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남궁벽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면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북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 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의 역정(驛程)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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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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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유종인
무덤까지 와도 막히는 풀이 없다
묏등이 한 번 솟은 후에
다시금
초록을 들어 올려주니까
풀은 언제까지나 무덤을 쓰다듬는 노래니까
지구 땅 별에서 손을 뗀 적 없는
늘 푸른 집착이니까
주검보다 드센 곳에
하얀 풀뿌리가
높으니까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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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이수명
풀이 허공을 떠다닌다.
풀이 목을 휘감는다.
검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목이 닫힌다.
원근법이 사라진다.
풀이 허공에 금을 낸다.
내 얼굴에 금들이 떠다닌다.
금이 나를 덮는다.
풀은 아무것도 들어 올리지 않으며
풀은 생각에 부딪치지 않는다.
풀은 나를 베어내지만
내 생각을 쓰러뜨리지 않는다.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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