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지던 그날의 기록을 보면 조광조는 죽음의 순간 까지도 중종이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조광조는 금부도사 유엄에게 죄명을 적은 쪽지를 보여 달라고 하였고, 이어서 심정의 벼슬을 물었다. 죄명을 적은 쪽지와 남곤, 심정이 주요 관직에 있음을 알고 난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조광조는 방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했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실록은 이때 조광조가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엿보았는데, 아마도 형편을 살폈을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사약을 거두라는 명을 기대했던 것일까. 어쩌면 조광조는 죽는 순간 까지도 자신이 당한 이 참혼한 배신을 믿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일을 기록한 사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사관은 이렇게 적는다.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 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
사관의 말처럼 중종은 조광조를 총애했다. 조광조를 등용한 것도 그였고, 그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승인했던 것도 그였다. 그리고 조광조를 죽인 것도 중종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밤의 과정을 보면 누구보다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한 것도 중종이었다. 왜 중종은 조광조를 이렇게 잔인하게 버렷던 것일까?
1. 신하에 의해 옹립된 군주 중종
신하가 쿠테타를 일으켜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거나 왕위를 바꾼 경우는 중종 이전에도 있었다. 태종과 세조가 그예이다. 그러나 중종반정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과는 성격이 달랐다. 태종과 세조는 자기가 주도해서 정변을 일으켰다면 중종은 정변의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태종이 스스로 왕관을 썼다면 중종은 신하가 왕관을 씌워준 것이다
당연히 중종의 힘은 약했다. 중종 즉위초 정국은 정국공신이라고 하는 반정공신들이 주도했고 이른바 반정3대장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에 의해 주도되었다. 중종은 이런 권력구도를 바꾸고 싶어했다. 정국공신을 견제하고 친정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등용하고 지지했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2. 국가의 병통이 가짜로 된 공신들에 있다.
국문장에서 조광조는 자신의 출사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신은 38세의 선비로 이 세상에 믿은 것은 전하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국가의 병통이 가짜로 공신이 된 신료들이 사욕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를 막아 국가의 명맥을 길이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조금도 사심이 없었습니다."
가짜로 공신이 된 자들 이른바 훈구파들이 국가의 병통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훈구파의 연원은 객국공신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개국공신은 태종의 숙청에 의해 국가의 병통이 되지 못했다. 세종이 조선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은 태종에 의해 개국공신들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달랐다. 비정상적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공신들을 책봉했는데 이들에게 막대한 토지와 권력을 주었다.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들을 숙청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에게 부와 권력을 나누어 주었으며 온갖 특권을 부여했다. 세조때만 해도 이들 훈구공신들은 어느정도 견제되었지만 세조의 후계자인 예종과 성종때는 얘기가 달라렸다. 이들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권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훈구공신들은 온갖 불법, 탈법적 수단으로 토지를 침탈해갔다. 성종 5년 정괄의 상소는 훈구파의 토지 독식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여러 고을의 둔전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아니한데, 근래에 들으니 수령들이 다 재상에게 뇌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강직하고 밝은 조사를 어사로 보내 추쇄하게 하소서"
- 성종 5년 12월 11일
이듬해에서는 호조에서 재상들의 토지 침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전주(땅주인)가 전세를 거둘 때 함부로 거두는 자가 있으면, 전부(경작자)로 하여금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하였으나, 초야의 백성들이 어찌 일일이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이용해 마음대로 거두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사헌부에게 분경의 경우처럼 무시로 적발해 위반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소서"
- 성종 6년 11월 1일 -
그러나 호조의 건의는 훈구파의 거목이었던 한명회, 정창손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훈구파는 경제적으로는 백성들의 토지는 물론이고 국유지까지 침탈하면서 거대지주가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능가하는 거대권력집단 이며 특권집단이었다. 조광조는 이런 훈구파를 축출하지 않고서는 조선의 국가시스템이 정상화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훈구파 축출 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조광조와 중종은 손을 잡았던 것이다.
3. 조광조의 개혁정치
조광조는 훈구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림을 대거 등용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현량과였다. 이는 중종의 생각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 14년에 현량과가 실시되었다. 현량과 실시에 대해서 훈구파는 분노했고 동시에 불안에 했다. 정국공신 강윤희는 김우증이 "이제 현량과 출신이 진출하여 포진하게 되면 구진을 배척하여 점차로 방축할 것이며 정국공신도 제거하려 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쳐 없애야 한다" 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훈구파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현량과 실시로 자파를 충원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은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소수의 훈구공신들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대다수 농민들이 토지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이런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중종12년 사림파는 토지 소유 상한제인 한전제 실시를 건의했고 이듬해에는 일정한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균전제 실시를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백성의 빈부 차이가 너무도 심합니다. 부자는 그 땅이 끝없이 연달아 있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땅도 없습니다. 비록 정전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시행할 수가 없으니 균전법을 시행하면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우의정 신용개가 박수량을 타일렀다.
"균전법은 과연 훌륭한 것이므로 전에도 의논이 있었지만, 지금 부자의 땅을 떼어서 가난한 자에게 준다 해도 그 부자의 자손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이것을 도로 뺏을 수는 없으니 이 점이 큰 폐이다."
박수량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진 정사는 반드시 경계를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읍 안에 수백 결씩 땅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니, 이대로 5~6년만 지나면 한 읍의 땅은 모두 5~6인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이 땅들을 고르게 분배하면 이야말로 선왕이 남긴 정전법의 뜻이 될 것입니다."
- 중종 13년 5월 27일 -
토지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분배정책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지주의 대부분이 훈구공신이 었기 때문에 토지제도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광조는 훈구공신들을 직접 겨냥하기로 결심했다. 위훈삭제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4. 위훈 삭제
중종 14년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는 이등공신 중 유순, 구수영, 김수동 등 7명을 삼등공신 중에서는 강혼, 송일 등 9명을 그리고 사등공신은 전원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종을 만난 자리에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말했다.
"스스로 공신이라 하여 삽혈동맹 하고 천지신명에게 고하였으니, 무엇인들 그 기망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강혼은 지극히 간사한 사람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빌붙었습니다. 유순은 반정 때에 어쩔 줄 몰라햇던 꼴 때문에 이제껏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구수영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도 오히려 공을 누릴 수 있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나 위훈삭제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공신을 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한 사람을 개정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 많은 사람이겠는가! 이제 어찌 뽑아내어 개정할 수 있겠는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은 위훈삭제에 모든 것을 걸었다. 대사헌 조광조, 대사간 김식을 비롯한 대간들은 위훈삭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1월 2일 영의정 정굉필, 우의정 안당, 좌찬정 이장곤 등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정국공신은 이미 삽혈동맹하였으니, 이제 다시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간이 논한지 이미 오래고 사직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등 중에서 물론이 시끄러운 자만을 특별히 재량하여 줄이게 하소서."
그리고 11월 11일 중종은 결국 이,삼등공신 일부와 사등공신 전원을 포함한 76명의 녹훈 삭제를 지시했다. 조광조가 승리한 것이었다. 이는 사림파가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5. 훈구파의 반격과 중종의 배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젊었다. 그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젊은 만큼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다. 동시에 타협을 몰랐고, 성급했다. 그 성급함이 때때로 중종을 질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중종14년 중종은 현량과에서 장원급제한 김식을 종3품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했다가 10여일 후에 정3품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 파격적 인사였다. 그런데 사림파는 김식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시켜 달라고 졸랐다. 중종은 홍문관 부제학 적임자를 기다렸다가 김식을 대성에 임명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사림은 계속 중종을 압박해 김식을 성균관 대서성에 임명시켰다.
위훈삭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간들은 전원 사직으로 중종을 압박했고 한밤중에도 몰려와 중종을 압박했다.
사헌부, 사간원의 장관을 불러입대하게 하자 조광조, 이성동이 공신에 관한 일을 극진히 논하여 반복해 마지않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 밤 삼고(한밤중)였다.
- 중종 14년 10월 29일 -
이런 사림의 밀어붙이기식 태도에 중종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제거한 데에는 이런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또다는 이유는 중종이 위훈삭제이후 훈구공신들의 반격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는 사림을 제거하려 했던 훈구파의 음모에 연산군이 말려들어간 측면이 강하다. 반면 갑자사화는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연산군이 훈구파를 제거한 사건이었다. 이때 훈구파의 거두였던 윤필상은 귀양가 사약을 먹고 죽었고, 이미 죽은 한명회와 정창손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중종반정은 그에 대한 훈구파의 대답이었다.
중종은 형 연산군의 몰락에서 훈구파를 쉽게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은 성급하게 훈구파를 몰아치고 있었다. 위훈삭제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선을 넘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에 대한 훈구파의 조직적 반격이 두려웠던 중종이 훈구파와 손잡고 주도적으로 조광조 제거작업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기묘사화가 일어난것은 위훈 삭제 나흘만인 중종 14년 11월 15일이었다. 이날 밤 중종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에게 밀지를 내려 사림파 제거를 명령한다.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을 삭제한 것은 공신들을 신하가 임금을 폐하지 못한다는 강상의 죄를 어긴 것으로 몰아가려 함이다. 먼저 많은 공신을 삭제한 후에 나머지 소수의 공신들에게 연산을 폐한 죄를 물으면 경 등은 어육이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내게 미칠 것이다.(중략) 내가 이름은 인군이나 실상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림이 훈구공신들을 제거하고 나면 다음은 내가 될 것이다. 는 내용이었다 기묘사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밤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 등 사림세력들을 모조리 잡아가둘 것을 명했다.홍경주와 남곤이 "국문할 것도 없이 때려죽여야 합니다." 라고 청하자 중종은 이를 허락했다. 이때 조광조는 대사헌이었고, 김구는 부제학, 김정은 형조판서 김식은 대사성 이었다. 이런 주요 관료들을 국문도 없이 때려 죽이자는 것이었고 중종은 이를 또 허락한 것이었다
이에 병조판서 이장곤이 이는 도적의 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장곤의 극간 때문에 조광조는 국문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의정 정광필은 강력하게 조광조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간언했다.
"이 사람들을 어찌 다 죄주겠습니까? 붙잡힌 사람들 중에 승지들은 바른 의논을 따르기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이자는 나중에 나라에서 크게 써야 할 사람이니 파직만으로 마땅할 것 같고, 조광조 등도 무슨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옛사람의 글을 보아서 지극히 좋은 정치를 해보려는 뜻에서 한 일이 간혹 과격한 적이 있었으나 이로써 심하게 치죄할 수는 없습니다. 성대에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받으면 반드시 사책에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금부를 시켜 취조하여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가려야 하겠습니다."
정광필, 이장곤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조광조는 국문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중종은 냉혹하게 조광조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한때는 자신이 총애했던 신하를...
그날 밤 옥에 갇혀있던 조광조는 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임금을 만나보고 싶소. 우리 임금이 우리에게 어찌 이렇게까지 하신단 말이오."
조광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위훈삭제 나흘만이었다. 그 나흘만에 중종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현실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문을 담당했던 추관 김전은 조광조 등이 옥중에서 지은 옥중소를 중종에게 보고했다.
"임금이 잇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아서 우리 임금이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제 몸을 위한 꾀이겠습니까? 천일이 비추는 아래에 다른 사심이 없었습니다. 신 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하나, 사류의 화가 한번 시작되면 뒷날의 국가의 명맥이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천문이 멀어서 생각을 아뢸 길이 없었으나 잠자코 죽는 것도 참으로 견딜 수 없으니 다행히 친히한번 국문해주시면 만 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뜻은 넘치고 말은 막혀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들을 국문해 주기를 원했다. 중종을 만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충심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종은 그럴 의지가 없었고 붕당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능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2월 16일 조광조에게 중종은 죽음을 명령했다.
6. 어진 사람이 죽었다.
기묘록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조광조가 죽자, 그의 아우 조승조가 길거리에서 울었는데 한 노파도 울면서 물었다고 한다.
"낭군은 무슨 일로 우는가?"
"나는 형님이 죽었기 때문에 울지만, 노파는 어찌해서 우는가?"
"국가에서 조광조를 죽였다고 들었다. 어진 사람이 죽으니, 백성들이 반드시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운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다스리기를 공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복종하여 매양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이 오셨다' 라고 말했다. 남곤 등이 그가 인심을 얻었다고 은근히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조광조가 죽은지 1년후 사관은 실록에 이런 평을 썼다.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 등이 용사할 때에는 탄핵과 논박이 크게 행해지므로, 조정 안의 재집(집정대신)이 주현에 요구하지 못하고 주현의 관원도 스스로 금지하였기 때문에 민간에는 침탈당하는 걱정도 없고 조정에도 뇌물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류가 화를 입으며 청렴한 절조가 따라서 무너지니, 조정이 부정한 재물을 탐내고 군현도 휩쓸리어 극심하였다.
조광조와 그를 따랐던 사림은 젊었다. 젊은 만큼 순수했던 그들은 부와 권력을 독식하는 훈구공신을 축출해 조선의 국가시스템을 바로 잡고자 했다. 거침없는 탄핵과 논박으로 훈구파의 부패를 근절하고자 했고, 강력한 토지분배정책을 주장해 토지의 양극화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정치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명제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젊은 만큼 순수했던 그들은 동시에 너무 성급했다.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상에 맞춰 현실을 너무 빨리 바꿀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개혁의 최대 지지자였던 중종은 염증을 느꼈고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또한 훈구파의 힘을 얕잡아 보았다. 수십년 기간 동안 부와 권력을 장악했던 그들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중종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 중종의 배신은 너무 갑작스런 것이었다. 정치란 것이 때로는 친형제 간 친 부모자식간의 사이에도 배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현실을 바꿀려고 했던 한 젊은 개혁정치가는 그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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