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가을 / 고정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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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고정희

 


내 속에 깊이깊이 잠든 그대가
흐르는 바람 저쪽에서 회오리치는 날은
누가 내 혼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간다
비탈길 느릅나무에 불이 붙는다
넋을 박은 가로수에 불이 붙는다
산(山)의 이쪽, 대안의 푸른 욕망을 나부끼는
관목숲에 서서히 번져드는 불, 불길
드디어 산이 불타오르고 그대여,
산처럼 큰 정적이 불타는 10월 오후에
그대 미세한 음성이 불타고 있다
내 핏줄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고
내 혼 어디에도 채울 수 없는 누가
내 모든 어둠의 확을 열고
찬란한 불길을 오관에 켜고 있다
아아, 멀리서 진혼곡 같은 바람이
불산을 흔들고 있다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1』(또하나의문화,  2011)
2012-10-09 화요일 오전 08시 5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