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시산맥 작품상 심사평>
소금사막을 건너는 말들의 축제
박남희(시산맥 주간)
그동안 시산맥 작품상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 땅에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문학풍토는 아직도 일천하다고 생각된다. 문학을 하는 일이 문학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때로는 언어의 금맥을 찾아 떠나는 시인들의 긴 여정에 문학상이 뜻밖에 만난 바위틈에서 터져 나오는 신선한 샘물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땅에 존재하는 문학상은 대부분 상을 받는 소수의 시인들에게는 잠시의 예정된(?) 기쁨을 줄지는 모르지만, 상과 무관하게 열심히 좋은 시를 쓰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오히려 편향된 문학풍토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을 안겨줄 때가 많이 있다. 그것은 아직도 이 땅의 문학상이 학연, 지연(地緣, 知緣, 誌緣)의 끈에 얽매여서 공정성을 잃고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현실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시산맥 작품상은 문단의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이 땅의 도처에 숨어있는 좋은 시인들을 발굴해내서 그들에게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문학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제정된 소박한 상이다. 이번에 결선에 올라온 시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계간 『시산맥』지에 투고되는 시의 수준이 대체적으로 높고 고르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시산맥 작품상이 국내의 어느 문학상보다도 공정하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이번에 최종결선에 오른 다섯 분의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서 당선작을 미리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1년간『시산맥』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여러 예심위원들이 1차적으로 작품상 후보를 계절마다 5편씩 선정하고, 이들 작품을 대상으로 결선 심사위원들이 무기명 원고에 공정하게 투표를 해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시산맥 작품상 선정 과정의 공정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수우의「물의 새벽」, 신영배의「아름다운 상자」, 신현락의「소금사막」, 윤의섭의「결로 무렵」, 조원의「슬픈 레미콘」등이다. 이들은 그동안 문학상과는 그다지 큰 인연이 없었지만 어떤 문학상에 내놓아도 좋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난 시를 써온 숨은 인재들이다. 5명의 심사워원은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20편을 대상으로 좋은 작품 5편씩을 1차로 선정하였는데, 결선에 오른 작품들은 공히 2~5표를 받아서 최종심에 오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심사위원 전원의 5표를 얻은 작품이 이번에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이 된 신현락 시인의「소금사막」이다. 여러 심사위원의 고른 표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작품이 과연 가장 우수한 작품인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은 표를 많이 받은 작품들을 대상으로 최종적인 의견을 나눈 결과, 신현락 시인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제3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가 된 신현락시인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리면서, 아쉽게도 수상하지 못한 시인들에게는 최종심에 오른 작품에 대한 간단한 작품평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대신한다.
먼저 김수우 시인의「물의 새벽」은 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물의 속성을 생명의 차원을 넘어 꿈과 문학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물의 흐름을 꿈의 흐름과 삶의 흐름으로 은유함으로써 척박한 이 땅에서의 결핍된 삶이 물을 만나 궁극의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러한 표면적 의미코드 속에 “지상의 모든 아가미가 새 소리를 내는 최초의 숲”으로 상징되는 원초적 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 코드는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폭이 의외로 넓고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시는 물고기(아가미)와 새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시적 진술이 없어서, 관념이 주체가 된 상상력과 이미지 전개에 머무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으로 신영배의「아름다운 상자」는 김수우의 시처럼 물 이미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물방울이 어떻게 아름다운 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자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자의 폐쇄성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 상자가 물방울 상자라는 점에서 개방성과 유연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신영배의 물방울 상자가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고 다시 맺히며 커지는 과정을 “둥근 손과 발을 길게 늘려본다 팔과 다리를 구부려 모서리를 만들어 본다 입으로 열고 닫는 말을 생각해본다” 처럼, 대상을 감각적이고도 유려하게 형상화하는 표현미학을 이미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뛰어난 감각에 비해 서사의 뼈대가 약해서 주제가 일상성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
다음으로 윤의섭의「결로 무렵」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결로 무렵의 이슬방울을 ‘바람-달빛-이슬’의 연결고리를 매개로 하여 ‘그리움’에로 내면화시키는 형상화 작업이 이채로운 시이다. 특히 단지 촉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을 ‘달빛’ 속에 깃든 ‘그리움’으로 변용시켜서 화자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는 방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이 ‘이슬’을 구체적인 인간사의 ‘내음’으로 후각화하여 “이슬은/ 이슬이기 이전에 숨”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과 어울려 이 시의 강점으로 꼽힌다. 단지 후반부의 후각 이미지의 나열이 전반부의 절심함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어서 조원의「슬픈 레미콘」은 ‘타원의 항아리’로 표상되는 지구를 ‘슬픈 레미콘’으로 형상화하여 지구의 슬픈 미래를 조망해보고 있는 시이다. 시인에 의하면 지구는 “몸통 가득 시멘트를 채우고 마지막 남은 10% 눈물을 간간이 뒤섞으며 짐승의 몸을 이어가는 고래”로 표상된다. 시인이 지구의 슬픈 현실을 직시하면서 “얼마를 돌려야 저 거대한 항아리가 깨어지나”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레미콘이 생산해내는 것이 결국은 직사각의 ‘한 장 벽돌’로 압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실망감 때문이다. 조원의 시는 이처럼 ‘레미콘’과 ‘지구’의 유사성을 십분 활용하여 시인의 구체적인 현실인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는 표현이나 형상화의 완결성에 비해서 주제가 너무 낯익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끝으로 이번에 시산맥 작품상으로 선정된 신현락 시인의「소금사막」은 전체적으로 산문시의 어법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소금’과 ‘모래’, ‘바다’와 ‘사막’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근원적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는 시인의 사유가 다채로운 긴장감과 이야기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수작이다. 시인은 이 시의 초두에서 ‘소금사막’의 유래가 인간의 화석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면서 ‘소금사막’의 신비를 밝히는 일이 결국 인간의 신비를 밝히는 일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시인의 진술은 ‘모래(사막)’의 삭막함과 ‘바다’의 생명성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인간의 삶의 비의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의미는 단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모래의 여자’와 ‘소금에 중독된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구체성을 얻고 있다. 이 시는 이렇듯 소금사막의 유래를 더듬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인 사랑 이야기로 짜임새 있게 연결해줌으로써 이미지와 서사가 튼실한 짜임새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 구조는 ‘소금사막’이라는 중심소재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속성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서사화하는 시인의 역량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시들과 차별화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현락의 시에도 드러나 있듯이 인간의 삶은 소금사막을 건너는 일에 비견된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역시 소금사막을 건너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모래여자가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기다리는 일이다. 시인은 소금사막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신비한 힘에 목숨을 거는 존재들이다.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여자를 찾아오듯이, 좋은 시는 시에 중독된 시인들에게 찾아온다. 이 땅의 시는 소금과도 같다. 썩은 냄새 풍기는 부패가 만연한 세상으로 우리는 지금 소금냄새 물씬 풍기는 한 시인을 내보낸다. 앞으로 그가 걸어갈 소금사막에 아름다운 바람의 발자국이 남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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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신현락 시인>
아름다운 불씨
15호 태풍이 지난 이틀 뒤 14호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듣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소형 태풍인 14호 태풍이 소멸하지 않고 대만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가 대형태풍이 터준 길을 따라서 올라온다는 설명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15호 태풍 뒤에 14호 태풍이 온다는 기별만큼이나 두렵고 신기했습니다. 문득 몇 년 전에 꿈속에서 시를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못 외워서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하였던 저는 무엇이든 늦게 깨우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를 쓴다고 한 지는 꽤 되었는데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현몽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올해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매우 부산한 해였습니다. 천성이 게으른 탓에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편인데 거부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하여 문예지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뜻하지 않게 시집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번민할 수 있는 시간을 뺏겨서 몸과 마음은 더욱 건강해진 것 같은데 한동안 열심히 하던 시작은 주춤할 수밖에 없는 한 해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듣게 되는 수상 소식은 태풍 뒤에 보는 맑은 하늘과 같은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제 시와 제가 몸담고 있는 시단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시가 가장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는 주관적인 장르라는 것은 시를 쓴다는 행위가 그만큼 절실함과 정직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도 무의식에 흔적을 남기는 흉터를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려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한 절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울음’이나 ‘침묵’ 이외의 적당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대답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제가 처한 시적 상황입니다.
제가 살아왔던 세상은 제 시에서 가끔 등장하는 극지의 장소, 즉 사막, 우물, 절벽이나 히말라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때 저는 가시에 찔린 상처나 전갈의 울음만 써왔습니다. 제가 죽은 후에나 독자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까지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시를 읽어주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시 쓰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지만 저 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 있었던 게지요. 아시다시피 시는 가장 개인적인 발화 양식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도달할 수 있으며 관계의 그물망으로 서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풍요로운 환경에서 탄생하는 시는 없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시창작의 근원적 동기이자 풍요로운 상상력의 시발점이라는 깨달음으로 쓴 시가 「소금사막」입니다. 이미 박남희 시인이 적절하게 지적하였듯이 생명과 죽음의 대립된 세계를 넘어서는 진실, 사랑의 한계와 영원성에 대한 탐구가 이 작품에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시의 길은 자유의 길입니다. 한 곳에 머무는 시는 금세 부패합니다. 창조의 에너지는 부단한 변화와 자기 갱신 속에서 생성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의 변화는 시인의 몸과 세계관이 같이 변해야 생명력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카멜레온처럼 피부만 변하는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없습니다. 섣부른 변화는 오히려 자신의 시를 망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주역에서 ‘낳고 또 낳는 것이 역(易:해와 달을 뜻하기도 함)’이라 하였듯이 생성은 서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가운데 발생합니다. 저는 제가 낳은 시와 근친상간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닌 것들과 더불어 새로운 언어와 세계를 낳고 또 낳겠습니다. 끝까지 간다는 말은 감히 할 수 없지만 중간만 낳아 놓고 시라고, 자유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사는 것, 제가 아닌 것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보는 것이 제가 시를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상이 기쁜 이유는 단지 제 작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단에 오로지 작품으로만 심사의 기준을 삼는 곳이 있다는 것, 공정함과 깨끗함이 살아 있는 시의 단체가 있다는 것, 이러한 시산맥의 신념은 저처럼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큰 희망이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작고한 김남주 시인은 ‘작은 불씨가 광야를 태운다’고 썼습니다. 시산맥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 시단의 아름다운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상을 외롭게 시를 쓰는 시인들의 이름을 대신하여 고맙게 받겠습니다.
끝으로 시산맥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이름 모를 소수의 독자들에게도 고개를 숙입니다. 시를 향한 그 맑은 눈빛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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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근작시>
히말라야 독수리 외 4편
신현락
내내 탐닉하였던 깊은 우물 바닥이 여기입니다 마른 우물의 바람이 여러 생의 지층을 밀어 올려 하늘과 가까운 산정을 이루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끝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 산정이란 생각만으로도 내 겨드랑이에는 푸른 날개가 출렁입니다
계곡에서 날아오는 한 무리의 독수리를 보며 나는 누구의 몸을 얻어 어느 정신으로 죽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가장 가벼운 숨결 하나 날개 위에 올려놓는 일이란 걸 어릴 적 빠졌던 우물물을 다 마시고서도 어렴풋한 기억인데요
지금 바람의 결을 타고 사뿐히 내려앉는 커다란 날개를 보고 서 있자니 끝내 무너지지 않던 손바닥만한 천장이 광활한 우주였음을 알겠습니다 그대가 가진 하늘의 몸을 빌면 또 깊은 우물이 열리는 것은 직립의 존재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운명임을 받아들입니다
아지랑이 같은 고요*의 깊이를 견디면서 다시 내려 가야하는 하늘우물의 바닥으로 바람은 여러 생을 지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구름의 부음은 흘리지 마세요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는 주검일지라도 가장 높이 나는 새의 가장 푸른 심장이 되는 것입니다
* 송재학의 시 「황무지란 바람을 숨긴 이름이기도 하다」
어탁
신현락
물고기의 몸을 재고 있다
줄자에 기대어진 그 생의 칫수는
얼마쯤일까 그는 월척을 가늠하며
한 눈금을 넘어서는 것에만 관심있는 것이겠지만
수묵빛 물속처럼 고요한 혼절의 끝에서
떠오르는 물의 측선들은 분명
죽음의 심연을 재고 있으리라
아가미 구멍 고요히 닫혀 있는
그 원본의 결구 위에 삼베가 놓여지고
한 뜸 한 뜸 새겨지는 비늘의 층층 세월무늬
그러나 화폭 속에 결단코 새겨지지 않는
나머지 반생이 꼭 있는 것이니
물고기는 흐린 입술을 열어
치어떼 황홀한 물결을 마지막으로 흘려보낸다
푸른 등지느러미 헤엄쳐 가던
물길의 입구가 조용히 봉인된다
빛과 어둠의 수면에서 탁본되는
저 생생한 수의!
수작(酬酌)의 감각
- 달마절로도강도, 김명국(1600-1662) 작, 지본수묵, 97.6×48.2cm
신현락
명정酩酊은 외로움의 극치에서 오히려 간결하다
자유롭게 스쳐가던 묵선은
짙은 눈썹에 닿아서 잠시 촘촘해지다가
솔기 없는 가사를 입히고 나면
이전에 없었고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이 서쪽에서 왔던 것
벽에 걸어두거나 지갑에 넣어 정표로 섬기는 일은
후세의 괴이한 풍습,
늙은 정인은 이미 강을 건넜는데
당신과 나 사이에 백 년을 격하여 주고받는 수작이란
술잔에 뜬 달을 나누는 일?
팔만사천 모공이 달처럼 열려야
한 줄기 갈잎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외통수를 부른다 잔을 받으란다
시시한 수작은 통하지 않으니
외로움은 내통內痛하고 외통外通하단다
목숨을 두고 간통間通하자고 꼬드기지만
잔을 거두면 자작자작自作自酌 훨훨 강을 밀며
날아갈 저놈의 달!
혼자서 곰곰 문질러보는 눈썹의 안쪽이 흐릿해진다
순순히 곁을 따르는 내외가 여백이므로 월인月印이 도강에서 오히려 자유自遊한 것은 선대의 오래 묵은 전언, 그것을 동쪽으로 갔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 한들
오직 한 사람이 당신 바깥에 서성이는 것
남은 잔을 들고 바라본다
주거니 받았거니 흰 달을 두고 멀리서 짖는
목쉰 개의 울음 몇 점 그림 밖으로 흩어진다
달의 시간
- 오이도
신현락
여기 바다는 민물과 몸을 섞으면서 소금을 낳지 못 하게 되었다.
염전조차 매립되어 섬 전체가 소금무덤이다.
그래도 주말이면 수도권의 새로운 명소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해안의 불빛이 흘러넘친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달라는 낙서를 몸에 두르고
방파제 끝에 솟대처럼 서 있는 빨간 등대,
달의 해안으로 날아간 새의 발자국 안에서 선홍빛 구름이 떠다닌다.
기억에 날짜변경선이란 게 있다면 그곳 어디쯤이다.
소주 한 잔에 한 점 노을을 떠먹으며 사람들이 발길을 돌리는 지점에서
달의 지도는 가끔씩 구름을 유산하였던 소금창고를 지난다.
바닷물이 햇빛의 온도를 따라갈 때
저무는 몸 위에 소금을 뿌려주는 시간을 달이라고 부르는 건
갯벌이 바다의 자궁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런데 염전으로 가는 길에서
노을처럼 사라지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달과 만나는 것은 섬이 아니라 무덤에 염장해둔
소금 아이의 초경의 바다이다.
서먹한 표정으로 늙어가는 섬은 생의 연대기보다 천천히 삭아 내린다.
나는 일찍이 이곳을 지나왔으나 기억의 내상에 뿌려지는 소금의 두께에 따라
폐경의 차이가 생기는 것임을 지금까지 알지 못 한다.
그것은 바닷물이 바람을 따라가는 철지난 연애에 속하는 일이어서 더 이상 달의 시간을 밀어 올리지 못하는 참회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고백하건대 내 참회록은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맑고 뜨거웠던 시간을 비워버린 푸른 소주병은 비로소 재가 된 입술을 바람에 띄운다. 등대……. 한 줄기의 소금문장이라도 세우고 싶은
어떤 풍경이 사원처럼 비밀한 통로를 갖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돋아나는 달의 시간으로 읽는다.
물의 인력에 불타는 소금을 뿌려주는 시간은 중력을 이탈하기 직전의 일이다. 기억의 날짜변경선을 떠다니던 구름의 비늘이 벗겨진다. 손을 들어 만져본 노을색이 비릿하다.
안개상습지역
신현락
안개를 풍경의 결핍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기차역 부근에는 매일 새로운 안개가 배달된다
떠나거나 남는 계절의 체온 차이를 안개상습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의견은 고전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는데 안개의 이역으로 떠나기 위해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역무원의 전문가적 견해도 참작되었다
신문지상에 가끔 다중추돌사고 기사가 실린 뒤엔 혐의를 뒤집어쓴 안개는 어김없이 추방당하고 만다 그러나 맑은 날은 며칠 가지 못하는데 안개는 규격품이 없으므로 유사품이 판을 치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유사 안개는 전염성이 강하여 황사와 스모그에 쉽게 붙어서 안개를 무시하거나 무서워하는 초보자들조차 진짜 안개를 그리워하는 날이 많아졌다
거리에서 시간을 오래 보낸 사람은 역사에 부려지는 안개를 보며 늙었기에 처음 본 사람은 그와 안개를 구별조차 하기 힘들다 그는 안개꽃을 들고 역사에 들어서는 당신이 안개의 초짜인지 타짜인지 이른바 안개상습범인지 당신의 발목이 꺾이는 각도만 보면 안다
여기에서 안개의 장물아비는 시간뿐이다 그렇지만 늙은 안개의 장물에는 상한 발목이 대부분이다 누군가 건강한 발목만 남기고 철로를 걸어 사라져갔다는 소문이 무성해도 안개 밖으로 사라졌다, 고 쉽게 처리하는 게 이 지역 사람들의 어법이다 그래서 모든 수하물 포장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의! 직사광선을 피하시오!
안개를 그 지역의 명물이라고 하는 건 외지인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안개의 지도에서 이역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이나 부산으로 떠나는 기차바퀴에 수천 번도 더 잘린 발목 위로는 하계의 영역이어서 여기서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건 저수지에 사체가 떠오르는 사건처럼 흔한 일이다
당신이 떠나는 동안 안개와의 혼숙을 풀고 나온 죽은 자들의 발목은 자신의 몸을 찾으려고 떠도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타인의 발목은 쉽게 알아보지만 자신의 것은 알아보지 못 한다
당신의 발목 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안개이다 정말이지 안개는 풍경의 잉여물이 아니다 안개의 시정거리가 얼마인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습한 관절에 접 붙어서 익명의 빙의를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게 안개의 속성이다
당신이 안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풍경 탓이 아니다 자신의 발목을 의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자꾸만 신문지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숙의 발목을 지우고 서성이는 안개꽃이 허공에서 모가지를 꺾듯이 당신의 몸을 벗어날 때 다시 안개는 상습적으로 싱싱해지는 것이다
<신현락 시인 약력>
1960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아홉 살에 수원으로 이사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음.
1979년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1983년 인천교육대학 졸업.
1984년 강원도 평창군 용산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함.
1990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1992년 충청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됨.
1996년 시집『따뜻한 물방울』(신원문화사) 발간.
1996∼2000년 한국교원대학교 강사.
1998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학위 취득 .
1998년 논저 『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한국문화사) 발간.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됨.
1998년 한국비평문학상 우수상 수상.
1998∼2004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2009년 시집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도서출판 움) 발간.
2012년 월간 《우리시》 부주간.
2012년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도서출판 북인) 발간.
2012년 현재 수원 당수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