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훔쳐가는 노래 / 진은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1. 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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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가는 노래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계간『문예중앙』(2010, 가을호)
-시집『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훔쳐 가는 정의는 무엇일까? 사전은 훔치는 것을 '남몰래 남의 물건을 가져다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다' 라고 풀이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시에서는 훔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 놓으라고 애교 있게 윽박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 놓든 안 내놓든 개의치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 놓아도 가져가고 안 내놓아도 가져갈 것만 같은 태세입니다.   


  훔치는 것은 죄입니다. 하지만 훔쳐서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 훔치면 표절이 되고 모방이 될 수도 있지만 시는 모르게 훔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강을 훔쳐오고 바다를 훔쳐오고 산을 훔쳐와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재능을 훔치고 노력을 훔치고 목표를 훔친다고 해서 죄가 되겠습니까. 죄가 되지 않는 것은 훔쳐서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훔쳐가고 싶으신가요. 훔치고 싶은 용기와 의욕과 열망이 있기는 있나요. 옛말에 혁띠를 하나 훔치면 사형을 당하고 나라를 훔치면 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사랑을 훔치면 사랑이 되는 것인가요. 사랑을 훔쳐서 사랑이 된다면 사랑을 훔치고도 싶고 돈을 훔쳐 돈이 된다면 많이 아주 더 많이 훔치고도 싶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펑펑 내리는 눈처럼 돈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시집을 나눠주는 것처럼 그렇게 펄펄 뿌려도 주고 싶습니다. <정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