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의 감각 - 빛이 이동한다 / 이제니
� 이제니 - 나선의 상상력
이제니의 시는 언어늬 운동성, 즉 부동不動을 부정하는 에너지에 의해 흐른다. 이 흐름은 직선이 아닌 곡선 그것도 나선의 회전 운동성을 지향한다. 명사보다는 동사들의 유동적 흐름에 따라 의식과 무의식이 뒤따르는 형국이다. 어휘에서 발아된 감각이 연상적으로 이미지를 불러오고 이 이미지들은 리듬을 타며 나선으로 흘러간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나선은 수렴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제니의 시에 나타나는 ‘나선의 상상력’은 평면의 나선이 아니라 입체의 나선이다. 아르키메데스의 2차원 나선 혹은 포물선이 아니라 3차원 헬릭스helix 나선에 가깝다. 이러한 입체적 운동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어휘, 말, 이미지, 시간, 공간이 계속 움직이면서 즐거운 색채, 낯선 향기, 물결의 음악을 낳는다. 이때 발생하는 언어의 반복이 속도감과 긴장감을 높여주고 문장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존재에 대해 감각적으로 접근한다.
그때 나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두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종이와 연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너는 얼굴 주름 사이로 몇 개의 시간을 감추고 있었다. 어두운 한낮, 너는 불을 켜지 않는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립시다. 무엇이, 그 무엇이, 그 자신의 모습을, 그 자신의 그림자를, 그 자신의 침묵의 말을, 드리울 때까지, 거느릴 때까지.
빛이 이동한다. 다시 페이지가 넘어간다. 나의 가방엔 생각보다 더 많은 종이가 있었다. 종이 곁에는 연필이, 연필 곁에는 어둠이, 흑심은 무심히 반짝거리며 내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빛이 이동한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 다시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우리의 두께를 드러내도록 합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하도록 합시다.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상하도록 합시다. 너무 넓은 방은 필요치 않습니다. 여백은 채워져서는 안 될 것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빛이 이동한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새들은 요란한 지저귐으로 자신의 재난을 알린다. 누군가는 지속적인 낮잠으로 자신의 재난을 알린다. 빛이 이동한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 노래가 들려온다.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 집시다. 날아갑시다. 두께 속의 공기를 느낍시다. 우리는 불행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텅 빈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사람들이지요.
빛이 이동한다. 너의 이마 위로 어떤 문장들이 흘러간다. 찰랑이다 출렁인다. 넘실거린다. 우리는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다. 이제 밥을 먹읍시다. 잠들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일보다 더 추울 겁니다. 닫아둔 덧문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 들고 있었다. 나뭇잎과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나의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이동한다.
-이제니,「나선의 감각-빛이 이동한다」(『실천문학』,봄호)전문
이 시에서 빛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과 함께 공간 내부의 움직임, 무의식 흐름, 말의 흐름과 침묵까지 아우른다. 빛에 동반되는 것이 그림자고 그림자의 이동을 통해 시인은 부유하는 삶, 삶의 헛것들이 떠도는 유폐의 공간을 본다. 이 시에서 그림자는 실체 없는 존재의 지상적 현현으로 유령 혹은 헛것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그림자의 주인이 바로 ‘나’와 ‘너’이므로 나의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시간의 이동 속에서 드러나는 실체가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의 실체 없는 삶을 표상한다. 결국 그들에게 삶은 캄캄한 방이고 그들은 스스로를 어두운 방에 유폐시킨 자들이다. 그러기에 이 유폐의 공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문장들을 흐르게 하는 일이다. 찰랑찰랑, 출렁출렁, 넘실넘실 너의 육체를 타고 육체와 함께 문장들을 물처럼 흐르게 하는 일이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상상하는 일이다. 그러다가 서로 침묵하면서 잠드는 일이다.
이 시에서는 그동안 이제니가 보여주었던 언어의 유희적 운용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반복을 통한 리듬, 리듬의 빠른 전개에 따른 속도감이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잠시 그녀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유희적 말놀이의 발생 토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대체로 말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들은 말의 불완전성, 즉 말의 결핍과 부재를 본다. 결핍된 말로는 사물을 사물 자체로 세계를 세계 자체로 그려낼 수 없고, 언어에 의해 사물들은 감금되고 왜곡된다는 언어관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불안전한 말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비극적 실존체이고 시인에게 세계는 비극이 상시 공연되는 광대한 무대가 된다. 이런 불합리하고도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받는 상처들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언어의 결핍을 언어의 과잉으로 채우려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 슬프기 때문에 차라리 발랄하게 웃어버리고자 자학하는 건 아닐까. 이 자학놀이의 대상으로 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녀에게는 종이와 연필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것들조차 상상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 자학적 상상놀이의 유폐지에서 피어나는 말꽃, 그게 이제니의 시다. 그러기에 그녀는 유폐의 시간, 고독의 두께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
— [현대시] (2011년. 5월호)
• 함기석 약력 /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국어성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뿔랑공원』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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