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틈 시 제목의 모음 - 김기택/주용일/이태관/김영철/이화은/이상국/임영조/박성현/정끝별/이진명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2. 6. 10:44
728x90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활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시집『바늘 구멍 속의 폭풍』(문학과 지성사, 1994)

 

-------------------

 

주용일

 

 

고마워라 생살 찢어 몸에 틈 만들어
나를 받아주시는 이,
그 틈으로 생명 키우시는 이
나는 오늘 세상의 갈라진 틈 통해
낯익은 당신의 상처를 만났다
상처가 빚어내는 생명들을 만났다
봄 한낮 바위틈으로 흙살 틈으로
뛰어나오는 푸르고 붉은 빛들은
내 몸을 푸르게 붉게 물들였다
오래 전부터 그대 마음에 틈이 놓여
사랑으로 내가 들고나는 세월,
허공에도 틈이 있어 시간의 방석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의 한나절,
틈이 있으니 내가 있었구나
고마워라 세상의 모든 틈들이여
나에게 틈을 주어 풀방구리 생쥐처럼
들락거리게 하며 머물게 하며
희열을 주는 것들이여

 

 

 

-시집『꽃과 함께 식사』(고요아침, 2006)


---------------------


이태관
 

 

낡은 바람에도 삐걱이는 건

관절이 풀린 탓이다

개미가 집안을 순례하고 있다

틈이 생긴 까닭이다
 

언제나 틈이 문제였다

기껏 성사시켜 놓은 거래도

미꾸라지처럼 파고드는 놈은 있어,

벼와 나락 사이

태풍 특보가 지나고

아내와 자식 사이

바람이 파고드는 뼈의 시림도

온 몸에 틈이 생긴 까닭이다
 

틈을 메우기로 한다

관절의 구석구석마다 실리콘을 쏜다

어느새

길이 사라진다
 

세상 어느 곳에 틈이 없으랴

바위 속으로도 물은 스미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

삶이란 이름으로 벌여놓은 틈은

어찌 메우나

삼십년 관절염으로 고생했던 아비의 길을

지금 내가 가고 있다

낯선 바람이 관절 사이를 스쳐 지난다 

 
 

 

-월간『현대시』(2009년 10월호)

 

-------------------

 

김명철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적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모난 돌과 핸들 꺾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당신을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마침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당신은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다

 

틈은 처음에 은밀하게 찾아와서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시집『짧게, 카운터펀치』(창비, 2010)


-----------------------


이화은

 


다만 벽을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그 집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틈 사이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처럼
한 땀 한 땀
꿰매듯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 앉아
면벽하고, 면벽하고 마시는 술은 늘 비장했다
저 벽
말없이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놈 앞에서
술꾼은 쉽게 분노한다
분노는 음주의 본질이기도 하니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술잔을
바람벽의 엄숙한 면상에 던지는 자도 있지만
이만한 술친구도 없다고
실금만 한 틈이라도 있으면
감쪽같이 숨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밤이면 또 감쪽같이 스며든다
날이 밝기 전에 아물지 않은 이 도시의 수술자국이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마침내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제발 승리하기를! 밤마다
벽은 위대한 장사꾼이었다

 

 

 

-계간『시평』(2011, 여름호)


----------------


이상국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시집『뿔을 적시며』(창비, 2012)

 

---------------------


임영조

 


그가 넌짓 말을 던진다
나도 조심조심 말을 섞는다
절대로 틈을 보이지 말자!
해도, 어느새 벌어지는 틈
그 틈을 비집고 그가 쳐들어온다
간질간질 눙치듯 쉬슬어놓고
내 속을 갉아먹고 어디론가 날아가
역한 소문만 퍼뜨리는 쉬파리!


그를 보려는 내 눈과
그를 들으려는 내 귀와
그를 맡으려는 내 코와
그를 삼키려는 내 입이 곧
그가 비집고 쳐들어올 구멍이라니!
그게 바로 내 생의 틈이었다니!


진도 앞 큰 바다도 절로 갈라져
틈을 보일 때가 있다지? 감춰둔
속내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끈다지?
금간 보도 블록 사이로 촉을 내민
풀씨가 더 눈물겹고 환하듯
틈으로 엿본 생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말의 틈은 흠이라지만
사람의 흠은 그의 생을 정독할
자상한 각주 같은 것이니
더러는 틈을 보이며 살 일이다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듯이
안으로 들이려면 틈을 내줄 일이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 (제5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천년의 시작, 2008)

---------------------

  틈


  박성현

 
 

  이팝나무가 꽃잎을 밀어냈다.


  이팝나무가 꽃잎을 밀어냈다는 것은 단단한 것들이 부드러워져 그
만큼의 내력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만큼의 깊이가 허공에 새겨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햇빛이 이팝나무를 덮고 이팝나무도 등 뒤를 돌아보며 잠시 늦은
잠을 뒤척이던 그 틈에 


  벌 떼가 붕붕거리며 날아와 한 잎의 날개 밑으로 수많은 꽃잎을 빨
아들이고 꽃잎이 제 아래 그만큼의 그늘을 흔들던 그 틈에

 
  불쑥

 
  내 몸에서도 착하고 조급하고 물렁물렁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소리
가 들리기도 했다.


  뒤엉킨 채, 마주보며 흘러가는 것들이 이팝나무를 흔드는 풍경을
보기도 했다.

 

 


-웹진『시인광장』(2010년 8월호)

----------------

틈!


정끝별

 
 

일진의 폭풍이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내달릴 때 흠씬 젖은 생쥐가 놀라

나자빠질 때 한달음 호랑이가

일 톤의 앞발로 일격을

내리칠 때 연분홍 호호꽃이파리가

날선 호랑이 이빨에 날아들 때

 
쑥쑥 자라는 발톱들 사이의, 빈틈!
 

호랑이가 터벅터벅 제 갈 길 가는

생쥐가 쪼르르 제 구멍에 드는

대나무 숲이 쉬쉬 제 몸을 가누는

일진의 폭풍이 주춤 제 숨을 놓는
 

사랑의 섬광처럼

눈물이 시작되는 눈맞춤의, 동틈!

 
앓던 내가 나를 빌려

내가 나를 잠시 잃어줄 때처럼

한눈팔이의, 오 허틈!

 

 


-계간『작가세계』(2010년 봄호)

------------------


이진명
 

 
여러 날 만에 햇살이 퍼진 겨울 아침

무슨 일 때문인지 이른 외출을 했다

버스는 탈 사람 없는 정유소를 내처 지나치고

차창 밖으로 대로의 상점들이 멍하니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가 대로에 멈춰선 차창 밖

상점들이 막 문 열기 시작하는 시간

신발가게는 벌써 바깥 매대에 신발들을 다 진열했는지

세차게 총채질을 하고 있었다

신발가게 옆 가구점

목장갑을 끼고 혼자 어두운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미니책상과 의자를 내놓고 있는 사람

서랍장을 끌어안고 구부리고 펴고 하는 한 사람

버스는 신발가게와 가구점 앞에 계속 멎고 있었다

  
한데 바깥 상점들 풍경 왜 이리 진공 속 세상 같을까

기나 긴 세상만 같을까

음 소거된 영화의 먼 화면만 같다고 순간 눈앞으로

암실의 커튼 같은 두꺼운 검은 장막이 주욱 쳐내려졌다

장막의 가운데가 손가락길이만큼 찢어지고 있었다

찢어진 좁은 틈으로 다시 신발가게와 가구점이

 
특히 가구점

키 높은 책장을 바깥에 끌어내고 있는 한 사람

그 책장을 먼저 내놓은 책상 옆에 갖다 붙이고 흔들리는가

흔들어보는 한 사람 이목구비가 물러나 있는

그 사람을 장막 틈 목격자의 눈으로 바로 이해했다

목격자의 침묵으로 바로 이해했다

행인 띄엄한 낙후된 동네 대로변에서

허름한 가구점을 했었던 내 전생을 옛 얼굴을

 
무슨 일 때문인지 무거움을 껴입고

이른 외출에 나섰던 마음이 서서히 녹았다

나는 지난 생의 내 경영을 확실히 보았으니

오늘 이 얼굴을 들고 나머지 길을 가면 되었다

마음을 놓고 무거움 없이 오늘의 생을 굴리면 되었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버스가 앞뒤로 뒤뚱하더니

아침 햇살 속 대로를 굴러가기 시작했다

 

 

-계간『문학의 문학』(2010년 봄호)