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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애기똥풀 / 황연산 - 개심사 종각 앞에서 / 최영철 - 고요의 입구 / 신현락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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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심사 애기똥풀


  황인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엇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물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는 천 길이나 깊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요동치는 배를 잡고 허리띠를 풀며 뛰어 들어갔지만 이런 낭패가

있나, 깊이가 몇 길은 되어 보이는데 얼기설기 판자로 바닥만 엮어 놓고 군데군데 구멍만

뚫어 놓았지 칸막이가 없다.
  엉거주춤 볼일 보던 사람, 앉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어정쩡하다.
  몇몇의 눈길이 동지애를 느끼며 같은 자세를 취하길 원하였지만 안사부인 볼일 보는 화

장실을 열어본 것처럼 놀라 아랫배를 내밀고 엉덩이에 댄 두 손에 힘을 주고 나왔다.
  천 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 하나로 하늘도, 가냘픈 애기똥에 기댄 마음도 옷을 벗지 못한다.
  개심사를 감싸고 있는 상왕산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옆 칸에서 나오다 눈길 마주친 젊

은 비구니의 얼굴엔 진달래 산불이 다시 옮아 붙고 있다.

 

 


(『제15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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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종각 앞에서
   
최영철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리
지금 한눈팔지 않고 저 먼 천리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틀린 사지로 저리 바쁘게 달려가는 당신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을 무겁다 하겠습니까
고작 반백년 지고 온 이 육신의 짐을
어찌 이제 그만 내려달라 하겠습니까

 

 

 

-시집 『찔러본다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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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계간『열린시』(2010년 가을호)
-시집『히말라야 독수리』(북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