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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519.12.20 반대파 모략으로 이상주의 정객 조광조에 사약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9. 2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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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12.20  반대파 '주초위왕' 등 모략으로 이상주의 정객 조광조에 사약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사사(1519.12.20)-매일신문, 2009.12.2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8078&yy=2008


유배 조광조 사망(1519.12.20)-국제신문, 2006.12.19.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440&key=20061220.22030205629


반대파 '주초위왕' 등 모략으로 이상주의 정객 조광조에 사약(1519.12.20)-전북일보, 2005.12.19.
http://www.jjan.kr/local/others/default.asp?st=2&newsid=2005121920583700&dt=20051220

 

 


<참고> 기묘사화

 

 

1519년 12월 20일 조광조가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세력에 의해 능주(綾州)로 귀양가 사약을 받고 38살의 나이로 숨졌다. 중종에 의해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趙光祖)는 38살 때 대사헌의 벼슬에 올랐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이 심했다.
 
중종 14년(1519) 조광조 일파의 강한 요청에 의한 소위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 즉 중종 반정 때 참가하지도 않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들을 모두 가려내어 그 78명을 공신록에서 지워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신진세력이 기성세력에 가한 직접적인 정면도전이며 타격이었다. 조광조 일파는 이 때문에 마침내 훈구세력에게 몰리어 억울한 찬출(竄黜)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즉 남곤, 홍경주, 심정 등 훈구세력들이 조광조의 왕위 찬탈 음모를 조작, 중종을 부추켜 대대적인 공격을 사림파에 퍼부었다. 그들은 희빈 홍씨와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 肖 爲 王)' 이라는 4자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했다. 글자가 드러나게 되자 궁인(宮人)으로 하여금 잎을 따서 왕에게 바쳤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된다.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은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70여명의 사림파 관료들이 반역죄로 목숨을 잃거나 처벌을 당했다. 이로써 사림파의 개혁정치는 모두 페지됐다. 이 해가 기묘년으로, 이 사건을'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이상주의 정객 조광조에 사약

반대파 '주초위왕' 등 모략으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 ― 그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1510년 진사에 수석합격하고, 알성시에 급제했다. 특히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두고 중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아 그의 제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재주가 뛰어난 선비 120명 중에서 왕이 직접 인재를 뽑음으로써 인사문제로 인한 간신들의 작폐를 없앴다.

 

이때 선발된 선비는 장령 김식(金湜) 등 28명으로 그들은 각기 요직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오직 성리학에 바탕한 철인(哲人) 군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기성 귀족들을 소인배라고 지목했다. 또한 사회에 미풍양속을 진작시키기 위해 철저한 미신의 타파와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케 하였다.

 

또한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각종 문헌 및 서적을 쉽게 번역인쇄 보급시킴으로써 이상주의 정치를 실시하려고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 문란하게 책록 되었으니 이를 공정하게 재정리해야 한다고 소를 올려 심정?홍경주 등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깎아 버림으로써 그들로부터 일대 반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위를 탐내고 국정을 농단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등의 모략에 의해 능주에 귀양가 그곳에서 12월 20일 사사되었다. 이를 세상에서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전북일보

 

 

 

 

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사후 붙은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집안 내력과 초년기 #



그의 5대조 조상은 개국공신 출신이었지만, 아버지는 찰방을 할 정도로 조광조가 태어날 당시엔 가세가 몰락해 큰 권세는 없었다. 아버지가 어천찰방을 지내던 중 유학자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자 조광조는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김굉필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김굉필에게 배운 유학은 조광조의 일평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10년,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중종의 명으로 성균관에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유생 200명을 천거하는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로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뛰어난 학문의 수준을 가진 조광조였지만 늘 선비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로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읽게 되는 책인 《소학》을 늘 손에서 놓지않고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조광조를 놀리면서 "소학을 열심히 읽어라. 그러면 조지서사지는 할 수 있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이야기가 전한다.


2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


1515년, 증광문과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3사중 하나인 홍문관에 들어가 여러 직책들을 거친 뒤 1518년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훈구세력과 반정공신들에게 눌려있던 중종에게 조광조는 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역설했고 이런 조광조의 주장에 중종도 동의하면서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시작되었다.



조광조는 사림파들을 규합하는 한편으로 성균관 유생들을 통한 압력행사라는 적절한 카드를 쥐고서 도학정치에 입각한 개혁을 밀어붙였다. 우선적으로 국왕도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을 닦아야 된다는 신념에 따라 중종을 여러 강연으로 마구 굴리는 한편(…) 군자소인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훈구파들과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또한 성리학 이념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정몽주, 정여필 등을 문묘에 위패를 모시고 관직을 추증하는 것을 추진하는 한편, 향약을 널리 보급했다. 도한 성리학적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교적인 제사를 담당하던 소격서를 혁파시켰다.



또한 조광조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앞세워서 중종반정때 폐위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이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광조는 훈구파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힐 작정으로 중종반정 당시 공을 세우지 않고도 공신이 된 자들의 공신자격을 박탈할 것을 주장하는 위훈삭제를 주장했다. 이는 반정공신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기묘사화와 몰락 #


조광조의 개혁정책들은 성리학적 이념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문제는 조광조 자신이 너무 성급하고 완급조절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들을 중종에게 너무 강요한데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광조의 왕도정치에 공감했던 중종도 자신을 마구 굴리고 갈구는 조광조에게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반정공신들이 폐비 신씨 복위문제와 소격서 혁파, 위훈삭제 등으로 조광조와 사림파들에게 감정이 격해지면서 중종은 조광조와 반정공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반정공신들을 택하게 된다. 이는 중종 자신이 반정공신들의 추대로 국왕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인 한계에 기인했다. 야사에 의하면 남곤 등이 궁궐 후원의 나뭇잎들에 꿀로 글씨를 새긴 뒤 개미들로 하여금 그 잎을 파먹게하여 "주초위왕"[1]의 글씨를 만들게 한 뒤 중종에게 이것을 고해바쳐 중종을 분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야사에 불과하다. 실제로 KBS 방송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에서 실험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중종 자신의 조광조에 대한 두려움과 개혁에 대해 슬슬 질려갔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중종 항목 참조)



어쨌든 반정공신들의 주청으로 조광조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조광조를 비롯해 사림파 대부분들이 체포되었다(기묘사화). 조광조는 이후 능주로 유배되었지만 조광조를 유배보낸 것에 대해서 중종이 후회하는 기색을 보일 것을 두려워한 반정공신들의 압력과 성균관 유생들의 과격 시위로 인해 겁을 먹은 중종은 결국 조광조는 유배 1달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사족으로 조광조를 죽이는 데 한 몫을 한 남곤은 사실 사림파로 조광조의 선배 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후회해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쓴 모든 글을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그의 글은 모두 후대에 전하지 않고, 다만 시 한 수만 전한다. 죽은 뒤에는 몰라도, 같은 패거리 심정이나 이행과 다르게 그가 영의정의 자리를 거치고 천수를 누린 것에는 이러한 반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중종 말년에는 "젊은 친구들이 나름 잘해보려고 했던 일인데,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처벌한 것은 아닌가 싶다."란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 그 때까지 살아있던 김안국이 복직되었고(그의 친구인 김안로의 영향이란 말도 있다.), 죽은 이들은 다수가 복권되었으나 유독 조광조만은 선조 대에 와서야 복권되게 된다. 아마도 훈구세력의 견제, 무엇보다도 중종의 질투가 아니었나 하는 분석이다.


4이야기거리와 평가 #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아무리 고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키가 좀 작은 편이었는데, 부패한 대신들이 자신을 내려다 보는게 싫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녀서, 조광조가 오면

멀리서부터 콧구멍만 보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말 그대로 우스개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것. 조광조의 꼿꼿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보인다.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는 밝은 정치적 감각에 의한 시대 개혁이 아니라,단지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한 학자의 성리학 독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실제로 성리학에 매우 충실해 중국에 대한 사대도 반대하지 않았다.아니, 어떤 면에서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조광조가 정치가라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친 학자라는 단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한 여러 개가 있는데,그중 하나가 바로 여진족 토벌이다. 중종이 병조판서 유담년과 여진 토벌을 논하다 몰래 기습을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그런데 갑자기 조광조가 두두두 달려오더니 '아니 되옵니다 저은하~!' 하고 펄썩 엎어지며 아뢰길, 여진이 죽일 놈들은 맞으나, 비겁하게 기습을 하는 것은 군자의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유담년이 '밭은 농부가 갈고 길쌈은 아녀자가 합니다. 북방의 일은 제가 잘 아니 제 의견을 들어주시죠' 라고 했으나,역시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고지식했던 조광조가 기를 쓰고 반대해 결국 무산된 일이 있다.



또 유명한 사례로는 소격서 철폐에 관한 건이 있다.국가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라는 곳이 있었는데, 조광조가 이를 철폐하기 위해 밤새도록 무릎꿇고 궁궐에서 상소를 읽은 것은 유명하다.그런데 그 소격서 폐지로 내세운 이유가 두가지인데, 첫째는 성리학으로 운영되는나라에서 도교 따위 미신에 의지한 기관을 운영한다는게 말이 안 된다는 이유이다.이것까진 괜찮다. 그런데 두번째가 문제였다.무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명나라 황제가 할 일이지일개 제후왕인 중종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한것(...)



단연 조광조가 정치가보다는 학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조광조는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를 원했던 사람으로 그의 정책들은 한결같이 이런 기반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리학을 통한 이상적인 국가의 형성을 기대했지만 조광조 자신이 흑백논리를 앞세워 너무 과격하고 성급하게 개혁정책을 밀어붙였고, 중종에게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여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가 뿌려놓은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이라는 이상은 결국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현실화 되었다. 하지만 역시 조광조가 바라던 이상까지는 못 되었다는 게 문제. 역시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조광조는 그래도 신진 사림 중에서는 가장 온건파에 속했으며, "땅은 좁고 인물이 없으니 노비나 서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뽑아써야한다"라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인들에게도 공손히 대했으며, 심지어 찾아온 금부도사에게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하니 의외로 대인배일지도.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 ― 그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1510년 진사에 수석합격하고, 알성시에 급제했다. 특히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두고 중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아 그의 제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재주가 뛰어난 선비 120명 중에서 왕이 직접 인재를 뽑음으로써 인사문제로 인한 간신들의 작폐를 없앴다.

 

이때 선발된 선비는 장령 김식(金湜) 등 28명으로 그들은 각기 요직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오직 성리학에 바탕한 철인(哲人) 군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기성 귀족들을 소인배라고 지목했다. 또한 사회에 미풍양속을 진작시키기 위해 철저한 미신의 타파와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케 하였다.

 

또한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각종 문헌 및 서적을 쉽게 번역인쇄 보급시킴으로써 이상주의 정치를 실시하려고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 문란하게 책록 되었으니 이를 공정하게 재정리해야 한다고 소를 올려 심정?홍경주 등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깎아 버림으로써 그들로부터 일대 반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위를 탐내고 국정을 농단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등의 모략에 의해 능주에 귀양가 그곳에서 12월 20일 사사되었다. 이를 세상에서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조광조[ 趙光祖 ]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학자·정치가.

 

 

중종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출신 및 수학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연산군 시절의 폐해에 느낀 바 있어 '정군심'(正君心)·'치군지'(致君知)를 급선무로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하는 한편, 도학정치·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자성 유숭조(柳崇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정치사상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반정공신(反正功臣)인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그뒤 수찬을 거쳐 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의 참화를 거울 삼아, 임금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개혁정책의 시행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 사림파).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진하여 당시를 이상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기묘사화와 개혁정책의 좌절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하여,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왕에게 바쳐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홍경주를 시켜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하고, 낮은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겨 국세를 기울게 하여,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했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자 현량과가 폐지되었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되었다(→ 기묘사화).

 

역사적 의의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 성리학).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 양현사(兩賢司)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 靜庵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네이트 백과사전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과연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정의 출사 전부터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아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기 전부터 명성이 있어, 1510년(중종 5년) 11월 15일 진사의 신분으로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테스트의 일종인 강경에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중용]을 강하여 약(略)이라는 성적을 받게 되었는데, 이 날 실록에서는 그를 사림의 영수로 칭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가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어릴 적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 대 국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때 사림들이 정치에 재진출하며 조정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사림이란 후일 율곡 이이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을 가지는 자”들을 말한다. 조광조는 바로 이런 성향의 사림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과 달리 당대까지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던 세력을 우리는 역사상 훈구 세력 또는 훈구파라 칭하고 있는데, 15세기 후반 이후 훈구 세력에 의한 권력형 비리가 여러 곳에서 문제화되었다. 사림세력은 이러한 훈구 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조선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전대의 잘못을 청산하는 유신 정치를 꿈꾸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이른바 유신 정치를 추진하였다. 앞서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연산군 대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 성균관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이는 유학을 진작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앞서 사화를 겪으며 귀양을 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을 소환하여 중용하였다. 다만 중종은 즉위한 초반에는 반정 공신들의 견제로 인해 정국을 주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8년 여가 지나면서 주요 반정 공신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중종이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함경도 지방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으로 기회로,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학군자(小學君子)’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문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로써 본다면 조광조는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한 후,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 그것이었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대 시행되던 과거제가 주로 기예만 시험을 본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덕성에 바탕한 관인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못다 핀 개혁의 열망, 기묘사화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묘사화와 관련해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술수가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지동(地動), 즉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를 국왕이 근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조광조와 반대 측에 있던 남곤과 심정 등은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중종에게 간언하였다. 여기서 권세 있는 신하가 다름 아닌 조광조였다. 그리고 남곤 등은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천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 ‘趙’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마음을 돌리게 되고, 이를 간파한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을 일단 하옥되었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너무 날카롭고 급진적이었던 개혁가

 

기묘사화로 그동안 조정에 진출해 있던 많은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되고, 결국 이 일로 조선 내 쇄신의 분위기는 일단 주춤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명종 초 척신세력의 대결 과정에서 발생한 을사사화로, 다시 한번 사림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법, 명종 대 후반부터 척신세력이 퇴조를 보이고 점차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선조 즉위와 동시에 정치를 주도하게 되면서 앞서 조광조가 주장했던 이른바 도학정치를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조광조는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선다는 것은 결국 당대 사회의 대세와 충돌하게 되고, 끝내는 당사자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아는 율곡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이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神武門)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 (율곡전서 [동호문답]에서)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조광조 묘소(Ⓒ이근호).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점을,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율곡의 이 같은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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