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위선환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 속에서는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調를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 속에서는
눈꺼풀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의 하염없는 나부낌을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짓도 하는 설렘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경 속에서는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내리 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것 또한
폭설인 것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가 그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월간『시와 미학』(2009년 4월호)
-《2009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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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이영옥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땅따먹기처럼
얼룩덜룩하게
무엇인가를 구분 지으며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으로
저녁 일곱 시가 여섯 시를 감싸 안았습니다
숨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부터 안기고 싶은 거니까
안긴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것과 같은 거니까
하얀 색으로 덮는 것만큼 완벽한 이중성은 없으니까
처음에는
순한 눈망울들이 어둠 속에서
껌벅거렸는데
기어이 백 년만의 폭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편이 끊겨 지키지 못한 약속
휘몰아치는 눈발처럼 당신을 떠났습니다
내가 가려던 귀가의 방향은 영 헝클어졌습니다
급한 이별도 잠깐 뒤로 미룰 수 있다는
뉴스를 들은 것도 같은데 휴교령이 내려지고
눈사람처럼 외롭게 웃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습니다
얼굴은 바꾸었지만 피를 바꾸지 않은 도시
입을 벌리면 녹다 만 말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제설차가 올 때까지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계간『시와 미학』(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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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사윤수
높은 궁지에서 분분히 하강하는 피난,
눈이 내린다
오랜 나날 동안 그 앞을 지나다녔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골목의 입구
시든 꽃나무 흙덩이를 안은 채 깨어진 화분들과
창백하게 뒹구는 연탄재 위에도 눈이 쌓인다
여기는 어디선가 본 멸망의 나라
사람들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고
건너편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만
화석처럼 뻐끔뻐끔 이곳을 바라본다
두껍게 얼어붙는 시간의 계곡이
전 생애의 날개를 저어 떠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하얀 침묵이 소리 없이
지상의 발목까지 내려 쌓이는 동안
그 골목으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폭설이 서서히 골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계간『미네르바』(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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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이덕규
만년 대제국의 망국 선언이다
망국 백성들의 즐거운 환호성이다
이제 나라 같은 거, 다시 안 한다
머지않아 사라질
새 나라의 화려한 건국기념일이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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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손진은
지상의 하는 짓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하늘은 저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
폭발하듯 글줄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시커먼 지붕과 굴뚝, 거리와 나무와
사람, 개들의 뺨을 만지는
흰 먹으로 된
점과 선들의 무한 율동이
헤엄치듯 사물의 몸짓을 빌어
음과 뜻을 그리는 문자화文字畵
쉬지도 지치지도 않고 긋는 저
획선들에 감정이 실리면서
필획이 굵어지고 대담해지다
마침내 우우 떼로 몰려 찢고 부러뜨린다
그 마음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욕망의 바퀴들
느닷없이 고립되고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진다
그럼에도 끝내 지상의 신민들은 못 알아차린다
저렇게 무수한 글씨들이 만드는
시린 여백 속에
하늘 마음이 봉인 돼 있다는 걸
때로 그걸 얼음문자로 만들었다가
자신이 너무했나는 생갓이 들 때쯤 하늘은
햇살 같은 걸 내려보내
굳은 마음을 슬슬 푼다는 것을
-시집『고요 이야기』(문학의 전당,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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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유자효(1947~ )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어린 노루
사냥꾼의 눈에 띄어
총성 한 방에 선혈을 눈에 뿌렸다
고통으로도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윤석산 마음이 머무는 시』(뉴스천지. 2013.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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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이규리
누군가가 보내고 있구나
다 할 수 없는 말
미안하단 말
이렇게 보내고 있구나
이곳, 좀체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
길을 막아서는, 관계를 지우는
적설
저것이 이별의 형식인 것을,
공회전하는 바퀴엔
눈이 눈을 밀어내고 있었지
눈은 눈을 밀어낼 수 없었지
그러는 동안 우리는 방전되고 있었지
부드러운 폭언
꼼짝없이 무너지는 별사가 이만한 순백이라면
미안하지 마라
이별이란 결국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인 것을
처음보다 조금 비껴 세우는 일인 것을
-웹진『문장』(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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