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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심보선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은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 뒤에는 무한의 더 뒤가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 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있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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