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를 찾아서
안도현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
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 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연애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 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 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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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 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 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갈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
숲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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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이 1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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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이 2
유난히도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울 내 心身蟲에
나무 몸 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온통 속 비어버린
몸이었기에 봄이 오고 여름이 왔어도 새 잎 돋지 않았음을 못
보았다. 무성했던 잎이 잡목들의 잎이었음을 못 보았다. 그토록
오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자작나무의 불운을 못 본 것이다. 간밤 비에
젖은 몇 개의 밑둥 혹은 등걸을 보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 앞에서 몸
숨겨버린 자작나무 몇 그루를. 이미 두엄의 색을 닮아 가고 있는
생톱밥더미를 보았을 때야 알았다. 베어진 가지 사이의 햇빛이 숲 전체를
밝아보이게 한다는 것을. 그 빈터로 낯선 길 하나가 새로이 놓여지고
낯선 등걸에 잠시 앉아본다. 아직 축축하다. 햇빛을 따라 성글게 놓여진
길에 들어선다. 자낙나무 숲은 또 이대로 자연스럽고 나는 익숙하게 걸어
나온다. 불운한 기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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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뱀파이어
박정대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래집게에 집혀 집승처럼 울부짓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성소(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곳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 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 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현대문학.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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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
김윤배
새들은 자작나무 숲을 향해 날아갔다
새들이 날아간 하늘은 붉게 충혈되어
깊은 궁창에서 터지려는 격정을 누르며
자작나무 숲이 이루는 침묵을 지켜보고 있다
새들이 날아가는 동안 그렇게 길을 틔우고
부드러운 깃털 소리로 빈 몸 채워
자작나무 숲의 귀를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새들 날아간 하늘에는 깃털 하나 흩어져 있지 않다
붉게 충혈되어 있던 하늘은 서서히
고요 속으로 몸을 뉜다
자작나무 숲으로 날아든 새들
가벼운 날개를 섬광처럼 부딪쳐
숲의 오래된 침묵을 깨운다
침묵의 뿌리는 이미 침엽수 지대를 지나
툰드라의 교목이 이루는 광활한 수림에 닿아 있다
새들이 쫑쫑쫑 자작나무 가지마다 발자국을 찍고
둥지를 틀어 오랜 비상 끝의 안식에 들지만
어둠 속에서 유령의 눈처럼 발자국들 살아나
또 다른 자작나무 숲을 꿈꾼다
새들 머무를 곳은 기억 속 무성한 자작나무 숲
새들의 저 불안한 안식이 슬프다
-시집『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문학과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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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에서 나를 찾는다
서정윤
떠남이 시작되었다
화단을 벗어나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이제 자작나무 숲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무와 함께 서 있을
어느새 나 아닌 남이 되어 있을
자작나무가 되어 있을...
땅위에 배를 대고 꾸물거리는
애벌레가 된다
스스로의 삶에 묶여
다른 삶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탈태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나는 다른 많은 나무와 같은 모습
어느 나무를 가리켜도 나인 것이고
그건 다시 나가 아닌 것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
자작나무 숲도 사라질 것이다
삶은 너의 주머니 속에도 없고
나의 입술에도 없고, 아득히
보일 듯 말 듯 멀리 있지만
항상 가까이 느끼는 허기증이 되어
스스로를 마모시킨다
물처럼 스며든다.
-시집『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문학수첩.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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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이동순
숲이 왜 이리도 조용할까 하고
내가 하얀 자작나무 숲을 유심히 들여다볼 때
나무는 마치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초록의 팔을 잔잔히 흔들어댄다
내가 그 광경을 지긋이 바라볼 때
나무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더욱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온몸을 우수수 우수수 떨어댄다
이따금 떨어지는 마른 잎들을 바라보며
저것은 나무가 사람에게 무엇을 알리려는 엽서일까를 생각하는데
이럴 때 하늘은 나무들의 빽빽한 손짓 사이로
파아랗고 해맑은 웃음을 슬쩍슬쩍 보여준다
-시집『가시연꽃』(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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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아래서
이기철
자작나무 아래 서면 나의 머리카락이 신선해진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에
슬라브여자의 종아리를 닮은 자작나무 아래 서면
내 가슴은 새로운 예감으로 두근거린다
신발을 신고 가도 시금치밭과 부추밭에 닿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생을 길들이면
머리가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를 자작나무의 흰 몸 아래서
비로소 깨닫는다
자작나무 아래 서면 십년 전 면양말을 신고 다녀온 시베리
아의 잡목림과
첨탑을 에워싼 자작나무들의,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황혼이
생각난다
그 저녁은 소파처럼 아늑했고 잎새에 묻힌 그 어둠은 솜이
불처럼 폭신폭신했다
여자들은 빨리 말하고 남자들은 두루미같이 느리게 운하를
건너는,
놀 아래 서면 제 그림자가 바로 놀이 되는 사람들
푸슈킨의 동상과 성피터 대제의 구리빛 장검이 놀빛에 물드
는,
그 아래 밤의 요정들과 검은 옷 입은 사제들이 구약 속의
행간처럼 성스럽게 지나갔다
나는 그 깊은 비유의 행간, 어두운 구세기의 성서를 덮고
이제 한국의 온돌에 앉아 시를 쓴다
절벽만큼 아슬아슬한 것은 없지만 외로움만큼 향기로운 것
도 없다고 쓴다
자작나무 둥치는 차갑지만 떨어져 내린 이파리들은 따뜻하
다고 쓴다
12월에 부르는 여치 방아깨비의 이름은 쓸쓸하지만 저녁 밥
먹고 베란다에 나와 쳐다보는 별빛은 아늑하다고 쓴다
슬라브 여자가 만지던 항아리는 금이 갔지만 한국의 여자들
이 만지는 청자빛 찻잔은 창연하다고 쓴다
자작나무보다 먼저 봄 채비를 마치고 손을 닦는 산벚나무의
이름을 부르며
이미 벽장 속에 들어간 지 오래된 호롱불을 꺼내 심지를 올
리며 쓴다
12월은 해마다 울고 떠나는데 적막만큼 싸늘한 그믐밤이 오
면
내 아는 사람아
아무래도 오늘밤은 내 마음의 때 묻은 동정 자락에
슬픈 소식 하나쯤은 묻어와야겠다
-시집『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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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앞에서
박진성
동이 터 오는 새벽에
자작나무 앞에 누웠다
관례와도 같은 사랑을 지나고
내 몸에는 熱이 많았다
千變萬化의 하늘이 다만 네 심장이다
낮은 목소리의 어머니,
열어두어라 타오르고 싶지 않은 자에게 사랑은
불붙이는 법 없다
자작나무 이파리 같은 손으로
내 이마를 만졌다
나는 순결한 태양 앞에서 얼굴 붉히고 있었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내 몸 속으로
어머니 들어오셨다
땅 속에서 혼자 呻吟하시는 어머니
자장, 자장, 자작나무 내 어머니
-월간『현대시』(200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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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봉분
김선우
낮잠에 들었다 깬 맑은 가을 오후 저, 저, 저 나비 잡아라
꿈속의 내가 평상을 박차며 허둥댄 것도 같은
내 낮잠 속으로 누군가 자러 들어와 한잠 곤히 들었다 방금 나간 것
도 같은
깨어보니 나는 큰대자로 잠들었던 모양인데 나비를 쫓으러 퍽이나
달렸는지
침대 발치에 머리를 누인 거꾸로 놓인 큰대자인지라
떡 벌어진 다리는 말고 조금은 섬섬하게 다리를 벌린
거꾸로 선 매촐한 큰대자 같은 자작나무 한그루 떠올린 것이다
말하나마나 몸빛은 재처럼 희디희어서 사바사나*, 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 것인데
거꾸로 선 희디흰 자작나무의 잠,
송장자세로 삶을 건너는 고즈넉한 휴식이 나는 대번에 그리워져
내 죽음의 형식을 벼락처럼 알아채고 만 것이다
화장한 나를 묻은 뒤 자작나무 묘목 한채 심어주면 좋겠구나
원한다면 언젠가 내 옆에 그대의 육신도 좋은 나무 한채로 이사와도
좋겠구나
그곳은 너무 울창하지 않은 이제 막 꿈꾸기 시작한 황무지여도 좋겠
어서
하나둘 이사온 사람들이 한 백년쯤 뒤에는 숲 한채 넉넉하게 이루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 내가 사랑한 자작나무 한그루 노란 잎새 나비떼처럼 떨
구고 있는
한적한 가을 오후 저, 저, 나비 잡아라 희디흰 송장에서 비끄러져 내
려오는
수천수만의 저 나비떼, 나비떼 말이지
* 요가 동작의 하나. 산스크리트어로 송장자세를 뜻함.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차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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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사랑
권영부
얼룩말이 몸을 비비고 지나간 다음,
자작나무 줄기에는 희고 까만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무는 휘날리며 내달리던 얼룩말의 습생을 닮아
바람이 군락(群落) 사이로 우루루 떼지어 몰려가면 잎들이 갈기처럼 날린다
내 어릴 적, 아버지가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까칠까칠한 수염을 내 뺨에 비빌 때마다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움트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수염이 나에게 옮아온다고 믿었다
사나흘만 지나도 무성해지는 수염을 보면서
싱싱하게 흔들리는 자작나무 잎들을 생각하다가
하얗게 빛이 바랜 자작나무의 등줄기 속에서
팔십 묵은 기다랗고 허연 수염을 본다
취기가 오르는 날이면,
잠자는 내 새끼의 발그레한 볼에 뺨을 비빈다
그때마다 뺨에는 새록새록 얼룩이 돋아나고
미간을 찡그리며 잠자는 내 새끼의 가슴 위로
수백 마리의 얼룩말이 허연 먼지를 날리며 내달리다가
등짝을 열심히 자작나무에 문지르는 장면을 보면서
자꾸만 내 수염을 만져본다
아버지 냄새가 난다
-시집『자작나무의 사랑』(도서출판 내일을 여는 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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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사랑법
권정일
분주하다. 등피불을 들고 오래 꿈을 꾸는 자작의 흰 핏줄들,
허공 깊숙이 무언가 멈칫멈칫 신호를 보내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들,
이 엄동, 잠깐 말(言)을 비우고 부르튼 속살에 더운피를 수혈
하며 바닥모를 겨울새의 밀애를 듣고 싶은 것인가
솔기 하나 없이 빗살무늬 허공이 열린다 죽지에 맨발을 묻은,
조금은 수척한 떠돌이 겨울새의 해바라기 씨 같은 고백을 촘촘히
듣고 있는,
자작은 바람보다도 자주 흔들린다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
진다
톡-톡,
열려 있는 허공의 중심에서 새들은 자작의 눈(筍)을
틔우는 것이다
『국제신문』(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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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위의 자작나무
장철문
자작나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돋아나고 있다, 가슴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한번도 채우지 못한
목마름의 샘을
자작나무가 틔우고 있다
자작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를 보고 있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낳고 있다
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나무가
잎사귀에 피어서
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계간『서정시학』(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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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자작나무는
한영옥
불현듯 마주치면 어지간히 반가웠을 사람이
저만치 오는 기미에도 곤혹스러워지는 두근거림
그따위 두근거림이 비롯된 곳은 어처구니없게도
하얀 과꽃, 보라 과꽃 간지럽게 잘도 어우러져
잘도 웃어대던 웃음바다, 그 흥겨운 곳이었기에
그간의 찰랑대던 꽃밭을 냉큼 갈아 엎어버리고
누렇게 시든 풀잎, 한 판 잘 덮인 방죽 길에나
나서보아야겠다고 홧홧한 얼굴로 나온 것이리라,
나온 김에 불현듯 마주쳐도 아무 표정이 없을
생판 낯모르는 칼바람 떼에게 회초리 쥐어주고
후줄근한 등판이나 실컷 두들겨 맞아야겠다면서
방죽 길 비탈에서 질정 못하고 견디는 것이리라,
바닥난 저수지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힘겹게
또 한 꺼풀 껍질 일으키며 발을 구르는 것이리라,
불현듯 마주치면 어지간히 반가웠을 사람이
저만치 오는 기미에도 어찔어찔해지는 발걸음
그따위 곤경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이리라
저 사람, 비탈길에 선 흐늘흐늘한 자작나무는.
-계간『서정시학』(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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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사원
최정란
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 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린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들은 바람의 목구멍 깊이 울고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녔다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한 전생이 저 나무의 한 잎 이었을 터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시인시각』(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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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김왕노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나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부르며 찾던 사람은 세상 건너편에 서 있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이나 전쟁터에서라도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라도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시집『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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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자작나무
유정이
밤이 되면 미친 밤들이 당신을 물고 밤새도록 놓지 않았을 거야 적
막의 밑바닥을 치는 바람 소리에 뿌리조차 하얗게 얼어버렸을지도
모르지 자작나무 숲으로 불어간 바람을 나는 안다 솜이불 한 채 장
만해 시집가야겠다 네 몸 끝으로 물기 마른 날들이 바람구멍 가득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잘 맞지 않는 서랍 속 깊이 넣어 둔 엽서 한
장 네게 보낸다 오랜 배회의 밤들을 나는 안다 소멸을 말하는 입 커
다란 밤이 숲에 가득하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네 몸에서 잎맥만 남
은 잎사귀 한 장 답장처럼 날아왔다
붉은 피를 찍어 이불 한 채 짓고 시베리아 평원 눈보라 속 어디쯤
에 숨겨진 네 발자국 몇 개를 기억하는 밤이면 새들이 내 몸 속을 날
아다녔다 은빛 날개가 다 지워지도록 날아다녔다 네가 배회하던 숲
의 발자국을 찍어 지워진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는 밤, 모든 밤이 평
등하지 않다는 것을 너에게 배운다
-계간『문학청춘』(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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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이홍섭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긴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을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머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었다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
-시집『터미널』(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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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한 그루 되어
구재기
나의 알몸이 하얗게
백일하에 드러나기까지에는
나의 장식부터 벗어버려야 했다
봄이 화려함으로 급히 지나가고
여름이 몸부림으로 다할 때까지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가려왔던가
가을에 들어선 이제
산과 들에 열매로 가득할 때까지
얼마나 큰 욕심으로 매달려 왔던가
무성한 장식을 하나둘씩
모두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이 보이고
나의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장식을 홀가분히 버리고 나면
어느덧 하늘을 알 나이에 이르고
자작나무 한 그루가 되어
산녘에 홀로 서 있어도
전혀 슬프거나 외롭지도 아니하나니
고산심곡高山深谷 숲 속이라야
맑디맑은 물 내리흐르는 까닭을 어이 모르겠는가
어두운 밤일수록 더더욱
달 하나, 별무리 내려와 몸을 적시며
밝게 닦아내는 걸 왜 모르겠는가
-시집『편안한 흔들림』(문학의전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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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
-톨스토이 영지에서
이태수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잎사귀 떨어뜨리는
자작나무들, 훤칠한 발치 사이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잔뜩 찌푸린 허공,
낙엽들이 가슴속에도 흩날린다.
모스크바의 흐린 거리와 거기서 달려오던
길가의 자작나무들도 예까지 따라와서
자꾸 잎사귀들을 떨어뜨린다.
숲속 길을 한참 걸어 당도한
톨스토이의 무덤, 비석도 팻말도 안 보인다.
누군가가 왜 이리 초라하냐고 중얼거리며,
넓은 영지와 너무나 소박한 무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관모양의 봉분 위에 가득 놓여 있는 생화들이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다시 오듯 말듯 내리는
가는 비, 이마에 스치는 바람소리.
러시아 사람들은 왜 자작나무들을 반드시 두 줄로
세워놓는 걸까. 그 사이로 낙엽을 밟고 걸으면
낙엽 밟히는 소리가 가슴속에도 쌓인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는 사이 천천히 날이 저문다.
톨스토이 영지 입구에서 토산품을 팔던 노파들도
하나둘씩 짐을 꾸려 자리를 뜨는데
자작나무들은 여전히 잎사귀 떨어뜨리며 서 있다.
-계간『시와 정신』(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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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빗자루
임윤
도끼로 장작을 쪼개면
자작자작 쏟아지는 햇살
새끼손가락 굵기 가지만 묶어
건식 사우나 벽에 걸어둔다
페치카 장작불에
맥반석이 후끈 달아오른다
천 근 무게가 걸린 등짝이
나른해지는 저녁나절
자작나무 빗자루를 물에 적셔 흩뿌리면
화르르 피어오르는 수증기
등짝에선 순식간 땀이 흐르고
빗자루로 온몸을 두드린다
이파리에서 돋아나는 숲 향기가
맨살 파고들어
한 계절 머금었던 햇살들이
타닥타닥 튀어 오른다
무릎 관절 두드리고
어깨 두드리고
건조한 공기에 후줄근 늘어진
이국의 가을을 두드린다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리는
영하로 떨어진 사할린의 밤
공허하게 들려오는 시베리안 허스키 짖는 소리
며칠 쯤은 부단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시집『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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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의 꿈
홍은택
1.
하늘을 나는 흰 말을 그린 화공의 마음이었나 채색판에 자작나무 고
운껍질 입히던 섬세한 손길의 꿈이었나 경주 황남동 155호 고분 속 천
마도를 보고 온 날, 나는 툰드라의 설원에 서 있었다 설원에 발을 묻
고 선 자작나무 숲이, 흰 나무껍질이 역광으로 눈부셨다
2.
흰 채색의 평면이 부풀어 근육으로 꿈틀거렸다 힘차게 울음 울며 앞
발을 굴렸다 지포라이터를 꺼내 말발굽에 불을 붙인다 흰 말이 설원을
달린다 자작자작 발굽이 타고 무릎이 타고 허벅지 근육에 불이 붙는다
꼬리와 갈기를 불길로 흩날리며 허공에 떠오른다 날개만 남아 하늘을
날아오른다
3.
자작나무 내 머리 속으로 흰 말 한 마리 훨훨 사라진다
-계간『시와 표현』(201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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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수액을 마시다
김남극
누가 자작나무 수액을 한 컵 따라준다
들여다보니 하늘도 있고 겨울바람도 있고
짐승들의 울음도 다 녹아 있는 듯하다
한 모금 마시고 먼 산을 건너다보고 앉아
등과 골 사이의 음영이 만들어낸 깊이만큼
세상은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한 모금 마시며 또
쓸쓸함을 하복부로 밀어낸다
소화가 잘 안되는 일들만 쌓여서
명치끝이 트지하고 꽉 막힌 듯 먹먹하다
산 속에서 불혹을 넘기도록 자작나무 수액을 먹으며 살았는데
갑자기 여기 도시로 오니
읽을 간판은 많고 배달 오토바이 소리는 세상을 다 가려
새들의 청청한 울음도 아이들의 발랄한 소리도
다 오토바이 소리에 점령당하고
저 점령군에 대자보 하나도 들이대지 못하고
귀 막고 눈 닫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누가 자작나무 수액을 한 컵 따라 주길래
단숨에 마시고는 더 달라고 손을 내민다
한 컵 더 마시고 가만히 앉아
수액이 지나는 뱃속 길을 따라가 본다
굽고 꼬여도 길을 잘 내니
물은 길을 기억하는 것이다
길을 뚫으니 체기가 사라진다
트림이 두 번 난다
-반년간『내일을 여는 작가』(2011.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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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의 자세
복효근
먼 나라 북쪽에 와서 자작나무 숲을 처음 보았다
때론 3 미터도 넘게 쌓인다는 눈
자작나무도 지붕도 사람들의 어깨도 가파르다
저마다의 생이 갖고 있는 가파른 경사를 이해하기로 한다
자작나무숲은
그것이 무엇이든 쌓아두지 않는다
속살로 생을 건너가는 성자들처럼
다만 견딜 뿐 아니라 그 빛깔을 닮아버려서
벗은 살결조차 눈빛이다
이 나무의 족속을 우러러 올려다보아야하는 이유가 또 있다
천지사방에 길이 막혔을 때
하늘을 향하여 한사코 길을 내는 저 기도의 자세
-오직
이 길 끝에 한 줌 재도 연기도 남지 않기를
나지막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끔 이웃 가지를 흔들어 깨워주며
무거운 오오츠크 기단을 맞서는 흰 빛의 연대를 보았다
-시집『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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