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수풀로 이파리로
이제니
어젯밤에는 사시가 되는 꿈을 꾸었다
너를 보는 내 눈동자가 자꾸만 도망갔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한 기억에서 한 기억으로
너는 길 끝에 서 있었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으리라는 암시는
내 눈동자가 너를 지나치기 전의 일이었다
이파리는 건너뛴다
수풀은 끊이지 않는다
환각을 따라 망각하듯이
망각을 하듯 환각을 따라
꿈인 것을 아는 꿈속 꿈처럼
미안하구나 내 눈동자가 옳았다
나는 너를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어
네 곁을 비껴가던 무수한 이파리들
이파리는 다시 건너뛴다
행운에서 불운으로 건너뛰듯이
수풀로 이파리로 수풀로 이파리로
이 수풀을 건너가면 나는 너를 말할 수 있으리라
오래전 보았던 그것이 바로 내 미래임을 알아차리듯
너는 휘파람을 부르듯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너의 목구멍 속에서 솟아오른다
허튼 눈동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미워하듯이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수풀로 이파리로 수풀로 이파리로
-월간『현대시학』(2012년 10월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 미술관 / 홍일표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4) (0) | 2013.01.16 |
---|---|
불행에겐 이런 말을 / 이기철 (0) | 2013.01.16 |
서쪽으로 가면 누가 있는지 / 김용택 (0) | 2013.01.16 |
유리컵의 날들 / 최서진 (0) | 2013.01.15 |
탕게로와 탕게라 / 김승희 (0) | 2013.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