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천양희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깎는다고 깎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시집『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작가정신,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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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강해림
밤 산길 걷는데 어둠 속에서 부엉이 눈처럼 껌벅껌벅 우두커니 서 있
는 저것은
가로등 희미한 불빛 받아 더욱 차가워 보이는 양철 지붕을 고독한 자
의 모자처럼 쓰고 허공이거나 발밑 길어진 제 그림자를 건성으로 응시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동전 몇 닢이면 영원까지 판다지 고라니, 너구리, 노루 새끼 같은 순
한 짐승들 남기고 간 배설물 말라붙은 샘의 기억을 찾아 가다 만난 한
사내와 눈 맞아 주었을 영혼까지
버튼만 누르면
가로등 자동점멸기도 작동을 멈추고, 제 안의 고요의 소란으로 들끓
던 어둠도 깊어 진저리치듯, 외롭게 굴러가던 달빛 깡통 하나 철커덕
토해놓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오래 전 판매금지 되었던 것들만 생각하느라 *우라지게도 눈만 붉어
진 것들, 너무 오래 내 안에 우두커니 세워두었군 저 짐승
양철모자 쓴 자동판매기야
*박상룡의 '죽음의 한 연구'에서 인용함
-계간『시와 반시』(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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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박형권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사,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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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최동은
늦게 저녁이 오는 것은
마른 흙에 구멍을 내며 한 빗방울이 오는 것
구멍 난 흙먼지가 타박타박 걸어오는 것
늦게 저녁이 저녁으로 오는 때는
어스름이 어린 호박을 더듬어보는 때이고
옥수수 이파리들 순해지는 때이고
밭일 간 엄마의 젖이 빠르게 도는 때이고
귓속에 살던 매미가 다른 벌레의 몸이 되고
맨드라미를 바라보던 옆 사람이 오래 전 떠난 사람이고
늦게 저녁이 오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던 한 이파리가 오는 것
이파리 위 쬐금 남아있는 햇빛이 오는 것
날개를 접으며 잠자리가 오는 것
-계간『리토피아』(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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