낭송했을 거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죽음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결코 발견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J. L. Borges)의「궁전에 관한 우화」를 요약한 것이다. 황제는 자신이 누리는 부와 권력의 영광을 부단히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초대된 시인의 예술적인 입을 통해 확인 받고 칭송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황제의 무한한 권위에 경의를 표하기는커녕, 궁전의 광대하고 고혹스런 아름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시 한 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었을 테고, 그것은 예상을 뒤엎게도 황제의 모든 궁전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시가 담지하고 있는 극도로 위험한 본질적 자장력이다. 시가 그려내는 본원의 힘이란 얼마나 당돌한 것인가. 황제가 자신이 평생 가꾸어 온 궁전의 모든 것을 도둑질 해 버렸다고 자탄해 마지않았던 시의 도발성이란 얼마나 불온한 것인가. 이는 시가 실체를 삼키고 주제를 삼키고 역사를 삼키는 초월의 방식에 도도한 노정이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보르헤스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다지도 위험한 시를 발설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존재이다. 시인의 비의성이 예시의 능력과 포월의 본성을 능가하는 점에 있어서 예언자나 입법자로 불리워졌던 점을 상기한다면, 바로 이러한 언어의 창조성에 대한 관념이 밑받침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시어의 형상성으로 집적되는 단행의 시 한 편에 삼켜지는 궁전의 실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반대로 황제의 무한 권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시인의 위대함은 얼마나 외경스러운 것인가. 그리하여 황제가 시인을 참아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의 고도의 응축력, 즉 단숨에 본질을 투사하여 실물을 대체하기까지에 이르는 놀라운 마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힘은 창조로서의 힘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에는 잡히지 않지만, 영혼의 뿌리마저 뒤흔드는 공포를 선사하는 창조란 단순하게 복제된 복사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실재의 세계를 능가하는 변혁이라는 점에서 재창조라는 명명이 가능하다.

   이런 문제거리를 신선하게 선사했던 보르헤스의 시인은 죽었고, 놀라운 그의 시는 아직도 정체불명인 채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올 뿐이다. 시인은 한 편의 시 때문에 죽었기에 기꺼운 자신의 운명을 대변할 만큼 시의 존재성을 화려하게 고지했으며, 그 시는 영원히 찾을 수 없기에 존귀하며 신비롭고 아득하게 다시금 탄생하였다. 시인과 시가 담보하는 출중한 의미와 가치가 여기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쓰여 지는 시들은 어떠한가. 아직도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담보로서의 시가, 예시성으로서의 시가 남아있는가. 어쩌면 요즈음의 시인들은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 보르헤스의 우화에서 나오는 시인이 치른 속죄양으로서의 보속을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선행한 시로 세계를 탈취해 가 버린 시인은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음으로 헌납한 시의 원형을 모방한 모사품을 빨대사탕처럼 줄줄이 빨아대며, 단 내 나는 당분에 충치가 생기는 지도 모르면서 자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뿐인가. 한 해마다 종합문예지건 시지이건 문학잡지에서 양산되는 시인의 숫자는 실로 방대하다. 인터넷 문학상 등 미디어 매체를 통해 등단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기하급수적일 것이다. 시를 쓰는 인구가 창궐하는 시인공화국이 된 세태가 반가운 현상일 수도 있지만 양적 비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등단을 빌미로 후원금을 지급해야 하고 발표 지면을 얻기 위해 문단 권력에 야합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위의를 보존하고는 있는지는 분명 점검해야할 문제이다.

우주의 이치와 섭리를 예지롭게 판독하고 인간의 가치를 해석하면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부단히 조명하며 아우르는 기능을 몰살당하거나 포기한 채 오늘날의 시인들은 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인들의 행사를 쇼핑하고, 시의 장식물들을 구매하고, 급기야는 평론가들에게 주목받기 좋도록 특별하게 제작된 시를 판매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도 반성할 문제이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허덕이며 새로움이라는 함정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의 정체조차 판명하지 못한 채 새로운 길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시인들이 속출하는 현시대의 시정신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시정신이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야 하는 내장 에너지이며, 보르헤스가 표명한 절체절명의 존재론적 인식과 공자가 기록한 ‘思無邪’라는 절대지평의 순결 의식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현시대의 시정신은 어떠한지 판명해 보고자 한다.

 

 

2. 현대시정신의 문제점

 

2-1. 운율의 실종

 

   문학 장르 중 음악과의 친연성이 가장 강한 것이 시이다. 시는 워낙 제의의 일부로 음악 가사였고, 동양이건 서양이건 고대의 서정시는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노래 가사로 존재했다. 악기가 없을 경우에는 흥얼거리는 노래 가락이 악기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우리 문학 역시 향가로부터 이어지는 풍성한 노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시조창을 전문으로 하는 가객들이 등장하여 가단(歌壇)을 형성하였고, 평민계급의 대두와 함께 판소리가 가세하면서 문학 창작보다 노래 중심의 공연이 문화 활동의 주류를 이룰 정도였다.

   『학우』『창조』등의 지면에 자유시를 발표하며 서구적 상징시와 독자적인 조선시의 결합을 모색하던 주요한은, 1924년 10월 『조선문단』 창간호부터 3회에 걸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시법을 소개하였는데, 그 제목은 공교롭게도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였다. 상징주의와 낭만주의의 물결이 스쳐가고 새로운 경향사상이 대두하는 1924년 후반기의 시점에서, 주요한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의 성격이 일종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론에서 주요한이 신시 운동의 목표로 강조한 것은 ‘민족적 정서와 사상을 바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과 ‘우리말의 힘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한 노래가 극히 드물었다고 보고, 이제 우리의 신시는 비록 외국시의 번역과 모방에서 비롯되었으나 우리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김소월, 주요한, 홍사용 등 민요조의 가락에 의지하여 정서를 표현하는 시에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던 노래의 요소는, 1930년대에 들어와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이상 등 지적인 감각과 전위적 형식을 추구한 시인들의 등장으로 표면에서 잠복하여 내면화된다. 여기서 내면화라는 말을 쓴 것은, 노래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비록 후위 혹은 측면의 자리에서지만 감각적․전위적 특성을 지원하고 보강해 주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상이나 김기림의 작품에도 그 나름의 노래의 요소가 일정한 작용을 하고 있음을 작품의 구체적 독해를 통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요컨대 중심축으로서의 노래의 권위는 사라졌지만 시의 기본요소로서의 노래의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1960년대에 노래의 요소와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지적인 자세로 시에 투신해 온 것으로 알려진 김수영의 시에도 훌륭한 노래의 요소가 담겨 있음을 확인하는 데에서도 반증되는 사실이다. (이숭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실 비판의 정신과 구체적인 노동의 체험담을 담은 사회시, 정치시, 노동시 등 리얼리즘을 표방한 시들이 메시지를 주축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이들의 중심이었던 신경림의 시들 -「농무」,「새재」등이 ‘민요조 서정시’로 불리는 것은 리얼리즘시에서도 간과할 수 없었던 정서와 운율 탓이었다. 김지하 역시 판소리와 같은 민족적 형식을 빌린 시「오적」외에도 민중의 애환을 날카로운 정치적 입장에서 풍자 비판한「서울길」, 「황토」,「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시를 발표해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의 시를 자칭 ‘담시(譚詩)’라고 작명할 만큼 그의 시들은 ‘단형 판소리’라 해석될 정도로 높은 리듬감을 선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김경숙」같은 역사적 인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해 이후『만인보』의 기틀을 이 시기에 다지기도 했던 고은을 비롯하여, 반외세 통일지향의 김남주, 문익환, 반계급 노선의 박노해, 백무산, 정인화, 박영근, 교육운동시의 김종인, 배창환, 도종환, 김진경, 농민시에 고재종 ,이중기, 홍일선, 김용택, 여성문제에 대한 페미니즘 시인 고정희, 김경미 등이 리얼리즘시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는데 그들 역시 시의 운율에 대한 각고의 정신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이후 사회 성향이 급변하자 리얼리즘이 퇴조해 가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실험 운동이 전개되었다. 해체시, 구체시, 산문시, 환상시, 선시 등 중심담론으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하고자 하는 일군의 시인들로부터 새로운 시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모더니즘시를 표방하여 생애를 기투하였던 이승훈이다.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눈깨비 치던 오전 난 택시를 타고 공항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 옆에 앉고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자 공항 터미널로 가면서 그가 힐끗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무얼하십니까? 난 검은 바바리를 걸치고 낡은 밤색 가방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글쎄 뭐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랬더니 기사 왈 철학하는 사람 같군요! 네? 철학이요? 왜 있잖아요? 풍수도 보고 예언도 하는 철학 말입니다 진눈깨비 치던 겨울 오전이었다

                                                                                      - 이승훈,「철학」전문

 

   인용하고 있는 이승훈의「철학」을 두고 시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서술로 시작되는 문장은 끝까지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던 그 날, “공항 터미널”에서 탄 택시 기사와의 담화 내용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시에는 빛나는 시적 이미지커녕 시로서 읽혀지는 리듬이 없다. 시지『작가세계』(2005년 봄호) 특집에서 김상미는 이를 두고 ‘미니픽션(minifiction)’이라고 규정하면서 새로운 시의 형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승훈 자신은 일상에 구멍을 내듯이 시(규범화된 시)에 구멍을 내고 싶었다고 피력하였다. 시가 이론화되고 정형화된 것에 구멍을 내고자 시도된 시가 바로 위의 시「철학」이며, 이러한 시도는「해가 지면」등 현재(『現代詩學』2009년 3월호)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일기이거나 생활 기록서이다. 이미 시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시를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이제 다른 장르의 문학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노래를 버리는 순간 시는 소멸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시가 전위적 실험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이미 노래의 기능을 놓친다면, 그 순간 시는 산문으로 전락해 버리는 연유이다.

 

 

2-2. 시어의 파기, 모국어 상실

 

   우리 시단에서 해체적인 경향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되어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 박남철이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전통적인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해 중요한 비평을 가한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가 주도한 문학 비평의 유파나 그 운동을 해체(deconstruction)라 한다. 해체 이론은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실을 파헤침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을 주장한 이론으로, 이러한 방법론에 기대어 쓴 시를 해체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체시는 황지우, 박남철 등에 의해 쓰여 진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를 가리키는 용어로 김준오의『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 해체시는 시인의 세계관이 유보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가 아니라 표절하고 무시하는 형태를 취한다.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전통 시형식의 파괴라는 충격이 가시화된 시가 바로 해체시인 것이다.

 

(시 제목「ばかやろう」만 표시되어 있을 뿐 10쪽에 이르도록 백지임)

- 박남철,「ばかやろう」일부

 

   고전주의자들은 시어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로 한정했으나 낭만주의자들은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내세웠고 근자에 와서 해체론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속어(俗語)나 비어(卑語)들을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시어와 비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시어가 제한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임보 강홍기) 왜냐하면 시는 기본 질료로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시만이 응축 문자를 통한 정제된 표현 방식을 실현하고 있으므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가 어찌 시일 수 있겠는가.

   위에 인용하고 있는 박남철의「ばかやろう」는 10쪽 내내 시어가 단 한 음절도 없다. ‘없음’도 ‘있음’이라는 노자 철학을 대변하는 시도 아닌 것이 시 제목이「ばかやろう」인 것만 보아도 금세 드러나는 형국이다. 게다가 필자처럼 일본어를 모르는 문외한이라면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ばかやろう’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까닭이다. 나중에 일본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그것이 ‘바카야로’이며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이로 인하여 정말로 독자를 ‘바보’로 만들어 버린 박남철은 지독히 권위적이거나 모순적 시인이 된 셈이다.

   “시어가 언어를 초월한다”는 레비 스트로스의 말은 시어가 함의하고 있는 한계적 상황에 대한 엄중한 계고이지만, 흙과 돌 등으로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 공간학적인 집 설계라면, 허공을 일컬어 집이라고 유심론적으로 지칭하는 이를 공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듯이, 아무런 것도 그려진 것이 없는 백지를 제목만 붙이고 그림이라고 우길 수 없듯이, 아예 시어가 하나도 없는 작품을 두고 시라고 우기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유기이거나 무책임한 발상을 자처한 격이 된다. 물론 이 시로 인하여 시의 다양성을 검증하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시작(詩作)에 있어 패러디와 패스티쉬 등 상호텍스트성의 논리로 시창작 기법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현실에서 더욱 눈길을 끌거나 주목을 집중시키는 현상으로 무언(無言)의 시가 발표되는 것은 시에 대한 파편화와 분열화를 인식시키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이 더 이상의 부차적인 설명 없이도 명명백백한 소비 시대이며, 전 시대의 가치 개념을 순탄하게 수용하거나 계승할 수 없는 방향성의 상실이 퇴영적이며 즉자적인 소비문화의 성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그 현상학적 실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등 이러한 실상들이 시의 세속화 현상을 부추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어의 파기라는 부정성을 통해 시를 생산해 낸 시인으로는 시 대신 사진이나 그림을 오려 붙여 시로 발표한 김두한 등이 있고, 시어와 꼴라쥬 등을 혼합하여 시를 쓴 신현림 등이 있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대신하는 시라는 것은 얼마나 시어를 나약하게 만드는가. 시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른 매체에 뺏겨 버린 채 시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시어로써 시를 표현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시를 쓰는 대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더 유념하여 보아야 할 것은 젊은 시인들의 모던한 정신이 야기하는 모국어 상실과 이국적 조어들이다. 박상순은 시집 제목을『Love Adagio』로 붙이고 있으며,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Tan - Tan - Tan」,「Finale」등 제목만 보면 영시라는 인상을 준다. 최승호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 언어,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된 언어, 아이덴티티가 없는 언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상한 무대 위에서 말의 우연성을 따라 움직이는 허구의 언어들”이라고 말하면서 “변신, 은신, 폭로, 자기 부정과 새로운 탄생을 욕망하기 혹은 말하기, 변형하고 전이하고 대치시키고 자리 바꾸기…. 박상순은 모든 예술적 방법을 동원해 끊임없이 ‘정체성’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어떤 규정이나 특징을 부여받기를 거부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박상순의 시들은 ‘정신적’이고 ‘즉물적’이며, ‘인상적’이고 ‘사실적’이며, ‘표현적’이고 ‘대면적對面的’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운동과 새로운 시 생산을 위해, 변형되고 전이된 표현을 찾기 위해 굳이 모국어를 포기하면서까지 행해야 할 필연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황병승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핑크트라이앵글배 소년부 체스경기 입문」,「해프닝_아홉소 씨의 금빛머플러」,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등을 보면, 국적 불명의 시어들이 출연한다. 이 시들을 통한 미적 성취는 차치하더라도 시인의 임무 중 가장 고결할 책무가 모국어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도 없는 이 시점에서, 이러다가는 오히려 시인들로부터 모국어가 추방당하는 것은 아닌지 자탄하게 되는 것이다.

 

 

2-3. 난해한 개인 상징

 

   시에서의 난해성은 필연적인 요소로 보인다. 시어가 내장하고 있는 내포적이며 함축적인 의미 구조는 일반 문법을 넘어서서 특수한 중층 어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상징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상징이 아닌 경우에 더욱 모호하고 애매해진다. 시라는 두터운 입체성은 ‘난해’라는 교량을 무사히 넘어설 때 가능해 지는 독해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연과 시의 행들이, 시어의 연결이 구조적으로 그러해야만 하는 필연성과 연계성을 무시한 채 무차별한 개인적 상징을 남발하는 경우에 독자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게 된다. 해독의 즐거움은커녕 부작용으로서의 두통이 야기되는 것이다.

 

 

9. 옥상엔 사냥개와 휠체어와 남자의 자궁

8. 지하실엔 모형두개골 A B C

7. 손가락 잘린 선방공이 응급실로 달려온다

뚝 뚝 떨어지는 검붉은 바람

6. 하하는 실험실에서 바람의 방정식을 기록한다

NACL+ELEVATOR+H2O = 손가락

= 앰뷸런스가 달리면 소녀는 생리를 시작한다

5. 그 냄새… 나는… 세계는 개미굴이다

4. 시간이 고양이 발톱에 할퀴어 비명할 때

3. 피 흘리는 구름을 품고 백지 위에 잠드는 나

2. 포르말린 속의 소녀 호호가 빨갛게 눈을 뜬다

9월 0일이다

나의 입술에서 검은 해바라기가 피어난다

1. 수고하셨소

휴게실은 열세번째 층 복도 끝

                               - 함기석,「아홉 개의 층이 있는 병동」 전문

 

 

   함기석은「아홉 개의 층이 있는 병동」을 통해 병동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홉 개의 층은 묘사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단편적인 이미지를 정황으로 기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9. 옥상엔 사냥개와 휠체어와 남자의 자궁”이 있고, “8. 지하실엔 모형두개골 A B C”가 있다는 것이다. “7. 손가락 잘린 선방공이 응급실로 달려”오고 “6. 하하는 실험실에서 바람의 방정식을 기록한다/ NACL+ELEVATOR+H2O=손가락/ =앰뷸런스가 달리면 소녀는 생리를 시작한다” “2. 포르말린 속의 소녀 호호가 빨갛게 눈을 뜬” 그 날은 “9월 0일”이다. 청소년기 이후부터 늘 시를 탐독하였으나 아직 시를 읽는 안목이 부족한 필자는 도저히 이 시를 읽어내기가 힘들다. 난해함으로 치자면 이상의 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의 난해함은 시의 배면에 놓인 절망과 불안이라는 코드를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데 반하여, 위의 시는 시인 개인의 무의식적 토로이거나 지독히 주관적인 언어유희로 일관하고 있다. 시는 향유하는 독자에 따라 달리 읽힌다고 해도 보편타당한 합의점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독자의 정신세계와 시인의 시세계가 다르니 어차피 이해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단정은 문학이 개성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공동성의 구현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인 것이다. 문학은 동의할 수 없는 세상과의 단절에서 시작하고 또 그러해야지만, 궁극에는 그 세상과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소통하려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연유이다.

 

 

2-4. 문단의 계급화

 

   등급이 있는 사회, 등급의 우열로 삶의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는 세속적 세계이다. 소위 일류 대학 출신이어야 하고, 일류를 자처하는 기업과 그룹에 소속되어야 하고, 일류 집안의 배우자와 결혼하여 일류 자식을 생산하여야 하고, 일류 명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품격을 고양시켜야 하는 일류 지향 현대성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자본적 사회를 스캔하는 대표적 풍경인 셈이다.

시단은 어떠한가? 정성껏 등단은 하였지만 어떠한 경로로 등단하였는지가 시인의 출신 성분을 따지는 첫 요인이 되고, 누구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는지가 평생 따라다니는 업보가 되며, 좋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여야지만 고품격 명함을 얻는 길이고, 무슨 시회詩會에 가담해야 하는지, 어떤 시류에 줄을 서야 하는지를 교활하리만큼 잘 분석하여 명철하게 실천에 옮겨야 살아남는 시단은 과연 어떠한 사회인가?

   시를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고, 문학적 삶과 철학적 양심을 고취하여 시대와 길항하면서 진보된 미래를 꿈꾸며, 사물의 본질을 천착하여 존재들을 빛나게 하고, 세상의 온갖 생명들을 사랑하는 힘을 키우며, ‘공동체’의 덕목을 도모하고, 넘치게는 독자들에게 남루하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인의 영혼을 선사하는 집단인 시단에서 ‘일류’와 ‘삼류’가 존재한다면! 피속적이며 초월적 지평을 감연히 열어야 하는 시단이 어떠한 부조리한 행태로 얼룩져 있는 지를 방증하는 시가 정 겸의「삼류가 본 삼류들」이다. 이 시는「이재무 시인의 ‘삼류들’을 읽고」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말하자면 이재무가 발표한 시를 읽고 난 독후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재무의 시「삼류들」과 정 겸의 시「삼류가 본 삼류들」을 읽어 보도록 하자.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 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

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담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마친 삼류가 무대를 내려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삼류의 얼굴에 꽃물이 든다

삼류는 남몰래 자신이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열렬한 박수갈채는 노래 솜씨보다 월등한

그녀의 미모에게 보낸 것인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

삼류는 일류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을 겸손하게 지나서

이류들이 앉아 있는 중간을 우아하게 지나서

삼류들이 뭉쳐 있는 후미에 뽐내듯 어깨 세우고 앉는다

삼류는 생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래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저 중간을 넘어 저 맨 앞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날이 올 거야

삼류는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마셨다 내뿜는다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삼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녀도 세상은 이미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삼류는 어제 그러하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 또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자리와 역할이 일류를 위한 영원한 들러리요, 삐에로요,

악세사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무슨 회한처럼 문득 깨달을 것이다

                          - 이재무,「삼류들」전문

 

 

녹산문고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신간 시집코너 앞에서,

나는 본다, 이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의 냉기보다 무수히 쏟아지는 역겨운 시집들을,

누구도 읽지 않은 일류의 시집들을.

한때 가이아의 향기가 흘렀던 이 시집의 종이,

폐지도 되기 전에 벌써

썩은 냄새를 풍기며

한물간 채소처럼 버려지고 있다.

 

아직도 착각에 빠져있는 배우들이

검정천으로 가려진 무대에서

저희들만의 유령 왕국을 만들고

북을 치고 장구도 치며 공연을 하고 있다.

 

대본에도 없는 왕을 옹립하고

군주가 되어 옥새도 찍히지 않은

교지를 남발하며

누구는 정승이 되어 우쭐거리고

누구는 남원고을 원님이 되어 주색잡기로 하루를 보내고

누구는 고부군수가 되어 수탈을 일삼고 있다.

 

누구는 관기가 되어 소모품처럼 노리개가 되었고

누구는 미관말직이라도 얻어 보려고 산해진미를 진상하고 있다.

매관이 성행하는 이상한 왕국

백성들이 이반한 유령 왕국

백색의 양귀비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그 향기에 취해 흔들거리는 폐허가 된 왕국

사방을 둘러보아도 관객은 없다

 

저희들끼리 웃다가 울다가

박수를 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연을 마친 속물들이 가면을 쓰고

굶주린 승냥이로 변하여 먹잇감을 사냥하고 있다.

하늘을 막 날려던 가냘픈 까투리 한 마리

목덜미를 물려 피를 흘리고 있다.

               - 정겸,「삼류가 본 삼류들-이재무시인의「삼류들」을 읽고」전문

 

 

   정겸은 시의 초입에서 신간 시집코너의 상황을 그려낸다. 그것은 “더운 여름에/ 에어컨의 냉기보다 무수히 쏟아지는 역겨운 시집들”의 모습이다.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시집들이란 그나마 판매를 겨냥한 ‘일류 시집들’이겠지만, 화자는 “누구도 읽지 않은 일류의 시집들”이라고 단언한다.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가차없는 현실에 응용 될 실용서만이 베스트셀러로 진입하는 시대에 일류 시인이 쓴 시라고 예외가 있겠느냐는 조롱은 “폐지가 되기도 전”에 “썩은 냄새를 풍기며/ 한물간 채소처럼 버려지고” 있는 현상으로 표출된다. 일류가 출간한 시집이라고 환대 받는 독서 환경이 전혀 아님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류를 자처하는 시인들은 그야말로 ‘자칭 일류’임을 야유하면서, 스스로의 향취에 탐닉하여 옹립한 ‘일류 왕국’이란 얼마나 옹졸한 작태들로 범람하게 되는지를 세세하게 묘파해 간다. “아직도 착각에 빠져 있는 배우들”이 열연하는 무대란 “저희들만의 유령 왕국”을 만들어 “대본에도 없는 왕을 옹립하고/ 군주가 되어 옥새도 찍히지 않은/ 교지를 남발”하는 옹색한 협지(狹地)일 따름이다. 이 공연에서 “누구는 정승이 되어 우쭐거리고/ 누구는 남원고을 원님이 되어 주색잡기로 하루를 보내고/ 누구는 고부군수가 되어 수탈을 일삼고” 있으며, 이들과 합류하겠다는 의지로 “누구는 관기가 되어 소모품처럼 노리개가 되었고/ 누구는 미관말직이라도 얻어 보려고 산해진미를 진상하고” 있는 풍자적인 묘사가 중층으로 나열된다.

   생명력을 상실한 “백색의 양귀비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흔들거리는 폐허가 된 왕국”에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관객은 하나도 없”는 공허한 ‘자신들만의 무대’였을 뿐이다. 시의 후반부 “저희들끼리 웃다가 울다가/ 박수를 치며 발을 동동 구르”며, “공연을 마친 속물들이 가면을 쓰고/ 굶주린 승냥이로 변하여 먹잇감을 사냥하고 있다”는 서술은 그대로 ‘일류’들을 향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재무 시의 시적 화자가 마음껏 비하했던 여성 삼류 시인을 “하늘을 막 날려던 가냘픈 까투리 한 마리”로 비유하면서 그녀에게 향하는 가없는 연민을 “목덜미를 물려 피를 흘리고 있다”는 정황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정 겸은 세속화된 시단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원고료가 없어도 시를 쓰고, 생활기록부 직업난에 ‘시인’이라고 명기할 수 없는 비감을 감지하면서도 한 해 천 명에 이르는 시인이 탄생하는 이유는 일류 시인이 되려는 의지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시의 문학적 가치 때문이다. 어떻게 시를 쓰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자문이야말로 자기 인식 존재인 시인이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실존적 고민이라면, 이에 상응하는 자기 각성과 반성이 치열하게 내면화되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일류와 삼류로 등급을 매기는 시단에 대한 냉혹한 질타이면서, 세칭 삼류를 천대시하는 이재무 시에 반기를 들며 ‘자칭 일류’들이야 말로 졸속한 형태의 ‘근칭 삼류’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재무, 정 겸 시인의 시 두 편을 읽고 난 우리들이다. 이재무 시「삼류들」이 한 개인 여성 시인을 주체로 하여 쓰여졌든, 시단 전체를 괄목하는 관점에서 쓰여졌든, 정 겸은 이재무 시의 제작 기조를 기반으로 하여 현시단의 정치성을 겨냥하면서 우리에게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순수 초월 예술공간이어야 할 시단에서 아직도 일류 풍월이냐? 시단도 현실 참여 집단이어서 등급이 성립할 수밖에 없다 치면, 삼류가 있어야 위상을 공고히 하며 폼 잡는 일류들이야말로 졸품 삼류들이 아니더냐? 이쯤에서 우리는 문단 세태를 향해 던지는 정 겸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는 존재론적 심급의 화두로 받아들이게 된다.

 

 

3. 나가는 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천 년대, 시가 실로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대이다. 시공급자이며 시소비자인 시인이 많은 시대이다. 적절한 상응의 대우가 없는데도 시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시인은 넘친다. 전업시인들로부터, 아이들 생활기록부의 부모 직업난을 써야할 때, 시 한편의 원고료가 얼마인지 질문을 받을 때, 곤혹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필자 역시 ‘시인’이 직업인지, 본분인지, 소명인지, 시인으로 불리워져 마땅한 것인지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필자 역시 다른 시인들처럼 오늘 밤에도 잎새에 스치우는 바람결을 더듬으면서 시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왜 쓰는 것인가? 어떠한 시를 기다리는 것인가?

지난 학기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시와 시인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자고 했다. 다양한 담론들이 제기되었다. 시란 신이 세상에 찍어둔 지문을 해독하는 시인의 주술이라고. 억누르려 해도 부표처럼 저절로 떠오르는 단 한 줄의 표현에 생명을 걸 수 있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시인은 현실을 기각시키지 않은 채 현실의 대지 위에 이상의 푯대를 곤고히 설치하는 언어의 건축가이며, 상징의 연금술사라고. 그러므로 시인은 죽어도 시는 영원불멸의 날개를 달고 시간의 용광로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를 것이며, 시인은 자신이 직조한 시 안에서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귀환할 것이라고, 총체적으로 정리하였다.

   모든 사물들은 ‘신성한 내부’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동의한다면, 모든 생명들과 죽은 모든 영령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기표와 기의의 사슬을 길게, 그리고 깊이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면, 아직 우리 시인들은 엷게 꿈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르헤스의 시인이 담보하고 얻었던 시의 이데아를 찾아 먼 별빛에 흐릿한 시력을 의지하며 용감하게 길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재현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궁전과 합치를 이루었던 태초의 시가 그려진 지도를 더듬더듬 번역하면서, 미완으로 끝날지도 모를 두려움과 욕망을 중첩시킨 채 시의 이정표를 두리번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영욕의 화살에 기꺼이 피 흐리며 절망하면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곧고 정직한, 그러면서도 옳은 시정신에 대해 고투하면서, 정의 내릴 수 없는 웅숭깊고 심오한 깊이에 괴로워하면서 어둠을 켤 것이다. 결코 위태롭지는 않지만 세상을 향해 어지럽도록 부단히 공전하는 시, 스스로 성찰하며 반성의 등불을 켜고 자전하는 시, 그런 시는 아직 시를 쓰고 써야 할 시인들의 몫일지도 모를 일이다. 궁전 모두를 갈취해 갔을 본원적인 힘은 없더라도 우리가 사는 시대의 고통과 직면하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내시할 안목과 배짱과 지혜를 두루 겸비한 덕목을 키우면서, 시인들 서로 격려해 가며 부단히 가야 할 눈부심은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이여, 나여, 배부르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고, 진실로 불행하지도 않기에 우리들은 시를 심는다. 더 배고프고 더 행복하고 더 불행해지기 위해서 넘치도록 많아 척박한 시 밭에 시 한 그루를 정성스럽게 심는다. 그것은 길항을 멈추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피어나는 시의 속성이며, 시인의 천형 같은 운명 사슬인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순결한 모국어로 가열 차게 써 노래하며 세상을 평화롭고 평등하게 도모하기 위해 오늘도 시정신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을 것이다.

   ‘나’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고민,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지향하는 안목, 부정과 부조리에 맞서고 하늘을 우러르는 외경심, 시의 전통과 위의를 보존하려는 노력, 이런 것들이 바로 결코 시들지 않을 시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